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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의 증인 신자로 양심적 병역거부를 한 주인공이 등장하는 영화 <방문자>.
 여호와의 증인 신자로 양심적 병역거부를 한 주인공이 등장하는 영화 <방문자>.

"대체복무 결정. 네가 건넌 세월이 밑바탕이었을 거야. 자세한 얘기 나중에 해줘. 사랑해."

18일 오전 11시 29분에 아버지에게서 온 문자 메시지의 내용이다.

그날 오전 국방부에서 "병역거부자에게 대체복무의 기회를 준다"는 발표가 난 이후, 나는 뒤늦게 연락을 받고 인터넷으로 뉴스를 확인해보고 있었던 중이었다. 아버지 역시 기사를 보시면서 자신의 눈을 의심하셨을 것이다.

"왜 남들 다 가는 군대를 못 간다고 하는 거냐. 젊은 나이에 전과자로 빨간 줄이 간 인생을 평생 어떻게 살아가려고 하는 거냐…." 경찰서로 스스로 구속되기 위해서 가는 날 아침까지 흐느끼셨던 아버지.

당신의 말씀처럼 그런 시간들과 아픔들이 모이고 쌓여서 하나의 변화가 만들어진 순간, 아버지는 몇 번을 확인하신 끝에 조심스레 나에게 문자를 보내셨을 것이다.

"젊은 나이에 빨간 줄 가서, 평생 어떻게 살려고 하니"

우리는 종종 양심적 병역거부의 문제가 갑작스레 나왔다고 생각한다. 낯설기도 하고, 잘 이해가 안 되는 부분도 있고. 그래서 종종 '시기상조'라는 반대의 논리가 힘을 얻기도 한다.

그러나 이 사안을 조금만 살펴보면 이렇게 오랫동안 병역거부자들을 계속 감옥으로 보낸 나라도 없다는 걸 알 수 있다. 아무 논의 없이 60여년 동안 감옥으로만 보냈기 때문에 2001년 이 문제가 알려졌을 때 사람들은 '이런 일도 있구나' 싶었겠지만 이미 1만 명이 넘는 젊은이들이 감옥에서 자신의 젊은 날을 보낸 이후였다.

해방 후 60여년 동안 1만 명이 넘는 젊은이들을 감옥으로 보냈지만,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는 여전히 인정되지 않고 있다. 사진은 2005년 6월 7일, 문상혁 청년인권연대 대표가 입영 통보를 거부한 채 국회 앞에서 입영통지서를 찢으며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를 선언하는 모습.
 해방 후 60여년 동안 1만 명이 넘는 젊은이들을 감옥으로 보냈지만,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는 여전히 인정되지 않고 있다. 사진은 2005년 6월 7일, 문상혁 청년인권연대 대표가 입영 통보를 거부한 채 국회 앞에서 입영통지서를 찢으며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를 선언하는 모습.
ⓒ 오마이뉴스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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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나서도 감옥행은 계속 이어졌다. 2006년 5월 31일까지 총 1만 2324명의 젊은이들이 감옥으로 보내졌다. 어느 주간지의 계산을 빌리자면 이들에게는 총 2만 5482년의 징역형이 내려진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812명의 젊은이들이 총을 들 수 없다는 신념을 지키고자 수감되어 있으며, 평균적으로 오늘도 2명의 젊은이들이 재판장에서 유죄판결을 받았을 것이다. 내일도 2명의 젊은이들은 감옥에 가야 한다.

이들은 면제나 특권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병역에 대한 면제나 특권을 주장하는 이들이 감옥에 가고, 평생 전과자로 살고자 하는 결정을 했을까. 자신의 신념을 지킬 수 있는 다른 방식의 복무로 사회와 공동체를 위한 의무를 다하고 싶었던 젊은이들에게 사회는 그냥 감옥에 가라고 했다.

그렇게 60여년이 흘렀다. 그리고 드디어 의미 있는 변화가 만들어졌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가 더 이상 '시기상조'라는 언명 아래 멈춰서는 안 된다. 도대체 얼마나 더 감옥에 가야 그 '시기'라는 것이 오는 것일까?

오늘도 2명이 감옥에 갔다, 내일도 2명이 갈 것이다

2001년 병역거부에 대한 사회적인 논의가 진행된 이후 많은 곳에서 공개적인 입장들이 나왔다.

2004년 대법원과 헌법재판소는 각각 '병역거부 유죄'와 '병역법 합헌'의 판결을 했지만 판결문에서는 "입법부가 이 문제에 대해 책임있는 해결을 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국회에서는 임종인 의원과 노회찬 의원이 각각 대표발의로 병역거부자들에게 대체복무 기회를 주게 는 병역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이후 UN을 비롯한 국제사회는 대한민국 정부에게 수차례 대체복무제를 도입하라는 권고를 냈고, 심지어 병역거부자 개개인에게 정부가 피해보상을 해야 한다는 입장을 정하기도 하였다. 국가인권위에서도 병역거부자들의 인권을 보장하기 위한 대책 마련을 요구하는 입장을 발표했다.

국회 국방위가 개최한 '양심적 병역거부`에 대해 대체복무 도입 가능성 공청회'에 최초의 양심적병역거부자로 수감 중이던 오태양씨가 진술인으로 출석해, 진술하고 있다.
 국회 국방위가 개최한 '양심적 병역거부`에 대해 대체복무 도입 가능성 공청회'에 최초의 양심적병역거부자로 수감 중이던 오태양씨가 진술인으로 출석해, 진술하고 있다.
ⓒ 오마이뉴스 이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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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주무부처인 국방부는 묵묵부답이었다. '비전 2030'이란 이름으로 병력자원 수급에 대한 정책을 새롭게 수립하면서 사회복무제의 전면적인 시행을 준비했음에도 병역거부자들의 자리는 없었다.

국방부의 변화가 없는 한, 병역거부자의 감옥행은 계속될 수밖에 없었다. 국회에서 병역법을 개정하는 데는 주무부처인 국방부의 의견이 결정적이고, 실제 관련된 모든 행정·절차적 책임을 지고 있는 것도 국방부이기 때문이다.

그러던 지난 9월 18일, 드디어 국방부는 "전향적으로 종교 등의 이유로 병역을 거부하는 이들에게 대체복무제를 수행할 수 있도록 추진하겠다"는 방침을 발표했다.

물론 아직 구체적인 안으로 제출된 것은 아니고 국회에서 법 개정의 절차가 필요하지만 이 사안에 대해서 가장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던 국방부의 입장변화는 감격스러울 수밖에 없다.

국방부의 계획을 살펴보면 여론화를 통한 사회적 합의를 만들어내고, 구체적인 안을 구성한 이후 법 개정을 통해 2009년부터 대체복무제를 시행한다고 한다. 이러한 국방부의 입장이 지난 60여 년 동안 단 한 번도 멈추지 않았던 감옥행을 멈출 수 있는 결정적인 계기가 될 수 있기를 바란다.

물론 시행 전까지 현재 진행 중인 재판이나 입영대상자들의 대체복무제 지원을 이유로 한 입대연기 등이 당장의 감옥행을 멈출 수 있는 임시방편으로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법원·국회·국제사회 움직인 '양심'... 이제 국방부까지

국방부의 이러한 갑작스런 입장변화에 대해 많은 이야기들이 나오고 있다. 가장 왜곡된 형태로는 '대선용 선심성 공약'이라는 것이다. 여전히 대체복무가 특권이나 면제로서 다가오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그러나 다시 한번 언급하자면 병역 거부는 기피와는 다르다. 기피는 면제를 받기 위해 자신의 특권을 사용하는 것이다. 병역거부자들은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서 다른 방식으로 의무를 할 수 없다면 기꺼이 처벌을 감수한다.

형평성이 맞는 대체복무는 면제와 특권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다. 이미 시행되고 있는 '의무소방관' 대체복무제를 누가 면제나 특권이라 하는가?(물론 현재의 대체복무제에는 4주의 군사훈련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병역거부자는 수행할 수 없다.)

또한 이러한 변화의 당장 직접적인 대상자일 여호와의 증인들은 중립을 지키기 위해서 투표를 하지 않는다. 게다가 한국의 전체 신도수가 10만 명이 되지 않는 여호와의 증인들을 위해서 이처럼 민감한 사안을 건드릴 정치인은 없을 것이다.

필자는 오히려 언론 인터뷰에서 국방부 관계자가 했던 말에서 진정성을 느꼈다. 그는 "소록도 한센복지시설과 경남 마산의 결핵병원을 비롯한 국립 특수병원과 노인전문요양시설 등에 직접 가서 실제 대체복무로서 해야할 일을 살폈다"며 "형사처벌을 감수할 정도의 신념이 없이는 수행하기 불가능한 업무"라고 말했다.

이 곳 수용자들은 대부분 24시간 근접 관찰 및 보호가 필요하며, 복무자들도 해당 시설에서 합숙근무해야 한다. 게다가 검토되고 있는 복무기간도 현역병의 2배인 36개월이다. 이 정도 일을 해야 한다면 군대를 피하기 위해서 양심을 속이는 일은 없겠다는 확신이 들었다는 말이다.

늘 이야기되었던 반론들. "양심을 어떻게 확인하는가 "모두가 대체복무를 하려고 하면 어떻게 할 것인가" "형평성에 어긋나는 일이 아닌가" 하는 질문들은 형평성이 보장되는, 아니 당장은 현역보다 훨씬 길고 어려운 일로 대체복무를 하도록 해서 해결될 수 있는 것이었다.

현역 복무기간의 2배, 합숙 및 24시간 근접 관찰이 필요한 업무. 국방부 관계자도 확신을 얻었단다. 이런 업무를 택할 신념이라면 믿을 수 있을 만 하다고 한다.

이제 시작해야 할 것은 보다 높은 차원의 사회적 논의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권 실현과 대체복무제도 개선을 위한 연대회의는 19일 오전 국회 정론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대체복무제 도입을 환영과 함께 조속한 입법을 촉구하고 나섰다.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권 실현과 대체복무제도 개선을 위한 연대회의는 19일 오전 국회 정론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대체복무제 도입을 환영과 함께 조속한 입법을 촉구하고 나섰다.
ⓒ 박지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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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한국에서 양심적 병역거부는 사회적으로 논의가 시작된 이후 짧은 시간 동안 많은 변화들이 생겼다. 물론 이런 속도의 근간에는 그동안 침묵 속에서 자신의 신념을 지켜왔던 수많은 이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논의한 시간이 짧았던 데다가 한국사회에서 군대문제가 가지는 특수성 때문에 사회적 논의가 올바른 방향으로 진행되지는 못했다고 생각한다. "대체복무제가 도입되면 누가 군대에 가겠냐, 안보가 무너질 것"이라는 만연한 가설에 대한 논박만이 이루어졌다. 이미 국제적으로 그러한 가설에 대한 수많은 반증사례가 있지만, "한국은 특수하다"는 반론만이 쳇바퀴처럼 이어졌다.

이제 국방부의 결정을 계기로 보다 구체적이고 생산적인 논의를 진행해야 한다.

이제 매년 적어도 1000여 명의 젊은이들이 감옥의 좁은 방에서 갇혀서 젊음을 보내지 않고 이 사회에 필요한 곳에서 일할 수 있는 기회의 첫걸음이 시작되었다. 그렇다면 이 젊은이들이 어떤 곳에서 어떤 방식으로 의무를 수행해야 하는지 우리 사회가 공개적으로 논의해야 할 것이다.

또한 현재 군대와의 형평성을 맞춘다는 이유로 또 다른 징별로서 작용할 수 있는 '무조건 힘들고 어려운 일'이 아니라, 장기적으로 군 복무여건과 인권의 개선을 함께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진전이 편협한 안보 논리 등의 이유로 다시 뒷걸음질 치지 않도록 시민사회의 꾸준한 관심과 참여도 필요하다.

겨울이 오는 감옥에서 이 소식을 접했을 젊은이들의 간절함을 이 사회가 느껴야 할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임재성 기자는 양심적 병역거부자로 2006년 5월 충주구치소를 출소했으며 현재 '전쟁없는세상' 회원입니다.



태그:#병역거부, #대체복무, #국방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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