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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세계사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

전화기 발명가

[ Alexander Graham Bell ]

출생 - 사망 1847.3.3. ~ 1922.8.2.

1876.2.14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 전화기 특허권을 신청하다

비슷한 시기에 여러 발명가들이 새로운 통신 수단, 즉 전화기를 발명하기 위해 경쟁했다. 그러나 전화기 시대를 연 마지막 승자는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이었다. 농아학교를 운영하며 직접 발성법을 지도했던 벨은 멀리 떨어진 사람들이 음성으로 소통할 수 있는 시대를 열어주었다. 그의 발명을 둘러싼 구구한 얘기를 들어보자.

아이디어 도용 논란에 휩싸인 전화기 발명과 특허 승인

1875년 겨울,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과 그의 조수 토머스 왓슨은 새로운 전화 장치 개발에 전념했다. 쇠기둥 끝에 달린 전자석이 양피지 진동판에 전달되는 전류를 변동시키게 되어 있었다. 전류가 소리로 바뀌어 전달된다는 개념이었지만, 좀처럼 성공하지 못했다. 벨과 왓슨은 크게 소리도 지르고 노래도 불러봤지만,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은 좀처럼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벨은이 전화장치 특허신청을 위한 설계도와 설명서를 작성했다. 1876년 2월 14일 벨의 변호사는 미국 특허국에 특허신청서를 제출했다.같은 날 일라이셔 그레이도 액체 송화기를 사용한 전화기 디자인 특허권을 신청했다. 벨 측이 한 발 앞서 제출했기 때문에 특허권을 취득했다는 말이 많지만, 정확히 누가 먼저 제출했는지를 놓고 지금도 논란이 분분하다. 그레이는 강력하게 이의를 제기했는데, 특허심사관은 나중에 진술서에 자신이 벨의 변호사 마르셀러스 베일리에게 신세를 톡톡히 진 사람이라 밝히면서, 베일리와 자신이 남북전쟁 당시 함께 싸운 전우라고 고백했다. 또한 자신이 그레이의 특허신청서를 베일리에게 보여주었다고 주장했다(물론 벨 측은 이를 강하게 부인했다).

그레이의 특허신청서의 주요 내용과 비슷한 벨의 실험실 노트 1876년3월8일자에 기록된 내용

벨은 당시 보스턴을 떠나 워싱턴에 머물고 있었는데, 심사관은 100달러를 받는 조건으로 그레이의 특허신청서를 심지어 벨에게도 보여주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벨은 단지 그 특허에 관해 일반적인 대화를 나누었을 뿐이라고 반박했다. 1876년 3월 3일 미국 특허국은 벨의 특허권을 승인했고(그의 29번째 생일이었다), 7일에 특허장이 공식 발급되었다. 보스턴으로 돌아온 벨은 다음 날 자신의 노트에 그레이의 것과 비슷한 그림을 그려 넣었다. 일라이셔 그레이의 특허신청서의 주요 내용과 벨의 실험실 노트 3월 8일자에 기록된 내용은 놀랄 만치 비슷했다. 그리고 3월 10일, 전화기 역사에서 유명한 발언 아니 외침이 있었다. “왓슨! 이리로 와주게. 자네가 보고 싶어” 이 외침은 근처 다른 방에 있던 왓슨의 수신 장치에서 분명하게 들렸다. 액체 송화기, 그러니까 물속에서 바늘이 떨렸고 가변저항, 그러니까 바늘의 떨림이 회로에서 저항을 다양하게 만들어주었다. 이 핵심적인 아이디어를 벨이 사실상 도용한 것 아니냐는 논란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건국 100주년 기념 박람회를 통해 유명세를 얻다

1876년 필라델피아에서 미국 건국 100주년 기념 박람회가 열렸다. 벨은 박람회 한 구석 부스에서 전화기를 선보였다. 6월 25일 저녁 무렵 그의 부스에 박람회 심사위원 가운데 한 사람인 브라질 황제 페드루 2세가 찾아왔다. 페드루 2세가 각별한 관심을 표하자 다른 심사위원들도 벨의 전화기를 시험해보았다. 벨은 부스에서 멀리 떨어져 송화기에 대고 셰익스피어 희곡의 인상적인 대사를 말했고,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특히 심사위원 가운데 영향력이 컸던 영국 과학자 윌리엄 톰슨 경은 “미국에서 봤던 것들 가운데 가장 놀라운 물건”이라 평했다. 당시 벨이 <햄릿>의 유명한 대사 ‘사느냐 죽느냐’를 말하자 그것을 들은 페드루 2세가 “이 물건이 말을 하네!”라며 크게 놀랐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그래서 페드루 2세가 브라질 사람으로는 최초로 전화 통화를 했다는 말도 있다. 영향력 있는 심사위원들의 찬사와 함께 벨과 그의 전화기는 시쳇말로 ‘떴다.’ 그 해 11월 벨은 1백 주년 상을 수상했다.

박람회에서 거둔 성공은 우연이었을까? 벨은 박람회가 열리기 전인 6월 14일 보스턴 농아학교에서 페드루 2세와 만났고, 페드루 2세는 그곳의 교육 방식에 깊은 감명을 받은 일이 있었다. 그로부터 일주일 뒤에는 톰슨을 만나 대화를 나눈 일도 있다. 벨은 처음 만난 톰슨에 대해 이렇게 회고했다. “마음씨 좋고 영민하고 친절한 사람. 그가 나에게 인사를 건넸을 때, 넉넉한 스코틀랜드 억양이 들려왔다.” 톰슨은 벨과 마찬가지로 스코틀랜드 출신이었던 것. 더구나 벨은 박람회 참석을 주저했지만, 이듬해 장인이 되는(메이벌 허바드와 1877년 7월 11일 결혼) 투자자 가디너 허바드가 6월 25일에 유력 심사위원이 전기(電氣) 전시물 코너를 돌아볼 예정이라는 정보를 전해주며 강하게 권고하자 참석을 결심했다. 허바드는 당시 매사추세츠 지역 참가자들의 전시물 선정위원이었으니, 박람회에서 거둔 성공이 ‘작전’에 의한 것이라 폄하할 여지가 없지는 않아 보이지만, 여하튼 벨은 날개를 단 셈이었다.

'기술적으로 단점이 많은 장난감'이 통신의 혁명을 이루다

메사추세츠의 교회에서 열린 전화기 순회 설명회에 좌석을 매운 청중들(1877

1876년 8월 3일 밤, 벨의 집에서 벨의 가족과 손님들이 6킬로미터 떨어진 브랜트포드에서 사람들이 책을 낭독하고 노래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전화기가 먼 거리에서도 소용이 닿는다는 걸 분명하게 해준 통화였다. 그러나 벨과 허바드, 토머스 샌더스는 웨스턴유니언 사에 전화기 특허권을 10만 달러에 팔겠다는 제의를 했다. 당시만 해도 벨과 그 동업자들이 전화기의 투자 대비 전망을 확신하지 못했던 걸까. 계속된 투자 탓에 형편이 어렵기도 했다.그러나 웨스턴유니언 대표 윌리엄 오튼은 전화기가 통신 수단이 되기에는 기술적으로 단점이 너무 많고 결국 장난감 이상이 못 된다고 판단했다(오튼의 당시 결정은 <포츈>지가 선정한 미국 기업과 경제 역사의 분수령이 된 ‘20대 기업 의사결정’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그로부터 2년 뒤 오튼은 그 특허권을 2천5백만 달러에 사들이더라도 싸게 사는 셈이라 말했으니, 차 떠난 뒤 손 흔드는 꼴이었다.

1877년 벨은 가디너 허바드, 샌더스 등과 함께 벨 전화회사(Bell Telephone Company. 오늘날 AT&T의 전신)를 설립했다. 이후 10년 만에 미국에서 15만 명이 전화기를 갖게 되었다. 벨과 왓슨은 전화기 대중화를 위해 순회 설명회를 열었다. 그것은 쇼와 비슷했다. 멀리 떨어져 있는 왓슨이 전화기를 통해 인사하고 노래를 부르면, 청중은 크게 놀라고 신기해했다. 소문이 퍼지면서 사람들은 설명회 입장권을 구하려 난리였다. 1877년 4월에는 보스턴에 있는 벨의 작업장과 서머빌 근처 찰스 윌리엄스의 집 사이에 최초의 전화선이 개설됐고, 같은 해 여름에는 당시의 ‘얼리어답터’ 2백여 명(대부분 사업상의 필요에 의해 신청한 사업가들)을 위해 보스턴에 최초의 교환대가 설치됐다. 교환 서비스가 시작되었다고는 하지만 정해진 영업시간에만 통화할 수 있었고, 전화기도 판매가 아닌 임대였다. 사업가, 의사, 약사들이 주요 얼리어답터들이었고, 그들은 전화기를 활용하면 업무를 좀 더 효율적으로 처리할 수 있다는 걸 빠르게 깨달아갔다. 1879년에는 벨 전화회사가 토머스 에디슨의 탄소 마이크로폰 특허권을 웨스턴유니언으로부터 사들여 전화기를 개량함으로써, 통화 거리도 더 늘어났고 더 이상 송화기에 대고 큰 소리를 지를 필요가 없게 되었다.

땅 속에 전화선을 설치, 최초의 대륙횡단 통화 성공

뉴욕에서 시카고로 시범 통화 중인 벨(1892년)

벨은 이후 수 백 건의 특허 소송에 휘말렸지만, 소송 와중에도 1888년 땅속에 전화선을 설치했고 1889년에는 최초의 동전 전화기도 설치했다. 1893년 벨의 전화기 특허권이 만료되어 다른 업체들도 전화기를 팔기 시작했지만, 선도 주자로서의 벨 전화회사의 입지는 탄탄했다. 1914년 6월 14일 뉴욕과 샌프란시스코를 잇는 대륙 횡단 전화선의 마지막 전봇대가 네바다 주와 유타 주 경계선에 설치되었고, 이듬해 1915년 1월 25일 최초의 대륙횡단 통화가 이루어졌다. 이 날 뉴욕 데이스트리트에서 열린 개통 축하식에서 벨은 샌프란시스코 그랜트가에 있는 왓슨에게 전화를 걸어 통화했다.

이 날의 소식을 전한 <뉴욕타임스> 기사의 한 구절은 이러했다. “그들은 38년 전 통화 때보다 훨씬 더 분명한 서로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로부터 7년 뒤 1922년 8월 2일에 75세의 벨은 당뇨병 악화로 세상을 떠났다. 벨이 숨을 거두기 직전 아내는 벨에게 “나를 떠나지 마세요”라 속삭였고, 기력이 다한 벨은 말 대신 수화(手話)로 ‘떠나지 않겠다’는 의사표시를 했으나,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이틀 뒤 8월 4일 오후 6시 25분, 당시 가동 중이던 미국과 캐나다의 모든 전화가 1분 동안 불통되었다. 벨을 추모하는 뜻에서 미국과 캐나다 전역의 전화 시스템 가동을 중단시켰던 것이다.

미국 발명처가 무치에게 특허 신청비 10달러만 있었어도 전화 발명가는 달라졌다?

‘진정한’ 전화기 발명가가 누구인지를 놓고서는 의견이 제법 분분하다. 예컨대 이탈리아 출신 미국 발명가(1850년 이민) 안토니오 무치(1808-1889)가 진정한 전화기 발명가라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한다(벨은 1882년 미국인으로 귀화). 2002년 6월에 통과된 미 하원의원 비토 포셀라의 하원결의안에는 ‘19세기 이탈리아계 미국인 발명가 안토니오 무치의 삶과 성취, 그리고 전화기 발명에서의 그의 업적을 미 하원이 기리는 뜻을 표명하는’ 내용을 담았다. 이 결의안에는 ‘무치가 1874년 이후 특허권 신청비용 10달러만 조달할 수 있었다면, 벨에게 특허권이 부여되지 못했을 것’이라는 언급도 나온다(물론 무치의 발명의 기술적 완성도와 발전 가능성을 놓고서는 논란이 많다).

전화기 음성 연구에 몰두 중인 젊은 시절의 벨

발명의 역사만큼 승자와 패자의 명암이 극명하게 어떤 의미에서는 잔인하게 엇갈리는 분야도 드물다. 오직 한 사람만의 힘으로 이뤄지는 유일무이의 독창적 발명이란 게 과연 가능할까? ‘발명’과 ‘개량’의 경계는 어디일까? 어쩌면 승자가 될 수도 있었을 수많은 패자들과 단 한 사람의 승자. 승자에게 쏟아지는 영광과 찬사는 시대를 뛰어넘고, 패자가 빠지는 망각의 수렁은 세월이 갈수록 깊어진다. 아바의 노래 제목대로다. The winner takes it all. 그런 승자 벨을 위한 결과론적 변명(?)을 덧붙이자면, 그는(정확히 말하면 그의 투자자들과 함께) 전화기를 바탕으로 새로운 통신 산업의 시대를 열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요컨대 그를 전화기라는 하나의 기술 제품 발명가에서 더 나아가, 전화 통신 시스템(기술적, 산업적 측면에서 공히)의 시대를 연 인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필자가 추천하는 덧붙여 읽으면 좋은 책

<지상 최대의 과학 사기극> 부제목을 보면 이 책의 내용을 짐작할 수 있다.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의 모략과 음모로 가득 찬 범죄 노트’ 그레이의 핵심 아이디어를 도용하고 그것을 은폐하려 했다는 주장이다. 소년소녀 위인전기류의 책을 통해 벨을 ‘전화기를 발명한 위대한 발명가’로만 알고 있었던 독자라면 충격을 받을 수도 있겠다.

<더 멀리 더 가까이, 통신> 구텐베르크, 모스, 벨, 에디슨, 마르코니, 암스트롱(‘라디오의 아버지’), 필로 판스워스 등 통신 또는 커뮤니케이션 기술 발전에서 큰 획을 그은 인물들과 만날 수 있다. 청소년 도서로 분류되는데, 그만큼 이해하기 쉬운 서술이다. 단, 한 권에서 여러 인물을 다루는 만큼 자세한 전기정보를 기대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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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EBS 어린이 지식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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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발행일 : 2009. 02. 14.

출처

제공처 정보

  • 표정훈 평론가, 번역가

    표정훈은 1969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서강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번역가, 저술가, 칼럼니스트로 활동해 왔다. 삼성경제연구소 SERI CEO 강좌, 한국예술종합학교 등에서 강의했고 한국문학번역원의 계간 리스트(List) 편집자문위원, 월간 출판저널 편집자문위원, (재)김구재단 기획위원 등을 역임했다. 저서로 <탐서주의자의 책>, <나의 천년>, <하룻밤에 읽는 삼국지>, <책은 나름의 운명을 지닌다>, <철학이란 무엇입니까?(공저)> 등이 있다.

  • 이미지 gettyimages/멀티비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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