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니북] "초고만 원고지 만 장, 그의 삶이 우리 역사였다"

조회수 2016. 2. 20. 13:12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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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전기문학의 개척자 이충렬이 기록한 김수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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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년 전이었다. 대학교 3학년 때 부모님의 사업 실패로 고국을 뒤로 했다. 남미를 거쳐 미국까지 흘러들었다. 이미 학교 공부는 뒤로 했고, 내내 생업에 매달려 살았다. 하지만 국문과 중퇴 문학청년의 기질이 어디 갈까. 틈틈이 글을 쓰고 1994년 '실천문학'에 단편소설도 발표했다.

멕시코 국경이 내다보이는 애리조나주의 주도 피닉스. 이곳에서 잡화가게를 하면서 그림도 모으고 미술에 관한 글도 썼다. 인터넷에서 시작한 블로그가 국내 출판사 편집자 눈에 들었고 책까지 냈다.

그 무렵 그가 눈을 돌린 곳은 인물 이야기, 전기였다. 첫 책은 2010년에 낸 간송 전형필. 뜻밖에도 반응이 좋았다. 힘을 얻어 '혜곡 최순우: 한국미의 순례자'를 냈다. 이번에도 호평이 이어졌다.

하지만 이듬해에 나온 '김환기,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에 이르러서는 예기치 않은 분쟁이 돌발했다. 유족과 미술관측과의 마찰은 책의 절판으로 일단락됐다. 상심했지만 좌절하지는 않았다. 더 큰 산으로 눈을 돌렸다. 고(故) 김수환 추기경.

3년 노력의 결실이 마침내 책으로 묶여 나왔다. 그 사이 얼마나 많은 자료를 뒤지고 얼마나 많은 사람을 찾아가 만났던가. 모은 사진만 수백 장이다. 초고 원고만 1만장 가까이 된다. 여러 차례 빼고 줄인 게 두툼한 책 두 권이다. 그럼에도 수월하게 읽히고 파노라마 영화처럼 눈에 잡힌다. 저자가 그만큼 힘들여 낸 길을 독자는 편하게 따라 걸을 수 있다.

87년 현대사를 관통한 거목의 일대기에, 민족이 함께 겪은 식민주의, 전쟁, 군사정권의 흥망, 민주화, 보혁 갈등의 아픔이 나이테처럼 아로새겨져 있다. 인간의 길과 신의 길을 동시에 걸어갔던 그의 고뇌와 사색이 진액처럼 스며 있는 책이다.

이제 그의 몫은 끝이 났다. 큰 숙제를 마친 것처럼 홀가분하다고 했다. 집필이 끝나갈 무렵과 탈고한 후, 모두 세 차례에 걸쳐 그를 만나 그간의 여정을 들었다. 그것 자체가 한 편의 드라마를 듣는 듯했다.

김수환 추기경 전기 화보 기사 바로가기


-전형필, 최순우, 김환기에 이번에 김수환 추기경 전기를 내셨습니다. 어떻게 이번엔 추기경을 쓰시게 되셨지요?

2012년 초쯤입니다. 그전까지 문화계 인물만 쓰다 보니 매너리즘에 빠지겠다는 걱정도 있었어요. 그래서 사회적인 인물을 생각하게 됐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지금 우리 사회에 어른이 드물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사회가 복잡해지고 어려워질수록 중심을 잡아주는 푯대 같은 분이 필요한데 이 시대에 부족한 것 아닌가 싶습니다. 그 이유 중 하나가 그런 어른에 대한 정리 작업이 부족해서가 아닌가 싶었어요.

그렇다면 우리 현대사에서 어른이라 할 만한 분이 누가 있었나 생각했어요. 지금 관점에서 좌우에 치우치지 않는. 그러면서 시대에 필요로 했던 목소리를 낸 분. 여러분을 찾아봤어요. 김수환 추기경이 떠오르더군요. 70년대부터 90년대까지 우리 현대사를 온몸으로 헤쳐나간 분. 아직도 많은 분들이 존경하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 그런데 그분의 무엇을 존경하는가 하고 물었을 때는, 저도 그렇고 대부분 민주화를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김수환 추기경이 기억에 남아 있는 이유는 단순한 민주화의 공헌 때문만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이면에 그분의 가치체계가 있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부분이 정리가 잘 안 된 것 같았어요. 그걸 잘 끄집어내면 이 시대에 의미 있는 목소리가 되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과거가 아닌 동시대에도 울림이 있는 목소리로 복원하는 것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에서 도전하게 됐습니다.
-가톨릭과는 어떤 연고가 있습니까?

제가 미국에서 40년을 살았습니다. 서울에 살 때 1968년에 가톨릭 계통의 동성중고등학교를 나왔어요. 중 2때 학교에서 영세(세례)를 받았습니다. 가톨릭 신자이긴 하지만 70년대에 한국을 떠난 후 국내 가톨릭과는 접촉이 없었어요.

그래서 책을 쓰기로 한 뒤에 든 생각이, 추기경님의 자료나 책은 어떻게든 구할 수 있겠지만 저작권은 따로 어딘가에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또 어떤 전기든지 집필할 경우에는 사진 자료가 가장 중요하다고 저는 봤어요. 집필 과정에서 감정이입을 위해서라도 그 시대를 담은 자료가 있는 게 좋지요. 나중에 독자들의 감정이입을 위해서도 마찬가지고요. 그래서 그분 사진은 어디서 구할 수 있을까, 생각하다 보니 천주계 쪽을 접촉하게 됐어요.

아시다시피 천주교는 교황청도 그렇고 조직 위계가 강하잖아요. 접촉 창구가 어딘지부터 찾아야 했어요. 먼저 동성학교 교장으로 계신 박일 신부님을 찾아갔어요. 그분이 학교로는 저의 후배인데 동문이고 해서 물어보기가 쉬울 것 같아서였어요. 그분이 신부님 한 분을 소개해주더군요.

연세가 많은 분인데 찾아갔더니, 추기경이 생전에 설립한 유일한 장학재단인 옹기장학회를 일러주셨어요. "그게 뭡니까?" 했더니, 추기경님의 세례명은 스테파노인데, 마음 속에 담고 있었던 아호가 '옹기'였다는 거예요. 몇 사람만 알고 있었대요.

왜 그런가 물었더니, 옛날 천주교도들이 박해를 피해서 옹기 장수로 연명했다는 거예요. 산으로 피신해 교우촌을 형성해서 옹기를 구워 내다팔면서 바깥 상황이 어떤지 소식도 듣고, 식량도 구하면서 생활했다는 거죠. 그래서 우리나라 옹기장의 선조는 상당수가 '김 마태' '김 베드로' 같은 천주교인들이에요. 이런 내용이 뿌리깊은나무에서 낸 민중 자서전에 나옵니다.

그래서 옹기장학회를 수소문했더니, 천주교 서울대교구 산하 단체이더군요. 이사장은 염수정 추기경이구요. 박신언 몬시뇰 신부를 찾아갔어요. 그분이 당시에 성모병원 가톨릭 학원들 총괄하는 분이였어요. 제가 그전에 쓴 책을 들고 가서 설명을 했어요. 그동안 이런 작업들을 했는데 단순 영리 목적이 아니다. 지금도 인세의 절반은 해당 기념관이나 단체에 기부한다. 김 추기경 자서전도 장학사업의 하나로 품어서 작업을 했으면 좋겠다고 말씀드렸더니 (내가 쓴) 책을 놓고 가라고 하더군요.

한 달 반 후에 연락이 왔어요. 서울대교구의 홍보국장인 허영엽 신부를 만나래요. 가서 같은 설명을 했어요. 또 책을 놓고 가라고 해요.

두 달 후 연락이 왔어요. 무슨 협조가 필요한가, 묻더군요. 다른 자료는 내가 구해도 되지만 사진 자료가 제일 필요하다고 했어요. 교구측 말이 사진이 제일 많은 곳은 절두산 순교성지박물관이라고 했어요. 나머지는 각 언론사나 서울대교구관, 한국교회사 연구소에 좀 있다더군요.

그때부터 사진을 찾아다니기 시작했어요. 절두산 찾아갔더니 개인 앨범이 40권쯤 되는데 열람하고 복사하려면 서울대교구 공문이 있어야 한다더군요. 평화신문도 마찬가지였어요. 제일 자료가 많은 곳이 가톨릭신문인데 대구 대교구 소속이에요. 김 추기경이 처음에 대구 대교구 사제였거든요. 1967년 서울로 올라오기 전까지는.

대구 대교구로 가서 홍보실장 신부님을 만났더니 네 권짜리 대구 대교구 100년사가 그즈음 출간된 게 있었어요. 거기에 필요한 사진이 상당 부분 데이터베이스로 돼 있었어요. 비매품인데 사용을 허락 받았어요. 가톨릭신문사에서도 이만 한 상자를 주면서 초기 사진은 스캔이 안 돼 있는데 여기서 골라 보라고 했어요. 그런 식으로 사진 구하는 작업과 함께 집필 준비에 들어갔지요.

구체적으로 어떤 사진이 필요한지는 진행을 해가면서 찾아 나갔어요. 그렇게 1년 반쯤 지나니까 무슨 사진이 필요한지 감이 잡히기 시작하더군요. 사진을 확보한 다음에는 참고 자료도 찾기 시작했어요. 기본적으로 대한민국의 모든 새책은 물론 헌책방까지 김 추기경 관련서는 다 뒤져서 구입했어요. 논문도 검색하고요.
-그런 작업을 하는 동안에는 한국에 계셨나요?

세상이 좋아져서 국회 도서관이나 국립 중앙도서관은 자료 검색을 하면 복사 서비스 업체가 있어서 페이지당 얼마씩 PDF 파일로 보내줘요. 그걸 미국에서도 보고, 참고 도서는 출판사에서 박스로 모아서 항공우편으로 보내주곤 했어요.

제일 필요한 게 1930년대부터 나온 가톨릭신문이었어요. 문제는 절판이 되고, 오래 전에 50년어치 영인본 만들었는데 구할 방법이 없었어요. 대구에 대구대교구사를 연구한 분이 있다고 해서 수소문 끝에 마침 한 질을 갖고 있다고 해서 그걸 출판사로 보내와 전달받았아요. 그걸 저본으로 해서 한 장씩 넘겨가며 관련 자료들을 찾아 나갔어요.
-한 사람의 일대기를 복원한다는 게 힘든 일일 것 같습니다. 그래서 국내에 잘된 전기 작품이 드물기도 하겠지요. 이번에 집필 과정을 좀 상세히 들려주시겠습니까?

맨 처음에는 기본 연보부터 작성했어요. 연도, 월, 일, 나중에 시간까지 나오는 연보를 만들었습니다. 다섯 살 때까지 기록은 두 살 위 친형인 김동한 신부님이 해둔 게 있어요.

또 연보를 작성해 가면서 그때그때 친구나 주변 사람들 중에 누가 기록을 남겼을지 가능성도 추적했어요. 형님 기록과 김 추기경 자신의 기록 외에도 주변 기록도 아주 중요하니까요. 열 살 때부터 신학교에 같이 다닌 중고등학교 동창들 중에 딱 한 분이 살아계신데 그분도 찾아갔아요.

12살 때부터 신학교를 다녔으니 학교 자료 남은 게 있는지도 뒤지고. 70년대까지는 지학순 주교와 연결되는 부분이 있는데, 그분 책 세 권 중에서 구술 회고록이 한 권 있어요. 그런 것도 보면서 70년대 상황을 담고. 김 추기경 자신의 기억과 비교도 해보고. 그런 식으로 자료를 계속 쌓아갔죠.

작성하고 나니 처음에는 원고지가 총 8500매가 넘었어요. 비교적 오래 사신 편이고 하신 일도 워낙 많아선지. 초고를 집필하는 데만 6개월이 걸렸어요.

그때부터 취사 선택과 스토리텔링을 어떻게 끌어갈 건가 고민을 하기 시작했죠. '언제 어디서 태어났다'는 것부터 쓸 수는 없으니까요. 그래서 맨 처음에는 몇 가지 상황을 설정해봤어요. 기록을 보니까 나이가 든 후에 생가터를 가신 적이 있어요. 그러면 거기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볼까? 아니면 신학교 입학부터? 아니면 군위의 초가집이 복원돼 있으니 거기서 뒷짐 지고 회상하는 것부터 전개해볼까? 여러 구상을 해봤죠. 썼다가 버리기를 반복했어요.

몇 달을 주무르다 보니 어렴풋이 감이 생기더군요. 아, 사제의 삶은 떠남의 삶이구나. 가족을 떠나야 했고 교구도 5년을 안 있고 떠난다. 가방만 하나 들고서, 늘 어디론가 떠난다. 그리고 나중에는 하늘나라로 떠나잖아요. 결국 떠남의 삶이 한 부분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실제로 김 추기경의 경우 가족과의 떠남이 굉장히 무겁게 받아들여졌어요. 사제의 길을 걷기 시작한 후에 내내 가족과 굉장한 거리를 두셨거든요. 그렇다면 떠남에서 시작해보면 되겠다 싶었어요.

맨 처음 집을 떠난 게 예비신학교(초등학교 5-6학년) 입학할 때였어요. 1932년, 만 열 살에 검은 두루마기를 입고 입학식에 갔어요. 검정색 옷을 입는 것은 '세상의 나는 죽는다'는 뜻이거든요. 그때부터 가족을 떠나 기숙사 생활을 했어요. 이 부분이 상징적이겠다 싶어서 여기서 이야기를 시작했어요.
-대작업이었겠군요. 모두 얼마나 걸렸지요?

보통 전기를 쓸 때 전업으로 몰두할 때는 한 권짜리 경우 2년 정도 걸려요. 간송 전형필 전기 경우에는 7-8년 걸렸어요. 그때는 전업이 아니라 낮에는 장사를 하면서 토막 시간을 활용해서 써야 했으니까. 그 다음 혜곡 최순우는 2년, 김환기도 2년.

이번에는 3년 반 정도 걸렸어요. 지금은 제가 전업작가로 일하니까 저녁 7시까지 글을 붙잡고 있을 수 있어서 그보다 단축이 되지요. 집필 중에도 계속 자료를 탐색해요. 못 찾은 것은 없는지. 필요하면 또 주문하고. 단 한 줄짜리 사실 관계를 확인하기 위해 자료를 주문한 경우도 많습니다.
-예를 든다면요?

가령 어느 신부가 전태일 열사가 분신했을 때에 대해 기록한 걸 보니까, 평화시장 뒤 을지로 4가 국립의원에서 성모병원으로 옮긴 것이 김 추기경의 배려 덕분이었다고 썼어요. 그 부분의 사실 관계를 확인하기 위해 전태일 평전 개정판까지 찾아봤더니, 그게 아니었어요.

추기경 이야기는 없고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가 큰 병원에 보이고 싶다는 바람에서 이송한 것이었어요. 아마 그 신부 기록 하나면 보고 썼다면 저도 틀렸겠지요. 그래서 가능하면 김 추기경 이외 다른 사람이 기록한 사실 관계에 대해서는 복수의 자료로 교차 확인을 거쳤어요. 그런 식으로 확인이 되지 않아서 본문에서 뺀 것도 많아요.
-어떤 것들이 빠졌지요?

김 추기경과 시인 김지하가 굉장히 친하게 지냈고 서로 영향을 많이 주고받은 걸로 나와요. 김지하 시인이 원주 교구 직원으로 월급도 받았고, 마산에서 결핵 치료할 때도 추기경을 만났고, 두 사람이 김민기, 양희은 공연까지 같이 봤을 정도였어요. 김지하는 세례 후에 견진성사까지 받았지요.

하지만 이번에 대부분 빠졌어요. 왜냐하면 김지하 시인이 2년 전에 모 일간지에 연재한 '김지하와 그의 시대'를 보면 김 추기경의 기록과 서로 배치되는 게 굉장히 많아요. 그런 경우에는 포함을 시킬 수가 없었어요. 누구 말이 맞는지 알 수 없으니까.

가령 마산에 있을 적에 김 추기경이 찾아간 적이 있는데 김 시인 말로는 자신이 공연을 보러 오시라고 해서 왔다고 했지만, 김 추기경 기록에 의하면 부산에 천주교 행사가 있어서 갔다가 김지하를 위로하기 위해 마산으로 갔다고 나와요.

또 김 시인은 두 사람이 만난 날 밤에 김 시인은 주로 시국에 대해 김추기경과 이야기했다고 나오는데, 김 추기경은 김지하가 창원 가톨릭 활성화를 위한 이야기를 했고, 그걸 통해 그 지역 노동자에게 가톨릭을 어떻게 전교할지 생각의 계기가 됐다고 나와요.

김 추기경은 가톨릭적 관점에서 봤고, 김 시인은 김 추기경이 가톨릭에 갖혀 있다고 봤어요. 여러 부분에서 서로 기록이 다르게 나오니까 싣기 어려웠던 거죠.
-이번에 처음 공개되는 일화도 있나요?

아예 처음 공개되는 것도 있고, 처음은 아니지만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지지는 않은 내용도 있습니다. 가령, 추기경이 서른네 살에 왜 갑자기 독일로 유학을 가서 국내에서는 생소한 그리스도교 사회학을 공부하게 됐는가 하는 것은 미처 몰랐던 거지요.

책을 쓰기 시작할 때 제가 풀어야 할 큰 숙제 세 개가 있었습니다. 하나가 당시 인터넷에서 떠돌던 김 추기경의 일본군 장교 입대설이었어요. 강제로 끌려갔다는 설과 자원 입대 설이 대립했어요. 제일 먼저 그걸 조사했습니다. 만일 자진해서 장교로 입대했으면 전기를 안 쓸 생각까지 했습니다.

맨 처음 동창들 자료를 조사했어요. 같이 차출된 동창이 모두 5명 정도였어요. 그분들 전부가 1943년 12월에 조선총독부가 내린 학도병 미입대자 징집령에 의해 강제입대됐다는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단체로 1월 20일 배를 타고 일본 훈련소로 이동했어요. 그때 일본에 있던 전문대 이상 학생들도 다 강제징집당했습니다.

이들에게는 일본에서 사관후보생 훈련을 시켰어요. 추기경은 일본 중부 마쓰모토 훈련소에서 훈련을 받고, 도쿄에서 200킬로미터 떨어진 남단(괌과 도쿄 사이) 지치지마 섬에 배치받아 근무했습니다. 작가 한운사도 그때 일본 유학 중이었는데 사관후보생으로 끌려갔어요.

당신 기록을 보면 추기경은 부도라는 섬에서 전투병이 아닌 경비병으로 근무했습니다. 훈련소 생활을 2월에 시작해서 12월에 끝나는데, 끝나기 며칠 전 사상검열에 통과가 안 돼서 일등병으로 지치치마섬으로 끌려갔다고 나옵니다.

그런데 예전에 민족문제연구소가 김 추기경의 전력을 문제 삼을 때, 지치지마섬에 장교 훈련소가 있었다고 썼어요. 추기경이 장교로 복무했다고까지는 안 했지만 거기서 훈련을 받았으니 장교가 된 것 아니냐 하는 뉘앙스였고, 그게 인터넷에서 확대재생산됐어요.

저는 미국이 상륙했을 때 그 섬의 상황을 파악한 문서를 찾아보면 되겠다 싶었어요. 마침 지치지마 섬에 상륙했던 미 해군 사령관이 남긴 비망록을 갖고 쓴 책이 있더군요. 거기에 김 추기경 이야기도 나와요. 나중에 미군이 점령 후 상황을 전하면서 '킴'에 대해 '법적으로 아직 사병(technically still soldier)'라고 표현해요. 결국 장교가 아니라 일반 사병이었다는 거죠.

또 김 추기경이 거기서 했던 일이 미군 유해 발굴 작업이었어요. 나중에 일본군이 전범재판에 회부됐을 때 증인 중 한 명으로 법정에 섰죠. 괌에서 전범재판 때문에 8개월 있었어요.
다음 의문은 추기경이 왜 독일까지 가서, 그것도 생소한 그리스도교 사회학을 공부했느냐는 점이에요. 추기경은 한 마디로 정리했습니다. 일본 조치대학(소피아대)에서 공부할 때 스승이었던 게페르트 신부(서강대 설립자)가 추기경한테 어디로 가느냐고 묻길레, 가톨릭 운동(action)을 배우러 벨기에로 간다고 하니, 게페르트 신부가 독일 뮌스터 대학의 회프너 교수한테 가서 그리스도교 사회학을 배우라고 추천했다는 거예요.

추기경이 사제가 된 1951년부터 1957년 유학 갈 때까지 가톨릭신문(천주교회보) 축쇄본을 보니 5회에 걸친 연재물이 있었어요. '가톨릭 운동을 위하여'라는 제목의 글인데, 추기경이 대구교구 주교 비서 시절에 썼어요. 그걸 보면 추기경이 '가톨릭 운동'에 대해 상당히 깊이 알고 있음을 알 수 있어요.

그렇다면 왜 이런 생각을 하게 됐을까. 다시 천주교회보를 찾아봤더니 그보다 얼마 전에 교황청에서 내는 피데스통신이 있는데, 거기 대구교구 통신원으로 추기경이 임명됐던 거예요. 그러니까 피데스통신을 통해 유럽 가톨릭 운동 움직임을 알았던 거지요. 가톨릭신문 기사에도 나와요. 우리나라에도 가톨릭운동을 제대로 전개하려면 유럽에 사람을 보내 공부 시키는 게 좋겠다는 게 결론이었어요. 2년 후에 자신이 가게 된 거지요. 그래서 의문이 풀렸습니다. 
다음으로는, 왜 교황청에서 가장 늦게 만든 가장 작은 교구인 마산교구 주교를 그것도 2년 만에 서울대교구장에 임명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세계 최연소 추기경으로 임명한 경위입니다. 교황청은 그 부분에 대한 기록만큼은 공개를 안 해서 아무도 모릅니다. 추측만 할 뿐이죠. 교계 사람들도 궁금해 해요.

그래서 다시 천주교회보(가톨릭시보로 다시 변경) 몇 년치 기록을 다 찾아봤어요. 그랬더니, 추기경이 마산교구장 주교가 되고 몇 달 후 한국주교회의가 있었어요. 거기에서 공동 부의장으로 선출이 됐어요. 당시 의장이던 윤공희 서울대교구장 서리 주교가 바빠서 교황청 회의를 못 가면 대리대표로 김수환 주교가 간다는 기사가 있었어요.

실제로 그해, 1966년 9월 교황청에서 제1차 세계주교대의원회의를 열었어요. 그게 바티칸 공의회를 열고 난 후에 결의된 문헌을 세계 교회가 얼마나 잘 실천하고 있는지 점검하고 현안을 토의하기 위해 교황이 소집한 회의였어요.

바로 그 자리에서 김 추기경이 두 차례에 걸쳐 회의의 흐름을 바꾸는 발언을 했어요. 두 문제 중 하나는 당시 점점 가톨릭 신앙이 느슨해지면서 신도가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과 결혼하는 것을 인정할 거냐 말 거냐는 거였어요. 그 부분만큼은 유럽에서 보수적인 입장을 고수해야 한다는 주장이 강했어요. 한데 김 추기경이 10분 제한 시간내 발언 시간에 세 가지 근거를 인용해서 반박했어요.

첫째가 성서를 인용했어요. 사도 바오로도 폭넓게 인정해야 한다고 했다, 마누라가 이교도면 버려야 하느냐고 했다고 했어요. 두 번째,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에 따르면 일치하라고 했지 분리하라고는 안 했다, 그 정신에 안 맞는다고 했어요. 세 번째는, 당시 세계 가톨릭 신도가 전체 인구의 3%도 안 됐는데 그 안에서 짝을 찾으라고 하면 비현실적이다, 교인 수가 더 줄어든다고 했어요.

한국의 경우 공자의 상제론을 인용하면서, 유교 전통이 있어서 보통 사람도 하늘에 황제가 있다고 믿으니 그걸 하느님으로 변형하니까 천주교인으로 포교하기 쉽다고 설명을 했어요. 그것처럼 다른 종교와도 결혼을 허용해야 한다고 했어요. 그렇게 8분 만에 일목요연하게 발언을 끝냈어요.

그랬더니 그때부터 제 3세계 주교들이 우후죽순처럼 일어나 폭넓게 인정하자고 발언을 했어요. 보수적 흐름을 진보적으로 바꾸는 단초가 되는 발언을 추기경이 한 거지요.

그 다음 회의 때는 신학교 문제가 있었어요. 당시 제 3세계 신학교는 대부분 유럽에서 지원했는데, 경제가 힘들어지니까 제 3세계 신학교들을 독립시키자는 것이 안건이었어요. 이때도 김 추기경이 발언권을 얻어서, 한국의 경우 연 소득이 80몇 달러밖에 안 된다면서 현실론을 폈어요. 그러자 다시 제 3세계 대표들의 발언이 잇따랐어요. 그때 회의 문서를 정리할 3인 중 한 명으로 임명이 됐어요. 

그런 일련의 일들이 있을 때 교황청에 각인이 된 거지요. 추기경이 귀국해서 가톨릭시보 사장을 하면서 바티칸공회 결과도 번역해서 실었어요. 말하자면 제2차 바티칸공회 전도사였던 거지요. 교회 담장을 허물고 사회 속으로 들어가자는 거였어요. 바로 그 다음에 서울대교구장에 임명이 됐어요. 그때 취임 일성이 '사회 속 교회'였어요. 그 다음에 세계 최연소 추기경에 임명이 됐어요.

김 추기경의 당시 비서 신부 장익 신부(장면 박사 아들)가 춘천교구장을 하다가 은퇴했는데 그분이 그렇게 해석을 하더군요. 제2차 바티칸공회 정신을 추기경이 가장 잘 이해해서 전파한 공헌을 기여로 해석한 거지요.
맨 마지막에 힘들어 하신 시기는 보혁 갈등 때였어요. 추기경은 무엇보다 사람을 미워하지 않았어요. 노무현 대통령과도 생각은 달랐지만 그래도 대통령이 잘 돼야 나라가 잘 된다면서 대통령을 위한 기도를 공개도 했어요. 편가르는 부분을 싫어 했어요.

국가보안법에 대해서도 북한과 대치하고 있는 분단 상황에서는 완전 폐지는 위험하다는 생각이 확고했어요. 폐지보다 독소 조항 개정으로 가야 한다는 입장이었지요. 이 부분에 대해 천주교 내외에서 비판이 생겨나고 좋지 않게 보는 지식인도 있었지만, 생각이 다른 것은 할 수 없다고 하셨어요. 오히려 비판으로 나를 돌아보는 계기가 되니 고맙게 생각한다는 말도 했어요.

그 무렵에 보혁 갈등 가운데에서 마음 고생을 굉장히 많이 하셨어요. 이걸 어떻게 압축적으로 쓸 수 있을 것인가가 숙제였어요. 그 당시 중요 팩트들 중심으로 정리할 수밖에 없었어요. 결국 판단은 독자들 몫이니까요.
-이번 책이 서울대교구 인가를 받은 공식 전기라고 하셨는데 어떤 의미이지요?

보통 교계 출판사에서 책을 낼 경우에는 교회의 인가를 받는 절차를 밟습니다. 내용에 교리적으로 틀린 부분이 있는지 검토하는 거지요. 이번 책의 경우는 일반 출판사에서 내는 것이었지만, 제가 교회 인가를 신청했어요.

그 이유는 공신력을 얻으려는 목적이 컸어요. 가톨릭 교회가 봤을 때에도 내용에 오류가 없다는 것을 확인받고 싶었어요. 둘째, 한 번 가톨릭 교회의 인가를 받으면 전 세계적으로 통용이 됩니다. 앞으로 이 책이 해외에 번역될 경우 제 3국에서 다시 교회 인가를 받지 않아도 됩니다. 그래서 제가 자원을 했습니다. 서울대교구에서 교회 인가를 해줬습니다.
-책에 대한 교회측 반응은 어땠나요?

그때 회신받은 내용은, 신앙적인 측면에 대한 조명은 약하다, 그러나 가톨릭이나 교회에 해가 되는 내용이 없으므로 인가한다는 것이었어요. 신앙적인 측면이 약하다는 것은 모두에도 말씀드렸지만 집필할 때 일반 독자도 염두에 두고 추기경의 인간적인 면과 사회 역할까지 두루 포함시킨 결과였어요. 그래서 1권은 신을 향하여, 2권은 인간을 향하여라고 했습니다.

교회 입장에서 볼 때는 전통적인 신앙서는 아니지만 좋은 내용이니까 인가를 한다는 뜻이있어요. 권고 사항으로는 본문 중에 성경 구절을 인용한 것에 대해 2005년도판으로 통일했으면 좋겠다는 요구가 있었어요. 그리고 외래어 표기법 중에서 천주교에서 고유하게 쓰는 것은 예외로 해서 교회 통용어로 써달라고 했어요. 그대로 따랐습니다.
김수환 추기경님이라는 큰 산을 담아내기 위해 많은 자료를 조사하고 많은 분들을 인터뷰해서 만든 노력의 흔적이 역력한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저조차 생각하지 못한 사진자료 또한 풍부해서 놀랐습니다. /서울대교구장 염수정 추기경의 추천사 중에서
-책을 쓰기 위해 공부도 많이 했다고 하셨는데, 뭘 얼마나 하신 거죠?

추기경의 조부가 병인박해 때 순교자였습니다. 나머지 가족은 옹기촌으로 도망가서 옹기쟁이로 살았지요. 그때 추기경이 태어났습니다. 부모가 왜 산 속으로 들어가서 옹기장이를 했는지. 그 후에도 왜 옹기장이할 수 밖에 없었는지 알려면 천주교사를 공부해야 했습니다. 그래야 추기경의 어릴 때 가난이 이해되거든요.

그 다음 추기경이 예비신학교에서 배운 것을 이해하려면 당시 천주교 교리서를 공부해야 해요. 3권짜리 주해서인 '천주교요리상해'를 봐야 했습니다. 그 다음 대학 신학교 갔을 때 추기경이 읽은 목록도 보면서 어떻게 영성을 쌓아갔는가를 살폈습니다.

어린 시절 알록달록한 효자전(1927년에 회동서관에서 나온 '6효자전')을 찾아 읽기도 했어요. 김효증이란 사람이 어떤 장사꾼 집에 일꾼으로 들어가서 주인의 이쁨을 받아 딸과 결혼한 후에 큰 부자가 돼 부모를 모시고 살았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추기경이 스물다섯 살 때에 쓴 걸 보면 장가 가야겠다는 생각을 해요. 대구에 나가서 어떤 집에 가서 장사를 배워서 내 점포를 차려 돈을 번 후에 홀어머니한테 효도를 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 생각의 바탕이 육효자전었던 거죠. 그 책 판본이 없어서, 그걸 갖고 쓴 논문을 구해서 읽어야 했습니다. 이걸 읽은 사람들 수소문해서 표지도 찾아서 책에 소개했습니다.

   

추기경이 유학을 가서는 그리스도교 사회학을 공부했습니다. 당시 지도교수가 요제프 회프너 신부였는데 그 방면의 최고 권위자였습니다. 그분 책 번역본을 읽어보기도 했습니다. 추기경이 유학하던 중에 교황청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엽니다. 전 세계 주교들이 모여서 교회 변화를 논의하는 자리였어요. 그때 나온 문헌을 그 후로도 김 추기경이 금과옥조처럼 생각했습니다. 70, 80년대 강론 때도 인용했지요. 그 책 번역본이 800쪽이나 됐는데 다 읽었습니다.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은 해설서를 읽어야 했고요.
-전기를 쓰실 때는 누구의 의뢰를 받나요? 어떻게 정하셨지요?

모두 다 저의 독자적인 판단으로 택해서 써왔습니다. 국내 전기물이 평가를 제대로 못 받는 이유가, 일종의 대리 집필이 많아서입니다. 좋은 사람을 추천받을 수는 있지만, 부탁을 받아서 쓸 경우에는 전기작가로서 생명력이 끝난다고 생각합니다.

제 나름의 기본 원칙이라면 사후 적어도 5-10년 이상 지난 사람을 택합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고 열기가 가라앉고 차분한 마음으로 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묵히고 익히고, 작가적 성찰도 따라야 합니다. 제가 염두에 두고 있는 두 분은 다 사후 10년 정도 된 분들입니다. 그보다 시간이 더 지나면 잊힐 위험이 있습니다.
-이전에 쓴 전기들과 이번 책의 차이점이라고 한다면요?

첫 책이 간송이었는데, 그때는 제가 알려지지 않은 작가라서 취재원 인터뷰에 애를 먹었습니다. 구구절절이 설명을 해야 했으니까요. 두번째 전기가 최순우였는데, 그때는 제가 욕심이 과해서, 너무 많이 설명을 하려다 보니 책 내용이 좀 어려워진 감이 있습니다. 좀 간결하게 갔어야 하는데 너무 큰 주제를 많이 담으려고 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김환기 전기를 쓸 때는 미술관측과 뜻하지 않았던 분쟁도 겪고 하면서 교훈을 얻은 게 있습니다. 일단 유족이 싫어할 부분이 있는 개인의 삶은 아예 하지 말아야겠다 싶었어요. 하더라도 처음에 합의가 된 다음에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이번에는 맨 처음부터 서울대교구에 얘기해서 인지시킨 다음에 자료 협조도 약속 받은 후에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비교적 많은 사료 사진들을 볼 수 있었고, 그 덕분에 사진 자료를 통해 제가 대상에게 감정 이입을 극대화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제 나름대로 계속 발전해 왔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제가 제일 두려워하는 게 매너리즘에 빠지는 것입니다. 독자들이 봤을 때 전작을 뛰어넘었구나, 못하지 않구나 하는 평을 듣고 싶은 게 작가로서 욕심이지요. 독자에 대한 책임감이 불안감으로 작용합니다.

그 전까지는 화가이고 유물 수집가 같은 문화인이었지만 추기경은 성직자이고 사회 지도자라는 점에서도 달랐습니다. 이분에는 성과 속의 세계가 있었습니다. 사실 처음에 가장 걱정했던 것도 그 점이었습니다. 둘 중 어느 한 편에 너무 치우치면 다른 한 면이 약해질 수밖에 없게 되거든요. 결국 일부 천주교인들에게는 아쉬운 점이 있더라도 너무 종교적인 면에 치우치지 않는다는 원칙을 세웠습니다. 그러다 보니 다른 전기 작업에 비해 일이 두 배, 세 배 늘었습니다.

추기경의 생각도 교회는 사회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사회 약자, 사회 정의, 인간 존엄을 위해 현대사를 온몸으로 헤쳐나갔던 거지요. 저도 우리 현대사를 다시 살펴봐야 했고, 그 속에서 추기경의 역할은 무엇이었는지 씨줄과 날줄로 맞추는 것이 굉장히 힘들었습니다.

이게 내 능력으로 할 수 있는 일일까 회의가 여러 차례 들 정도였습니다. 신앙인의 삶과 사회적 지도자의 삶이 별개가 아닌 하나로 묶는 작업이 아주 힘들었습니다. 하지만 그게 다 추기경의 모습이었기 때문에 놓치지 않으려고 노력했습니다. 신앙의 근거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가톨릭 정신을 공부했어야 했습니다. 신부, 신학자 분들을 많이 괴롭혔습니다.
-자료 수집이며 집필을 다 혼자 하셨습니까?

저는 시작부터 끝까지 다 제가 합니다. 보조작가도 없습니다. 비용도 문제지만 관련 인물들을 만나서 묻고 하다 보면 이야기가 새끼를 칩니다. 그러니 직접 가지 않으면 안 돼요. 그래야 이야기도 정확해지고 풍부해지거든요. 심지어 사진 설명을 붙이는 작업도 전후 사정을 아는 제가 해야 했어요. 1년에 2-3회씩 탈고하는 동안 10회 정도 국내에 들어왔어요.

사실 전기 작업의 어려움이 그런 점입니다. 자료나 취재 비용도 많이 들고 작업 시간도 빨라봐야 2-3년은 걸립니다. 그렇게 해서 책이 나와도 많이 팔리지 않거든요. 그러니 아무도 안 하려고 해요. 인정도 못 받으니 제대로 된 전기를 발보기가 어렵지요. 저는 그저 이런 책이 우리 사회에 필요하니까 남기고 싶다, 그 생각만 합니다.

초고를 쓸 때는 쓰고 싶은 것을 다 씁니다. 시시콜콜한 것까지. 이번 책의 경우 초고 완성에만 6개월 이상 걸렸는데 원고지로 만 장가까이 나왔어요. 예전의 2배 분량이에요. 출판사와 상의해서 두 권으로 줄였어요. 1만 매짜리를 4천 매로 줄였지요. 그럴 땐 꼭 자식을 쳐내는 같아요. 누가 대신 해줄 수도 없고. 외롭고 힘들다는 생각이 들지요.

그럴 때는 한 달쯤 그냥 쉬어요. 그러고 나면 버릴 게 보여요. 이번 책은 확인해야 할 역사적 사실이 많고 작가의 운신의 폭이 적다 보니 더 힘들었어요. 모든 것이 사실에 근거해야 하니까요.
-사실에 근거한다는 기준은 뭘로 봐야지요?

지금까지 전기를 3권째 쓰면서 제 나름 대로 판단의 기준이 생기더군요. 상상으로 메울 수밖에 없거나 적절히 필요할 때가 있는데, 그런 때에도 어느 선을 넘어서는 곤란하지요.
-그래선지 사진 자료에 꽤 많은 공을 들이셨더군요.

사진을 구한 것은 거의 1천 장쯤 되는데 책에 실은 것은 360장 정도 됩니다. 미공개 사진도 많습니다. 그동안 사진을 갖고 있으면서도 무슨 장면인지 몰라서 못 쓴 것들도 많아요. 저는 기록들을 보면서 전후 사정을 알게 되니까 사진도 파악이 된 거죠.

대표적인 게 김 추기경이 일제강점기 때 학도병으로 징병된 적 있는데, 해방 후에 괌에서 열린 일본군 전범 재판 증인으로 간 일이 있어요. 주둔군 만행에 대한 증인으로 간 거지요. 절두산 기념관에 보관된 사진 뒤에 '괌에서'라고만 씌어 있어요. 다른 사람은 그게 뭔지 몰랐던 거지요.

제가 알고 보니 김 추기경에 괌에 갔을 때 여러 일이 있었어요. 영어를 잘하는 계기도 됐고, 미국 유학을 꿈꾸기도 했었지요. 괌 이전에 지치지마섬(김옥균이 귀양 간 섬)에서 김 추기경이 근무했어요. 거기 주둔한 미 해병대 사람에게 이야기해서 미국 대학도 알아봤어요. 일본에 온 다음에는 대구 교구로 미국 가톨릭대학으로 공부하러 가고 싶다는 편지를 쓴 내용이 있어요.
-김 추기경이 일본군 장교로 복무했다는 주장이 나와서 논란이 된 적도 있지요?

제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다 찾아봤어요. 당시 지치지마섬에서 주둔한 미군 사령관 비망록이 미국에서 책으로 나왔는데 그것까지 찾아봤어요. 거기 보면 '킴'이 미국 대학에 가겠다고 후보 학교를 청해서 말 같지도 않은 소리라고 했는데 부관이 한 20군데 써서 줬다는 기록이 나와요. 저는 그 섬을 검색해서 당시 섬에 간 미군 군대 기록을 찾아봤어요. 당시 기록이 비망록으로 나오는 풍토가 있어서. 두 권이 나와 있더군요. 거길 보면 김 추기경이 장교가 아니라 사병(slodier)이었다는 기록도 있어요.

김 추기경이 일본군 장교였다는 얘기는 거기에 장교 훈련소가 있었다는 소문만 듣고 한 이야기였어요. 추기경의 기록에는 당시 대학생은 다 사관학교후보생 훈련을 받았는데 자신은 사상 검열에서 통과되지 못해서 사병으로 지치지마섬에 가서 근무했다고 나와요. 그런데도 2000년 어떤 사람들이 국내 보혁 갈등 와중에 김 추기경을 두고 사관후보생 훈련을 받았으니 장교였다고 공격한 적이 있지요. 그 말이 인터넷에 수없이 떠돌아 다녔어요.

민족문제연구소라는 곳에서도 지치지마섬에 장교 훈련소가 있었다고 써놓은 걸 본 적이 있어요. 제가 연구소측에 그런 기록이 없다고 했더니 나중에 조사해서 수정하겠다고 했는데 2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연락이 없어요. 그걸 두고 아직도 김 추기경을 친일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꽤 많아요.

이번에 그 사실을 밝히기 위해 미국측 자료도 찾아보고 한 거지요. 지치지마섬이 어디고 무엇이 있었는지 찾아봤더니 해군 잠수함 기지가 있었어요. 육군은 극소수 병력만 주둔해 있었구요. 연평도만 한 섬인데 장교 훈련소가 있을 만한 곳은 못 됐어요. 미군 자료에 '킴'은 솔져라고 나와요. 해방 후에도 포로 개념으로 일종의 병사라고 나와 있어요.

이런 걸 보면 한 번 잘못된 기록은 바로잡으려면 참 힘들어요. 이번에 처음으로 공개되는 사진 자료 중에는 미군 유해 발굴 작업 중에 사병 모자 쓴 사람이 있는데 김 추기경이 유력해 보여요.
-고증하느라 사람들도 많이 만나셨지요?

유일하게 살아있는 중고 동창으로는 최익철 신부가 있어요. 서울 대교구 최고령 신부인데, 이번에 처음 공개되는 사진 중에 신부가 서임 때 부복한(엎드린) 사진이 있는데 지금까지는 누군지 몰랐어요. 수소문 끝에 김 추기경 옆에 있었던 분이 정학원 몬시뇰(고위 성직자)인데 그분이 아직 생존해 계셔서 확인할 수 있었죠.

김 추기경의 첫 비서를 지낸 신부부터 마지막 비서 수녀까지 다 인터뷰를 했어요. 결정적인 몇 마디씩을 해주셨어요. 그런 식으로 만난 분이 3년 동안 70-80명 정도 됩니다. 이메일이나 전화로 문답을 주고받은 사람까지 포함하면 백명이 넘습니다.

볼 수 있는 자료는 다 봤고, 만날 사람은 거의 다 찾았고, 볼 수 있는 사진은 거의 다 봤습니다. 앨범 40권을 비롯해 개인이나 단체가 보유한 사진들까지 거의 다 봤다고 자부합니다. 이런 자료들을 요청하고 협조를 구하기 위해 서울 대교구로부터 받은 공문이 30장 정도됩니다. 지금까지 단일 신청인에게 발부해준 공문으로는 가장 많다고 하더군요.

신문도 지난 기사 데이터베이스를 통해 관련 기사들을 다 봤어요. '김수환' '명동성당' '서울대교구장' 이런 식으로 검색어를 만들어서 관련 기사를 찾아 읽었어요. 신문도 논조가 다르니까 여러 신문을 봤습니다. 특히 80년대 이후 신문들의 논조가 확 갈립니다.

정확성을 기하기 위해 다 봤습니다. 책 본문에서도 무슨 신문 몇 월 몇 일 기사를 기초로 재구성했다는 식으로 밝혔습니다. 각 언론사가 갖고 있는 사진들도 다 검색했습니다. 신문사에서 구입한 것만 해도 100장이 넘습니다.
-처음 일반에 공개된다는 부복 사진이라는 게 뭐죠?

3년 전 절두산에서 얼핏 봤는데 굉장히 작은 사진이었어요. 사진에 빛이 좀 들어서 상태가 좋지 않았어요. 처음엔 안 쓰려고 하다가, 다시 보니 그 사진이 이때까지 공개가 안 됐고, 그 순간 결심이 남달랐겠다는 생각에 살렸어요. 김 추기경이 신부 서품을 받기 전 사제가 안 되려고 한 일이 여러 차례 있었어요.

그런 점에서 부복은 복종의 의미가 있지요. 이 때 옆에서 같이 사제 서품을 받은 정 몬시뇰도 그 사진이 없는 줄 알았다고 해요. 그 사진을 보더니 곧장 오른쪽이 김수환 추기경이라고 하더군요. 당시에는 부복 순서가 오른쪽이 연장자였다는 거예요.

그리고 김 추기경이 사제가 되기 1년 전에 무릎 꿇고 부제 품을 받는 장면이 있는데 그 사진도 이번에 공개했습니다. 또 추기경이 손이 닳도록 봤던 기도서, 맨 처음 신부가 될 적에 주변에 뭐라고 기도했으면 좋겠다고 카드에 적어서 나눠준 것, 성경 시편 51장 '천주여 나를 긍련히 역이소서(하느님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적은 사진도 실었습니다.
-집필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부분이라면요?

제가 이번 책 쓰면서 가장 감동받은 부분이 있어요. 김 추기경이 용산의 홍등가 여인들을 찾아가서 위로한 사실입니다. 거기에 '막달레나의 집'이라는 쉼터가 있었는데, 처음에는 비공개 장소였어요. 그 시설을 운영하는 이옥정이라는 이름의 신도가 추기경님이 와서 위로해주시면 큰 힘이 되겠다고 편지를 썼는데 김추기경이 직접 가겠다고 한 거예요.

새해는 바쁘니까 정월 보름이 여자들 새해라고 그때 수행비서도 없이 가서 같이 시간을 보낸 적이 있어요. 몇 년에 걸쳐 갔는데 앨범을 보니 벽돌색 잠바를 입고 같이 찍은 사진이 있었어요. 그때 함께 윷놀이를 하는데 추기경에게 말판을 맡긴 거예요. 그렇게 놀다가 여인 중 한 명이 "김 추기경님이 말을 속이면 어쩌냐"고 하니까, 김 추기경 말씀이 웃으면서 하신 말씀이 걸작이에요. “나도 따야지”라고 했다는 거예요. 추기경다운 유머라고 생각했어요. 물론 나중에 돈은 다 나눠줬어요.

 그 사진도 내용도 소개해야 하는데, 각 개인의 명예도 달린 문제니까 일일이 확인해서 구분을 해야 했어요. 이옥정 대표까지 6개월에 걸쳐 확인해서 그대로 나가서 안 될 사람은 음영 처리했어요.
-전기를 쓰시면서 알게 된 추기경은 어떤 사람입니까?

두 가지로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다. 하나는 사제가 되기까지 최종 결심이 순탄치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마음 속에 굉장히 갈등이 많았어요. 거기서 인간적인 면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 모든 갈등을 견디고 대신학교에 들어간 순간부터는 신앙인으로 한길을 갔습니다. 그 다음부터는 인간적 괴로움이 나타납니다. 고위 성직자, 그러니까 주교, 대주교, 추기경이 되면 교구 행정을 해야 하니까 그때부터 고뇌가 따릅니다. 친필 일기장 여러 부분이 공개가 됩니다. 교구 행정이라는 게 결국 예산 지원 배분에 따라 더 급한 데로 써야 하는데 불만이 따르기 마련이죠. 김 추기경은 "내가 은행이었으면 좋겠다"는 표현까지 합니다.

 그런 중에도 추기경이 끝까지 가장 큰 관심을 보인 것은 사회 약자와 가난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용산 홍등가의 여인들을 직접 찾아갔어요. 여인들 신세 타령을 다 듣고서는 "너네 고생 참 많이 했구나"라고 말씀했다고 하더군요. 그 중 누가 죽었을 때는 빈소에 추기경 명의로 조화를 보냈습니다. 그 여인의 장례식을 삼각지 성당에서 치르도록 주선도 해주셨어요. 그래서 주변 사람들은 "아무개가 살아서 사람 대접을 못 받더니 죽어서야 사람 대접을 받는구나" 했다더군요. 그 외에도 양평동 판자집, 시흥 같은 곳의 가난한 사람, 소외된 약자들에 대한 관심이 컸어요.

김 추기경은 그런 말을 했어요. "사람들이 나보고 자꾸 운동권이라고 하는데 나는 좌경이니 우경이니 생각해본 적이 없다. 나는 늘 약자 편이다. 우리 사회를 걱정해서 한 말이지 이데올로기가 아니다." 추기경은 우리 사회의 양극화를 걱정했어요. 결국에는 나눔과 베품이라는 게 우리 사회에 부족한 게 아니냐, 그게 많았으면 좋겠다고 했어요. 당신께서 각막까지 기증하고 떠나셨잖아요. 그 덕분에 다음날 두 사람이 한 쪽씩 눈을 떴어요. 그래서 저도 이번 책의 마지막을 두 사람이 빛을 봤다는 문장으로 마쳤어요.

이 책을 쓰면서 저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가 됐습니다. 참 잘못 살아온 부분이 많구나, 반성도 많이 했습니다. 추기경의 기록을 보면 누구한테 싫은 소리 한 적이 거의 없었어요. 무엇보다 다른 사람 이야기를 끝까지 듣는 분이었습니다.
-보혁 갈등은 지금도 덜하지 않은 상황 같습니다만.

그 점에서는 지금 시대가 그때와 크게 다른 게 없어요. 제가 추기경 전기를 쓴 이유이기도 해요. 그분은 우리 사회의 정신적 지도자이자 중재자로서 도저히 풀 수 없을 것 같았던 문제도 곧잘 풀곤 하셨어요. 그러면서도 갈등의 골이 깊어가는 것에 대해 그렇게 우려하셨어요. 지금 그분의 삶과 생각, 가치관을 돌아보는 게 오늘 우리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분이 추구한 가치가 지금의 갈등을 메울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을 제시한다고 생각합니다.
-2권을 보면 민주화 과정과 그 속에서 추기경의 역할과 고뇌가 상세히 기술됩니다. 집중 조명한 이유가 있나요?

추기경님은 민주화를 지원하는 일에 나설 때도 민주화 운동가여서가 아니라 교회의 가르침 때문이었어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정신 중 가장 중요한 것이 인간의 정의, 약자에 대한 배려였어요. 그런데 당시 사회는 그렇지 않았다는 거지요. 그래서 교회의 가르침에 대해 이야기한 것이었습니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때도 데모를 하자고 하지 않았어요. 당시 정권과 위정자를 향해 하느님이 두렵지 않느냐고 이야기했어요. 그게 교회의 가르침이었다는 거지요. 1970년대부터 일관되게 유지돼온 추기경의 생각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추기경을 사회운동가, 사회개혁가로 보고 기대한 거지요.
-엘살바도르 군사정권과 혁명 세력 사이에서 비폭력 민주화를 강론하다가 숨진 로메로 대주교가 떠올랐습니다.

김 추기경은 해방신학에도 상당한 관심이 있었어요. 틀린 길은 아니라고 하셨어요. 그러나 과격한 부분은 종교와의 사이에서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 생각할 거리를 준다고 했어요. 추기경이 세계 성체 대회를 열 때 해방신학자인 에우데르 카마라 브라질 대주교를 초빙하기도 했어요. 그분 말씀을 읽고 메모를 하기도 했어요. 책에는 쓰지 못했는데, 자칫 단편적으로만 들어가다 보면 오해의 여지도 있고, 그렇다고 다 쓰자니 너무 길어질 것 같고 해서 뺐어요.
-천주교 내에서도 보다 진보적인 행보를 보인 정의사제구현단이 나중에 추기경을 비판하기도 했지요. 추기경의 생각은 어땠나요?

추기경님은 절대로 어떤 단체나 남을 나쁘게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정의구현사제단 활동에 대해서도 후세 역사가 평가할 것이라고 하셨지요. "내가 사제단 기도회 할 적에 가끔씩 가줬다. 그 사람들이 하는 일이 틀린 것은 아니기 때문에 용기를 주기 위한 것이지 동참한 것은 아니다"라고도 하셨지요.

왜냐 하면 정의구현사제단은 주교회의 비인준 단체였습니다. 박종철 고문치사 조작 사건 폭로 때도 "자칫하면 정의구현사제단이 크게 다칠 수도 있을 것 같아서 내가 보호막이 될 필요가 있겠다, 내가 봐도 사실로 보인다"는 생각에서 5.18 광주 미사 집전 끝난 다음에 김승훈 신부로 하여금 따로 발표하는 형식을 취하게 하셨지요.

그 정도로, 나설 때와 안 나설 때를 가리고, 보호막이 되줄 때를 굉장히 신경을 쓰셨어요. 정의구현사제단이 추기경을 비판했을 때도, 박완서 선생이 신문에 기고했지요. "추기경은 언제나 한 자리였다. 그런데도 세상이 바뀌고 나니까, 깃발을 왜 안 드느냐고 요구하는 것은 무리"라고 했는데 맞는 이야기예요.

그 후로 이념 갈등이 깊어지면서, 가톨릭 수장 자격으로 좌경화에 찬성할 수 없고, 국보법은 독소 조항 제거여야지 폐지에 대해서는 반대라고 강하게 발언하신 거지요. 당시에 비판적인 신부들은 추기경님은 왜 촛불을 안 드느냐, 시대의 징표를 왜 못 읽느냐고 다그쳤지만 추기경은 그렇지 않다고 판단한 듯해요.
-김 추기경의 이야기와 생각을 반영하려고 했다지만, 저자의 시각이 반영된 것 아닌가요?

물론 저도 인간이니까 취사선택이 개입할 수밖에 없지요. 전체 틀을 짤 때에는 작가로서 생각이 작용했다고 봐야죠. 그래도 집필 중에 놓지 않으려고 한 것은, 이 책에 담기는 것은 전적으로 김 추기경의 생각이어야 한다는 원칙을 지키려고 무던히 애를 썼습니다. 그래서 세세한 부분까지 인용으로 뒷받침했습니다. 저의 느낌이나 생각이 절대 아니예요. 책에 나오는 추기경의 생각과 말은 95% 이상 근거를 갖고 제시했습니다. 
-달을 바라보며 혼잣말을 한다든지 하는 대목은 전지적 작가 시점이 아니면 어려운 표현도 있더군요.

독백조차 대부분 팩트입니다. 실제로 기록을 보면 달 이야기를 여러 번 했어요. 마음 속의 생각까지 일기나 다른 자료를 통해 다 확인한 사실입니다.
-말년에 외로움과 절대 고독을 토로한 대목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늘 말씀하신 게 나도 인간이라는 거였어요. 추기경님은 섭섭한 것을 남에게 토로하지 않았어요. 자기가 안고 있어야 했지요. 그래서 불면증으로 끝까지 고생하셨어요. 당신이 가야 할 길이 십자가의 길이라고 여기고 계속 묵묵히 받아들이셨던 분 아닌가 싶어요. 자기변명을 잘 안 했어요. 갈등을 상의할 때도 없었고 늘 외로운 결정을 내려야 하는 자리였어요. 그걸 30년을 했으니 고독감이 짙을 수밖에요.
-스스로 이번 전기에 대한 완성도를 평가한다면요?

시작할 때 생각한 것에 비하면 150%라고 하고 싶습니다. 처음에는 600쪽 단 권을 목표로 했어요. 지금은 초고의 절반으로 줄인 게 두 권으로 나왔어요. 그 점에서 추기경의 거의 모든 것을 망라했다는 점에서 150%라고 하고 싶어요. 다만 제 책을 통해서 독자들이 추기경의 정신이나 삶, 목소리를 얼마나 잘 이해하고 받아들일까를 생각하면 점수가 달라지겠지요. 추기경이 85세 됐을 때 자기 인생에 대한 점수를 매기라고 하면 60점쯤 될 것 같다고 하셨는데, 저도 60점 정도라도 되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추기경은 "그러면 하느님이 다시 살라고 명령하면 이것보다 더 잘 살 자신은 없다"고 하셨는데, 저도 이 책을 다시 써보라고 한다면, 지금보다 잘 쓸 자신이 없어요. 오히려 지금의 80%밖에 못 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지금으로서는 시간이 흐른 뒤에 다른 누군가가 더 뛰어난 전기를 써줬으면 하는 심정입니다.

 저는 늘 독자가 두렵습니다. 굉장히 두렵습니다. 불특정 독자 중에는 어떤 고수가 들어있을지 모르기 때문이지요. 그런 분을 매의 눈을 가진 독자라고 합니다. 그런 눈으로 저를 어떻게 평가할까 두렵고 떨립니다. 한국 현대사의 큰 인물이었기 때문에 잘못 조명하면 누가 되니까요. 두렵고 떨리는 마음에 처음부터 끝까지 긴장을 못 놓았습니다. 많이 고쳤습니다. 편집을 할 때도 보통 3교 정도를 보는데 이번에는 6교까지 봤습니다.
이충렬은 이번의 작업을 통해서 다른 작가들이나 연구자들이 드러내지 못했던 김수환의 전체를 새롭게 드러내고자 했다. 그리고 그는 이 일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할 수 있었다. (중략) 그는 김수환 추기경의 삶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역사가 못지않은 정밀함을 발휘하고자 했다. 모든 서술에서 확실한 전거를 중시했고, 이를 찾기 위한 탐색 작업에 결코 게으르지 않았다. (중략) 그러면서 작가 이충렬은 김수환이란 개인의 창을 통해서 1930년대 식민지시대부터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까지에 이르는 한국 사회를 서술해주었다. /이 책을 감수한 교회사 연구의 권위자 조광 고려대 명예교수
-이제는 전기 작가로서 입지를 굳히셨지요? 유독 전기에 매달리는 이유가 있는지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제가 외국에 살다보니 소설은 역사소설밖에 쓸 수 없는데, 현재성이 없는 겁니다. 그래서 생각한 게 전기 장르를 해봐야겠다 싶었어요. 저는 자료 조사가 재미있습니다. 이런 걸 지겨워하면 못하는데 저는 체질에 맞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또 나이가 들고 보니 감성보다는 서사로 끌고 가는 긴 글이 맞겠다 싶었어요. 그런 점에서 저와 궁합이 맞는 장르입니다.

둘째로는, 우리나라에 전기문학이 너무 빈약해요. 외국 도서관에는 별도 섹션이 있을 정도인데. 기껏해야 유족의 의뢰를 받아 쓴 작품들이 많아요. 그런 책은 사람들이 쳐다보지도 않잖아요. 그래서 제가 인물을 발굴해서 써보면 어떨까 싶었어요. 잘 될지도 모르고 무작정 썼어요.

써놓고 보니 간송 책이 생각 이상으로 큰 호응을 받으면서 힘을 얻었어요. 당시에 언론들도 높은 관심을 보여줬어요. 이어서 최순우 책이 나왔을 때도 관심들이 많았어요. 평도 좋았아요. 당시에 어떤 기자 말이, 이렇게 무명이 단번에 '저자 서클' 안으로 진입한 것은 드문 일이라고 하더군요.

문학에서 시와 소설은 인간의 사유로 들어가는 문을 열어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에 비해 전기는 인간의 삶에 대한 성찰, 역사에 대한 성찰로 진입을 돕는 도구라고 생각해요. 그런 점에서 추기경의 삶과 생각에 대해 우리가 한번 성찰해볼 필요가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금 이 시대에 누가 그런 역할을 해주는 분이 있다면 굳이 옛 사람을 돌이켜볼 필요가 없겠지요. 하지만 제 눈에는 안 보입니다.

추기경이 사회를 어떻게 보고 역사를 어떻게 봤는지 살펴 보는 것은 지금 이 시대를 어떻게 헤쳐나갈지 지혜와 성찰의 기회도 준다고 생각합니다. 성찰은 한 인물을 통해서도 이뤄질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 문제 해결의 길도 추기경 말씀과 삶 속에 담겨있다고 생각합니다.

추기경님은 증오의 단어를 사용하지 말아달라고 했습니다. 다들 나름의 할 말이 있겠지만 증오는 인간에 대한 사랑이 이미 부재한 것이며 해법이 될 수 없다고 봤습니다. 지금 이 사회에 그런 이야기를 할 만한 분이 드뭅니다.
-그 다음 계획이 있습니까?

지금까지는 다 사회적으로 높았던 분들을 다뤘습니다. 이제는 낮은 분을 해보려고 합니다. 지금 두 분을 생각하면서 자료를 모으고 있습니다. 한 분은 진짜진짜 낮은 분인데 삶이 큰 울림을 줍니다. 그 다음은 음지에서 고생한 사람인데, 그러면서도 우리 사회에 꼭 필요했던 사람입니다. 집필 순서는 어떻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자료는 추기경 작업 중간중간에 골치가 아플 때 모으곤 했습니다.
-앞으로도 전기만 쓰실 생각인가요?

물론 소설집 같은 것을 내고 싶은 욕심은 있습니다. 하지만 틀림없이 실패한다고 생각해요. 해리 포터를 쓴 J. K. 롤링이 자기 이름으로 낸 소설은 실패했잖아요. 그런 실패는 독자에 대한 예의도 아니라고 생각해요. 제가 잘할 수 있는 것으로 찾아가고 싶습니다. 지금으로서는 전기문학의 활성화에 디딤돌이 된다면 큰 영광이고 영예라고 생각해요.

앞으로 제가 얼마나 더 쓸지 모르지만, 아마도 다섯 권 이상은 힘들 것 같은데, 전기 문학의 맥을 이어가는 누군가가 나타났으면 해요. 개인적인 바람으로는 40대쯤 된 어느 문필가가 전기 작가를 하고 싶다면 제 노하우와 소스를 언제든지 공개할 용의가 있습니다.

전기 작가가 힘든 게, 한 2, 3년 고생해서 냈는데 별 반응이 없으면 힘이 빠집니다. 그래서 전기 작업은 작가가 미쳐야 합니다. 그런 쪽으로 뜻이 있는 분이 있으면 얼마든지 도움을 주고 인물에 대해서도 자문해줄 용의가 있습니다. 저는 전기를 통해 사회가 성찰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이팅게일을 통해 간호사들이 성찰하고, 아인슈타인을 통해 물리학자들이 생각하듯이 말이지요.
-국내에서 높이 평가하는 다른 전기작가가 있습니까?

안재성 작가입니다. '경성 트로이카' 저자입니다. 주로 근대 인물, 사회주의 인물에 대해서 썼는데 필력이 대단합니다. 개인적으로 아는 사이는 아닌데, 제가 쓴 간송 전기가 나왔을 때 서로 통화한 적 있습니다. 책에서 김태준 이야기랑 잘 읽었다면서. 그 뒤로 그 분 책을 꼭 사봤어요. 스토리텔링이 탄탄해요. 자료 조사가 철저하고 사실에 입각해 씁니다. 감탄이 나올 정도입니다.
-해외 작가 중에는?

이번에 노벨문학상을 받은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입니다. 자료 조사와 증언으로 책을 쓰는 능력이 탁월합니다. 다큐멘터리인데 무미건조한 게 아니고 그걸 가지고 스토리를 만들어내는 능력이 아주 뛰어납니다. 책은 재미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스토리텔링이 중요하지요. 결국 이야기를 끌고 가고 시대를 끌고 가는 서사의 힘이 작가에게 필요한 재능인데, 알렉시예비치는 체르노빌 원전 피해자나 전쟁 피해자들 목소리를 통해 인간과 환경에 대해, 체제에 대해 생각하게 합니다. 결국에는 성찰의 길잡이 역할을 하지요. 그런 면에서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전기를 읽어도 작가는 기억 못하는 경우가 많아요. 제가 쓴 간송 책도 좀 알려졌지만 정작 저자는 모르는 경우가 많아요. 이번 추기경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그래도 저는 전혀 불만은 없습니다. 저보다 대상 인물이 드러나는 것으로 만족합니다. 솔직히 전기를 문학으로 인정해 주느냐 여부에 대해서도 큰 불만 없습니다. 그냥 내가 써서 독자들에게 또 하나의 삶을 보여드리는 것에 만족하고 즐거워하는 편입니다. 비록 과정은 힘이 들어도 말이지요. 제 일이고 길이라고 생각하니까요.
이충렬 작가는 인세의 반을 서울대교구 옹기장학회의 장학기금으로 기부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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