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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상식사전

위안스카이

요약 중국의 군인, 정치가로 북양군벌의 기초를 마련하고 변법운동을 좌절시킴. 신해혁명 당시 임시총통이 되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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袁世凱(한자)

출생 - 사망

1859년 ~ 1916년

1859년 중국 허난성(河南省) 샹청(項城)에서 출생했다. 그의 가문은 정2품의 고관을 지낸 명문가이자 샹청 제일의 권세가였다. 과거시험의 가장 낮은 단계인 향시에도 두 번이나 낙방하였으나 경군통령(慶軍統領) 우창칭(吳長慶 : 오장경)의 휘하에 들어가 영무처(營務處)의 일을 맡았다. 후에 이홍장(李鴻章)이 지휘하던 안후이군(安徽軍)에 들어가면서 경력을 쌓는다.

1882년 조선에서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정세를 안정시킨다는 빌미로 파견된다. 흥선대원군을 납치하여 청나라로 압송, 연금하였고 임오군란을 일으킨 군사들과의 전투에도 참전하였다. 1884년 조선에서 김옥균이 주도한 갑신정변이 일어나 고종이 납치되자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승리하여 고종을 구출한다. 그는 중국으로 돌아갔다가 1885년 8월 석방된 흥선대원군과 함께 다시 조선으로 건너왔다. 뛰어난 수완과 결단력으로 조선에서의 형세를 슬기롭게 극복해가자 상급자들에게 인정받게 된다. 그에 1885년 이홍장(李鴻章)의 명을 받아 조선 주재 총리교섭통상대신(總理交涉通商大臣)에 취임하여 서울에 주재하게 되었다. 그는 조선의 내정ㆍ외교를 조정ㆍ간섭하고 청나라 세력을 부식(扶植)면서 일본, 러시아와 경쟁하였다.

그러나 1894년 청일전쟁에서 중국이 패배를 거두고 조정이 무방비 상태가 되자 위안스카이에게는 군대를 육성하라는 책임이 맡겨졌다. 그는 톈진[天津] 부근에서 서양식 군대를 훈련시켜 돤치루이ㆍ펑궈장 등의 부하를 양성하여 북양군벌(北洋軍閥)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이는 훗날 정계 진출의 발판이 되었고 이곳에서 양성된 부장(部將)이 민국(民國) 성립 후의 북양군벌의 수뇌가 되었다.

1900년의 의화단(義和團)의 난 때에는 산둥성에 있으면서 난을 진압하고 외국인을 보호함으로써 열강의 신임을 얻었다. 1901년 이홍장의 사후 그의 뒤를 이어 직례총독(直隷總督) ㆍ북양대신이 되어 자기 세력을 확대시켜 나갔고, 중국 근대화와 국방 계획에 큰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그를 신임했던 서태후 사후 1908년 즉위한 선통제(宣統帝)의 아버지인 순친왕(醇親王)에 의해 관직을 박탈당하고 은퇴하였다. 1911년 신해혁명이 발발하자 청조는 그를 다시 소환하고 그해 11월 내각 총리대신이 되어 조정의 실권을 잡았다.

그는 보수세력과 혁명세력 모두에게 신임을 얻어 북경의 첫 황실과 난징의 중화민국 정부 양방이 그가 대총통이 되는 데에 동의한다. 1912년 마침내 그는 혁명파의 쑨원을 물러나게 한 후 중국을 정식으로 조직하였고 수도를 난징에서 베이징으로 옮겼다. 그는 대규모의 해외차관 도입 계획이 의회의 반대를 맞자 1913년 국민당의 당수 쑹자오런을 암살하고 의회의 분열을 일으켰다. 그로 인해 폭동이 일어났으나 열강과 차관협정을 맺어 그 힘으로 쉽게 진압하였다. 이것을 제2혁명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그 해 10월에 정식으로 초대 대총통에 취임, 국민당을 해산시키고 대총통선거법을 개정하여 독재체제를 확립하였다. 그는 종신 대총통이 되고자 했으며 후에는 황제가 되려는 야심을 품고 1915년 5월 일본의 21개조 요구를 받아들였으며, 황제추대운동을 전개시켜 1916년 1월 스스로 황제라 칭하고, 연호를 홍헌(洪憲)으로 개원(改元)한다고 선언하였다. 이는 반대파는 물론 지지세력의 불만까지 초래하여 반원(反袁)운동이 확대되었다.

그러나 1차 세계대전으로 더이상 서구 열강들은 그를 지원해 주지 못했고 오히려 영국ㆍ러시아ㆍ일본 등 주변 강대국도 황제제도 취소를 권고하였다. 그리하여 황제에 오른 3개월만인 1916년 3월 황제제도 철회를 선언하고 그해 6월 6일 만성 피로와 요독증으로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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