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칼럼] 강남역 10번 출구와 여성

  • 인터넷뉴스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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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6-05-26   |  발행일 2016-05-26 제30면   |  수정 2016-05-26
20160526

강남역 여성 피살사건 끔찍
추모 열기 갈수록 뜨거워져
여성 대상 범죄 비판과 함께
여성의 두려움 등에도 공감
구조적 개선대책 서둘러야


#1 “새벽 1시, 그 술집 화장실에 있던 여자가 나였다면 죽은 여자는 내가 되었을 거예요.” 많은 여성들이 이 사건을 이렇게 느껴요. 나에게 일어날 수 있었던 사건으로 아파하고 분노하고 슬퍼하고 있는 거예요.”

#2 회식하다 공중화장실에 가야 했는데 팀원들이 위험하다고 남자 한 명을 같이 보내서 내가 볼 일 보는 동안 남자가 근처를 지켰다. 화장실도 혼자 가지 못하는 무력하고 유아적인 존재가 된 것 같았다. 보호받고 싶지 않다. 보호자 없이도 안전하고 싶다.

9일째다. 강남역 살인사건이 발생한 후 지금까지도 SNS에는 다양한 추모 글이 올라오고 있고, 강남역 10번 출구는 매일 추모행렬이 이어지고 있다. 하루에도 수많은 살인 사건이 발생하고 있는데 왜 이 사건은 이토록 사회적 파장을 일으키며 하나의 사회현상이 되고 있을까.

인터넷 댓글이나 SNS 반응, 강남역 포스트잇 내용들을 살펴보면 유독 여성들이 이번 사건을 ‘나의 이야기’로 받아들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나는 우연히 살아남은 여성이며, 운이 나쁘면 언제든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공감대 때문에 강남역으로 나가 고인을 추모하고, 여성을 대상으로 하는 강력범죄에 대해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경찰과 언론에서는 이번 사건을 정신이상자의 ‘묻지마’ 살인사건으로 규정하고 있다. 여성혐오니 남성혐오니 하는 지나친 성대결로 가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는 판단이 작용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여성들은 가해자가 범행동기를 “여자들에게 항상 무시당해서”라고 진술했고, 특히 화장실에 들어온 6명의 남성들을 무사히 보낸 후에 여성이 들어오기를 기다렸다가 범죄대상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여성혐오범죄라고 인식하고 있다. 여기에는 여성에 대한 차별, 남자라면 적어도 여성에게만큼은 무시당해서는 안된다는 사회적 맥락, 즉 권력관계가 작용한 것으로 보는 것이다. 이는 반대로 여성들이 무시당했다고 해서 남성에게 위해를 가하는 경우를 찾아보기 힘든 이유이기도 하다.

여성에게만 부과되는 사회적 이중 잣대는 여전하다. 성폭력 사건이 발생해도 피해자의 노출된 의상과 평소 행실을 문제 삼는 것이 사회적 시선이다. 이번 사건이 사회에서 상대적 약자로 살아온 여성들의 차별의식과 불안 심리를 제대로 건드렸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포스트잇을 통해 그동안 말하지 못한 자신들의 경험과 반응을 끊임없이 쏟아내고 있고, 이번 일에 이렇게 쉽게 공감하고 연대하는 것이다.

30년 전 대학생이던 나는 길을 걸을 때 가능하면 친구들과 무리지어 가거나 도로 안쪽으로 붙어 다녔다. 오토바이나 봉고차로 젊은 여성들을 납치해 인신매매로 섬에다 팔아넘긴다는 소문이 자자했기 때문이다. 실제 흉흉한 소문에만 그친 것이 아니라 당시 뉴스에는 부녀자 납치 및 인신매매단 검거 소식이 하루가 멀다 하고 전해지기도 했다. 이제 꼬박 한 세대가 흘렀다. 하지만 여전히 여성에게 도시는 안전하지 않다. 항상 경계하고 마음 졸이며 사는 것에 여성들이 적응한 것뿐이지 도시의 삶 자체가 매일매일 서바이벌 게임인 것이다.

남자들 중에는 남성 전체를 잠재적 범죄자로 취급하지 말라며 억울함을 호소하기도 하고, 과열된 추모열기가 불편하다는 이도 많다. 핵심은 개별 남성이 아니라 사회전반에 퍼진 여성을 보는 시각이 어떠한지에 대한 문제이다. 누군가 따라오는 발자국 소리에 뒤도 돌아보지 못한 채 종종걸음 치고, 남자 혼자 타고 있는 엘리베이터에는 선뜻 발을 들여놓지 못하며, 공중화장실에 갈 때마다 마음 졸여본 경험이 없는 사람은 이번 일이 왜 이렇게 큰일인지 모를 것이다.

지금 사회적으로 해야 할 일은 이번 사건이 여성혐오범죄인가 여부를 따질 것이 아니라 여성들이 그동안 겪었을 일상적인 두려움, 불안, 불편함을 공감해주고 어떻게 하면 구조적으로 이러한 부분들을 개선할 수 있을지 함께 방안을 마련해나가려는 고민과 노력이다. 남성 보호자 없이도 안전한 도시가 필요한 것이다.정일선 대구여성가족재단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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