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노멀 시대의 경제민주화

2016.02.02 20:37 입력 2016.02.02 22:59 수정
김상조 | 한성대 교수·경제개혁연대 소장

경제는 살아날 기미도 안 보이는데, 죽었던 경제민주화는 부활했다. 연초에 안종범 경제수석이 “역대 어느 정부도 하지 못한 경제민주화를 실천”했다고 자화자찬한 탓도 있고, 현행 헌법의 경제민주화 조항(119조 2항)을 만든 김종인 박사가 더불어민주당에 영입된 탓도 있다. 바야흐로 선거의 계절이다. 그런데 2012년에도 그랬지만, 기대보다 우려가 더 크다. ‘너도나도 경제민주화를 떠든다고 해서’ 경제민주화가 진전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정치 슬로건으로 오염된 경제민주화는 역효과를 낸다.

더구나 한국경제의 성과를 좌우하는 세 차원의 환경요인이 최악의 상황이다.

[김상조의 경제시평] 뉴노멀 시대의 경제민주화

첫째, 세계경제를 보면, ICT화 및 글로벌화가 초래한 양극화의 상처가 아물기도 전에, 2008년 위기 이후 밀어닥친 저성장·불확실성의 뉴노멀(New Normal) 시대가 끝도 없이 이어지고 있다. 둘째, 일본-한국-중국-아세안으로 이어지는 동아시아의 분업구조가 급변하면서 한국의 경쟁 우위가 마모되었고, 특히 2000년대 한국의 성장을 이끌었던 ‘중국 효과’(China effect)가 이제는 저주로 바뀌었다. 셋째, 국내적으로는 재벌 중심·수출 주도 성장모델의 낙수효과(trickle-down effect)가 소멸한 가운데, 유례없는 고령화 추세가 소비절벽과 세대갈등을 증폭시키고 있다.

이 세 차원의 요인은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외생변수이거나 단기간에 변화시킬 수 없는 구조변수다. 한마디로, 암울하다. ‘한국경제의 성장을 이끌 새로운 산업도, 한국제품을 받아줄 새로운 시장도 보이지 않는다.’ 이것이 경제민주화를 추진해야 할 절박한 이유이지만, 타성에 젖은 정치 슬로건으로는 경제민주화를 이룰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20세기 최고의 경제학자 J.M. 케인스는 “세상이 변했으니 나도 생각을 바꾼다(When the facts change, I change my mind)”고 했다. 우리를 둘러싼 경제환경이 급변했고, 따라서 우리의 생각도 바뀌어야 한다. 그런데 정부도 야당도, 보수도 진보도, 자신의 생각을 바꿀 능력이 없는 것 같다.

최근 경제민주화 성과 논란 와중에 배포된 청와대 보도자료에는 “진정한 경제민주화는 일자리와 소득으로 국민에게 보답하는 것”이라고 쓰여 있다. 구차한 변명으로 들리지만, 틀렸다고 폄훼하지는 않겠다. 누가 대통령이 되었더라도, 지금의 경제환경에서 3년 만에 국민이 체감할 수 있는 경제민주화 성과를 내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박근혜 정부의 자화자찬에 국민 대다수가 공감하지 못하는 것은 결국 진정성의 문제다. 어렵지만 초심을 잃지 않고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갈팡질팡 끝에 과거로 회귀하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중국 공산당의 시진핑도 수출·투자 중심의 과거 성장전략을 폐기하고 성장률 하락을 감수한 채 개혁을 추진한다는데, 어찌 한국이 개발독재 시절의 경제운용 방식으로 돌아가려 하는가. 세상은 변했으되 생각은 바뀌지 않았다. 그러니 느닷없이 다시 꺼내든 경제민주화가 정치 슬로건으로 치부되고, 노동법을 비롯한 경제활성화 쟁점법안들조차 경제살리기가 아니라 총선 캠페인으로 인식되는 것이다.

야당과 진보진영의 생각 중에 낡은 것도 많다. 서비스업에 대한 고정관념이 그렇다. 서비스업은 먹고 노는 ‘불생산적’(non-productive) 산업이 아니다. 제조물품에 콘텐츠와 충성 고객이라는 핵심 소재를 공급하는 중간재산업이다. 서비스업 발전 없이 제조업의 경쟁력을 제고할 수는 없다. 더욱이 신규 고용의 80%가 서비스업에서 만들어지는 세상이 되었다.

문제는, 서비스업 발전이 기존의 진보적 가치와 충돌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대표적 예가 CJ그룹의 이재현 회장이다. 그는 삼성에버랜드 전환사채를 포기했고, (역설적이게도 최근 실형 선고의 한 원인이 되었지만) 이병철 회장이 남긴 차명재산을 국세청에 자진신고하면서 세금을 낸 이례적인 총수다. 또한 한국의 영화·엔터테인먼트 산업을 개척한, 재벌 3세라기보다는 창업자에 가까운 사람이다. 물론 동전에는 양면이 있다. 이 회장은 문화예술을 상품화하고 자영업자의 기반을 파괴하는 생태계 포식자로 비난받는다. 공공성의 관점에서 보면, 그는 진보의 공적이다. 이 모순을 푸는 길을 찾아야 한다. 삼성전자·현대자동차만으로 만족할 만한 고용과 소득을 창출할 수 없다면, CJ 같은 서비스기업도 한국경제의 건전한 구성요소로 만들어가야 한다.

세상이 변했다. 익숙한 과거와 결별하는 고통이 따르겠지만, 보수도 진보도 생각을 바꾸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뉴노멀 시대의 경제민주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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