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우 끔찍한 날이다(So terrible day)!”

24일 브렉시트(Brexit: 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개표 현황을 전하던 영국 BBC방송의 한 기자는 무거운 표정으로 이 같은 말을 내뱉었다. 개표가 72%가량 이뤄진 상황에서 유럽연합(EU) 잔류 득표율이 48%로 EU 탈퇴의 52%에 밀리던 시점이었다. 최종 개표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이날 브렉시트 개표 판세를 보면 영국인들이 왜 이런 선택을 했는지 짐작해볼 수 있다.
[브렉시트 쇼크] 남북으로 갈린 영국 민심…노년·저소득층이 탈퇴 주도
남북 간 갈등의 골 깊이 파여

영국이 끝내 EU와의 작별을 고했다. 브렉시트가 현실화될 조짐은 개표 초반부터 나타났다. 대형 선거구 중 잉글랜드 선덜랜드 지역에서 13만4324명(투표율 64.8%)이 투표한 가운데 탈퇴가 61.3%로 잔류(38.7%)를 크게 앞지른 것으로 집계됐기 때문이다. 개표에 앞서 블룸버그통신은 “선덜랜드에서 박빙 상황이 나타날 경우 잔류로 결론 날 가능성이 우세하다”고 진단했으나 막상 투표함을 열자 잔류 득표율은 저조했다.

개표 결과를 보면 남북 지역별 차이가 극명하게 나타났다. 스코틀랜드에서는 예상대로 EU 탈퇴가 38%, 잔류가 62%로 브렉시트 반대 성향이 두드러졌다. 북아일랜드도 잔류(55.7%)가 탈퇴(44.3%)를 앞질렀다. 반면 잉글랜드와 웨일스 지역은 EU 탈퇴가 각각 53.2%, 51.7%로 우세한 것으로 집계됐다. 총 382개 중 320개로 가장 많은 투표소를 가진 잉글랜드는 브렉시트를 이끈 일등공신이 됐다.

지역별 차이 못지않게 세대 간 격차도 이번 투표 결과에 영향을 미친 주요 변수로 꼽힌다. 투표 직후 현지 여론조사회사들에 따르면 18~24세 젊은 층의 60%가 잔류를 선택한 반면 65세 이상은 61%가 브렉시트를 지지했다.

소득수준도 투표 결과를 가르는 요인이 됐다. 경제적으로 부유한 지역일수록 EU 체제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무역의 이점을 누린 것으로 볼 수 있어서다. 탈퇴 여론이 높은 잉글랜드에서 유독 런던은 잔류 의사가 높았던 것이 대표적이다.

텔레그래프는 “금융허브인 런던은 다문화, 국제도시 성격을 띠면서 친(親)EU 성향이 강해 EU 잔류를 희망했다”고 보도했다. 가디언도 이날 투표자들의 성향을 분석해 소득수준이 높고 교육을 많이 받은 사람일수록 브렉시트보다는 EU 잔류를 선호하는 경향이 뚜렷했다고 분석했다.

반면 일자리 문제 등 경기에 민감한 저소득층은 EU 탈퇴를 더 선호했다. 여론조사업체 유고브가 투표 당일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영국 노동당 지지자들의 3분의 1이 브렉시트를 찬성한 것으로 나타났다. EU 잔류 지지를 선언한 제러미 코빈 노동당 대표의 호소도 먹혀들지 않았다. 노동당 내 일부 지도자는 친EU 노선 때문에 약 100만명의 지지층이 국민투표 선거 캠페인 기간 영국 독립당(UKIP)으로 옮겨갈 수 있다고 우려해왔다.

이민자, 주권의식 등이 탈퇴 원인

영국이 43년간 몸담았던 EU 탈퇴로 기운 데는 반(反)이민 정서가 깔려 있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동유럽 국가에서 몰려온 이민자들이 일자리를 뺏어간다는 위기 의식이 팽배해 있어서다.

지난해 루마니아 등 주로 동유럽의 EU 회원국에서 영국으로 들어온 이민자는 33만3000명으로 1975년 통계 기록 이래 두 번째로 많았다. 탈퇴가 높게 나타난 잉글랜드 동쪽의 클랙턴시는 청년실업률이 33%에 이를 정도로 상대적 박탈감이 심한 곳으로 꼽힌다. 브렉시트를 적극 주도해온 독립당이 의원을 배출한 곳이기도 하다. 텔레그래프는 “클랙턴 주민들은 무분별한 이민자 정책이 한때 인기 있던 해변가 휴양도시를 쇠퇴시켰다고 주장한다”고 23일(현지시간) 보도했다.

이 밖에 영국이 EU에 내는 분담금을 건강보험 등 영국민 복지에 우선 사용하자는 주장, 사실상 독일 주도의 EU 체제에 상처받은 영국인들의 자존심, EU의 각종 규제에 대한 반감 등이 EU 탈퇴를 결정한 국민투표의 주된 표심으로 풀이되고 있다.

이정선 기자 sun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