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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용원 Jan 13. 2016

베를린 #1
-누군가의 공감을 위한 전략-

여행, 기록 그리고 출발

정신없이 잠에 빠져들었다. 쾌적하고 조용한 숙소에서 잠이 든 덕분에 깰 틈이 없었다. 편견일 수도 있겠지만 독일은 전반적으로 단정한 느낌이 강하다. 저번에 뮌헨도 그랬고, 이곳 베를린 또한 화려하지는 않아도 단단히 균형 잡힌 질서가 곳곳에 존재하는 것 같다. 가벼운 마음으로 호텔에서 아침을 먹고 브란덴부르그문을 보기 위해 나섰다.


사실 유럽을 찾는 한국 사람들에게 베를린은 필수 방문 코스는 아니다. 독일의 수도임에도, 베를린에는 웅장한 건축물이 있는 것도 아니고 특별한 분위기를 가진 눈에 띄는 볼거리가 있지도 않다. 하지만 그래서 더욱 와 보고 싶었다. 많은 사람이 좋아하고 즐기는 것을 나 또한 좋아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무척 많기 때문이다. 게다가 십 년 전의 기억이 나를 베를린으로 다시 이끌었다.                



십 년 전 나는 베를린의 브란덴부르그문에 왔었다. 분단 당시 독일은 영토의 동서 분열과 함께 수도인 베를린도 동서로 분열되어 있었고, 그 경계선이 브란덴부르그문이었다. 그래서 독일 통일 이후 브란덴부르그문은 독일 통일의 상징처럼 여겨지게 되었고 명소가 되었다. 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장소는 그 문 옆에 있는 ‘침묵의 방(Raum der stille)'이다. 1994년에 문을 연 ‘침묵의 방’은 몇 개의 의자와 소파가 있는 한 칸의 방이다. 그 방에서는 외부 소리가 거의 들어오지 않고 내부에서도 거의 소리를 내지 않는다. 십 년 전 겁도 없이 들어가서는 무료임을 확인하고는 그 방에 몸을 맡겼었다.


소파에 몸을 기댄지 1분은 되었을까?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현악기의 높은 음들이 신경질적으로 길게 늘어지는 것처럼, 귓속이 가늘고 긴 줄로 잡아당겨지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다시 1분쯤 지났을까? 그제야 아무 소리도 나지 않고 온몸이 편안해졌다. 


그 기억이 그리웠다. 내가 얼마나 무심한 것들에 시달리고 있음을 확인하는 시간. 문 앞을 서성이다 열리자마자 아내와 함께 들어갔다. 처음 시작은 동일했다. 귓속을 울리는 가늘고 긴 실가닥의 소리. 다만 문을 연 직후라 우리 일행 말고도 여러 사람이 들락날락하는 통에 예전만큼 조용함을 느끼지는 못 했다. 아쉬웠지만 그저 반가웠다. 


사실 ‘침묵의 방’은 인종, 이념, 종교, 배경, 신체적 상황 등과 상관없이 모두에게 침묵으로부터의 여유를 제공하고, 폭력과 학살에 대항해서 평화에 조금이나마 기여하기 위해 기획된 공간이다. 누구나 동의할 만한 멋진 말을 실현하기 위해 선택한 것이 방 한 칸이라면 많은 이들이 비웃을까? 물론 좀 더 멋있게 꾸미고 많은 이들에게 알린다면 그 목적에 더 부합하는 결과를 낳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귓가를 울리는 모든 소리를 의미 있게 받아들이지 않듯, 작지만 굳은 행동이 더 깊은 감동을 줄 수도 있다. 게다가 조용함에 집중하게 하려고 떠들썩하게 행동하는 것은 누가 생각해도 어색하고 모순적인 일이다. 


눈을 뜨면 만나는 습관적인 인터넷 창과 쏟아져 나오는 새로운 이야기들. 대부분이 관심 가는 것과 커다랗게 쓰여 있는 것만 읽게 된다. 너무나 많은 이야기들 속에서 자기에게 익숙하고 즐거우면서도 자극적인 이야기가 구미에 맞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우리는 자연스럽게 편을 가르고 우리의 즐거움을 결정당하고 있다. 그 자체가 나쁘다고 말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다만 크게 드러나지 않는 조용한 이야기들 속에도, 우리 각자가 좋아할 만한 것들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버스를 타고 카이저 빌헬름 기념 교회로 향했다. 사실 베를린에서는 어디를 갈 것인지에 대해 결정하지 않았다. 도착하기 전에 살펴보았던 곳들 중에서는 특별하게 눈에 띄는 곳이 없었다. 그저 전쟁에 부서진 교회 건물을 보존하고 있다는 말에 이끌려 움직였다.           



실제 부서진 건물은 사진에서 보는 것 보다 훨씬 더 처참한 기분을 안겨주었다. 시야에서 가까워질수록 부서진 건물은 내 뼈가 부서진 것처럼 처절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예전 대학시절 철거촌에서 공부방을 하던 선배를 따라 갔을 때가 생각났다. 철거로 많은 사람들이 떠난 동네,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집을 조금씩 부수어놓은 곳이 동네 군데군데에 있었다. 멀쩡한 집이 대다수임에도 그 집들 덕분에 동네의 분위기가 무척이나 어둡고 을씨년스러웠다. 그 선배는 확인할 수는 없지만 일부러 이렇게 부셔놓고 가는 것 같다는 이야기를 했었다. 그런 분위기에 살면서 철거에 반대하며 버티기는 쉽지 않을 것 같았다. 내 삶의 주변이 피폐하게 되면 굳은 마음을 지키며 살기가 쉽지 않다. 전쟁에 대한 경각심을 가지기 위해 부서진 형체를 남겨놓았다는 독일인의 결정은, 나에게는 처절한 기억을 재생시켰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탁월한 선택이었다. 


부서진 건물이 구관이라면 그 옆에 짓고 있는 건물을 포함해 오른쪽의 벌집 형태를 가진 낮은 건물이 신관이다. 현재 예배당으로 쓰이고 있는 벌집 형태의 건물로 들어섰다.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교회를 보았었던가? 화려한 스테인드글라스와 조형물 그리고 웅장한 건물을 얼마나 많이 보았었던가? 내부로 한 걸음 들어서자마자 할 말을 잃었다. 어둠 속에 한 줄기 빛과 같은 천연색의 스테인드글라스는 없었다. 정교하면서도 생생한 조형물 또한 없었다. 끝을 보기 위해서라면 고개를 한참 들어야 하는 높은 천장도 없었다.                



따뜻하지만 엄숙한 파란빛 하늘에 그저 작은 존재만으로 느껴지는 예수상이 걸려 있었다. 제단 또한 아무 장식 없는 책상에 아무 장식 없는 촛대만이 평범한 십자가를 중심으로 나란히 놓여 있었다. 그 공간은 거룩함을  드러내기보다는 나와 함께하겠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종교를 가지고 있지 않고 가질 가능성도 없지만, 그 공간에서는 형용하기 어려운 위안을 얻을 수 있었다.      


너무나 쉽게 공감과 이해를 이야기하지만, 사실 누군가를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똑같아 보이는 상황을 겪었다고 할지라도 그 상황을 겪는 누군가와 동일한 인생을 살아온 사람은 아무도 없다. 숱한 성형수술을 거쳐도 누군가와 완벽하게 똑같은 얼굴을 구현할 수 없듯, 누군가에 대한 완벽한 이해는 태생적으로 불가능하다. 다만 누군가를 이해하기 위해 진정 어린 시도를 하는 것은 가능하다. 그것이 공감이라고 생각한다. 진정 어린 시도가 화려한 표현으로 이루어지기는 쉽지 않다. 누군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꾸준하게 노력해야 하는데, 화려한 표현이 계속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조용한 묵묵함으로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것. 부족하지만 계속 노력해야 할 일이다. 작지만 큰 소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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