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지금껏 가보지 않았던 세계로 향했다. 가장 기괴했던 대선 후보, 공화당을 경악시킨 공화당 후보 도널드 트럼프(사진)가 이제 미합중국 45대 대통령이다. 이 놀라운 선거를 이해하는 방법을 다섯 가지 키워드로 들여다봤다.

 

ⓒReuter


T:Trilemma(트릴레마)

‘트릴레마’는 세 가지 목표를 동시에 달성하는 것이 불가능한 상황을 가리키는 용어로, 주로 경제학에서 쓴다. 경제학자인 대니 로드릭 하버드 대학 케네디스쿨 교수는 이 개념을 변형해 ‘세계경제의 정치적 트릴레마’를 제시했다. ‘전면적 세계화’와 ‘국가주권’과 ‘민주주의’ 세 가지를 동시에 달성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목표끼리 충돌하여 모순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전면적 세계화’는 거대한 부를 생산하지만, 대신 사회 협약을 해체하고 불평등을 심화시켜 소외된 사람들을 대규모로 만들어냈다. 이 사람들이 투표장에서 세계화를 응징하는 순간 국가는 이를 집행해야 한다. 이제 국가주권과 세계화 중 적어도 하나는 부러진다.

둘 다를 지키려면 민주주의를 후퇴시켜야 한다. 이러면 표로 응징받을 염려가 줄어든 정부는 세계화에 소외된 사람들을 무시하고 번영을 추구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도 불가능한 옵션이다. 경제학자 대런 애스모글루 MIT 교수는, 지속적인 번영·발전을 위해서는 경제 제도와 정치 제도가 동시에 포용적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래야만 경제가 착취의 위협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민주주의를 제약하면 애스모글루가 제시한 조건으로부터 이탈하게 되고, 장기적으로 번영 그 자체를 잡아먹을 수 있다.

로드릭의 결론은 명쾌하다. “민주주의와 글로벌 경제가 충돌할 때 물러나야 할 것은 후자다.” 트릴레마를 탈출할 유일한 대안은 민주주의가 역습하지 않도록 ‘세계화의 깊이를 얕게 유지하는 것’이다. 하지만 세계화로부터 가장 크게 이득을 본 제1세계 엘리트들은 로드릭의 트릴레마를 신경 쓰지 않았다.

도널드 트럼프의 승리는 2016년 내내 이어진 역습의 화룡점정이었다. 트럼프의 캠페인을 상징하다시피 한 “중국산 제품에 관세 45%를 물리자”와 “멕시코 국경에 장벽을 쌓겠다. 돈은 멕시코가 내라”는 발언은 상품과 사람의 자유로운 이동을 정면으로 부정한다. ‘더 연결된 세계’의 핵심 가치는 결정적으로 거부당했다.

2016년은 로드릭의 트릴레마가 세계를 일주한 해다. 상반기 최대 뉴스였던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국민투표 가결)는 ‘더 연결된 세계’에 대한 소외된 사람들의 거부권 행사였다. 이민의 물결에 직면한 유럽은 헝가리부터 프랑스까지 극우 정당이 이미 집권하거나 집권에 다가가고 있다. 우파에서 더 두드러지기는 하지만, 좌파에서도 반(反)세계화 세력이 약진했다. 대표주자가 미국 민주당 경선에서 돌풍을 일으킨 버니 샌더스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정립된 전통적인 좌·우파는 대체로 시장에 대해 정부가 어느 정도로 개입할 것인가를 두고 논쟁했다. 그런데 정치세력을 구분하는 핵심 전선 자체가 재편성되고 있다. 이제 ‘글로벌’과 ‘로컬’의 대립, ‘더 연결된 세계’와 ‘자국민을 보호하는 세계’의 대립이 정치의 핵심 전선으로 떠올랐다. 지난 7월 영국 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좌·우파 경쟁이여 안녕, 이제는 개방과 폐쇄의 경쟁시대”라고 논평했다.

 

 

 

 

R:Realignment(리얼라인먼트)

‘리얼라인먼트(재정렬)’는 정당 지지 기반이 구조적으로 재편성되는 사건을 일컫는 정치학 용어다. 예를 들면 영남이 더불어민주당 지지 기반으로 넘어가거나 30대 대졸자 블록이 새누리당 표밭이 되는 등의 심대하고 오래 지속되는 변화가 있을 때 이 용어를 쓴다.

20세기 미국 정치사에서 정치학자들이 합의하는 리얼라인먼트는 두 번 등장했다. 1930년대 민주당의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이 주도했던 ‘뉴딜 동맹’이 첫 번째다. 루스벨트는 기존 핵심 기반이던 남부에 더해 대졸 지식인과 산업노동자 블록을 결합시키며 민주당 시대를 열었다. 1960년대부터 시작되어 20세기 말에 완성된 공화당의 남부 탈환이 두 번째로 꼽힌다. 미국 내전 이후 100년 동안 민주당의 텃밭이었던 남부는 이제 공화당의 확실한 표밭이다.

‘트럼프 2016’이 새로운 리얼라인먼트일까? 정치학자들은 대체로 신중하다. 폭발적인 유권자 재배열이 일어났다는 증거는 부족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묘하지만 일관된 신호는 등장했다. 이번 대선의 승패를 가른 지역인 ‘러스트 벨트’는 몰락한 제조업 지대를 부르는 용어다. 미시간, 위스콘신, 펜실베이니아, 오하이오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11월11일 현재 미시간은 트럼프 우세로 개표가 진행 중이고, 나머지 세 곳도 모두 트럼프에게 넘어갔다.

오하이오는 버락 오바마가 두 번 모두 이겼던 곳이다. 미시간, 위스콘신, 펜실베이니아는 1992년 이후 민주당이 빼앗겼던 적이 없다. 이 세 주는 ‘클린턴의 방화벽’이라 불리며 그녀의 승리를 보장해줄 보루였는데 이번엔 뚫렸다. 민주당이 이 방화벽 세 곳을 모두 이겼다면(1992년 이후로 모든 대선에서 해낸 일이다) 힐러리 클린턴은 선거인단 278표를 얻어 백악관에 입성할 수 있었다.

이 몰락한 산업지대는 일자리가 사라져가는 공포를 상징하는데, 트럼프는 ‘공장을 빼앗아가는 자유무역’과 ‘일자리를 빼앗아가는 이민자’라는 증오의 대상을 이 지역 유권자에게 제공했다. 먹혔을까. 16쪽 그림이 흥미로운 추세를 보여준다. 역대 대선과 대비해서, 클린턴은 러스트 벨트에서 드라마틱한 패배를 당했다. 이 네 개 주에서 클린턴은 2012년 오바마 대비 82~95%를 얻는 데 그쳤다. 반대로 트럼프의 득표력은 확실히 올라갔다. 트럼프는 2012년 롬니 대비 100~109%를 득표했다.

주별 승자가 배당된 선거인단을 독식하는 미국 대선 제도의 특징 때문에, 이 변화가 그야말로 폭발적인 결과를 낳았다. 네 주에 걸린 선거인단은 펜실베이니아 20명, 오하이오 18명, 미시간 16명, 위스콘신 10명으로 모두 64명이다. 이 네 곳 표심이 이번 대선처럼 한 덩어리로 움직인다면 캘리포니아(55명)보다 더 큰 주가 하나 생기는 셈이다. 박원호 서울대 교수(정치학)는 “일관된 콘셉트를 가진 한 다발의 지역이 일관성 있게 넘어갔다. 일자리·자유무역·이민이라는 이슈의 동질성도 높다”라고 말했다.

민주당의 아성이던 북부 백인 노동자 벨트가 공화당의 표밭으로 이동하기 시작했을까? 단정하기 어렵다. 2016 대선이 일회성 이벤트인지 장기 지속될 변화의 시작인지는 증거가 부족하다고 연구자들은 지적한다. 하지만 이번 선거에서 가장 극적인 변곡점인 러스트 벨트의 결과가, 글로벌 차원의 정치 재편성과 맞닿아 있다는 점만은 의미심장하다. 2016년의 정치는 좌우의 대립에서, ‘더 연결된 세계’와 ‘자국민을 보호하는 세계’의 대립으로 재편되고 있다. 그리고 ‘미국에서 가장 큰 스윙스테이트(Swing States·경합 주)’인 러스트 벨트는 ‘자국민을 보호하는 세계’의 손을 들어주는 것으로 대선 결과를 바꿨다.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정치학)는 적어도 리얼라인먼트의 징후만은 뚜렷하다고 본다. 그는 “우리가 알던 공화당은 이제 없다”라고 말했다. “레이건 이후 공화당의 핵심 가치였던 자유무역과 작은 정부가 완전히 부정당했다. 세계화에 대한 반작용은 세계적 현상이고, 이번 대선도 그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공화당의 노선과 지지층이 재구성되고 있다.” 그리고 최 교수는 의미심장한 말을 덧붙였다. “리얼라인먼트 정도가 아니라, 아예 우리가 알던 정치체제 자체가 뒤흔들리는 심대한 변화가 올 가능성도 있다.” 무슨 뜻일까.

 

 

 

 

ⓒAFP11월9일 힐러리 클린턴 민주당 대선 후보(가운데)가 패배를 인정하는 발표를 하고 있다.

 

U:Uncertainty(불확실성)

트럼프 시대를 상징하는 단어를 하나만 꼽으라면 ‘불확실성’을 들 수 있다. 우선은 정책의 불확실성이 두드러진다. 트럼프는 자신의 말에 구속되는 기색이 없는 정치인이고, 대선 중에 내놓은 공약들도 서로 충돌하거나 실현 불가능한 것이 적지 않다(22~23쪽 기사 참조).

정치의 불확실성도 높아졌다. 최장집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정치체제는 사회 갈등을 중화하고 조정하는 기능을 담당했다. 그런데 트럼프의 정치는 갈등을 증폭한다. 많은 사람들이 트럼프를 보고 파시즘의 징후를 떠올리는 이유가 이것이다. 이 ‘증폭의 정치’가 제어되지 않으면 전후 정치체제가 우리가 전혀 모르는 체제로 대체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하여튼 불확실성이 너무 높다.”

트럼프 캠페인은 대체로 불확실성투성이였지만, 한 가지만은 일관성이 뚜렷했다. 그는 갈등의 증폭기였다. 인종이든 종교든 성 정체성이든 ‘우리’와 ‘그들’을 나누고, ‘그들’을 배제하면서 ‘우리’의 힘으로 캠페인을 밀어붙였다. 중화의 정치는 일정한 중간점으로 사회를 수렴시켜 안정시킨다. 하지만 증폭의 정치는 한계선이 없고, 사회를 어디까지 데려갈지 알 수 없다. 불확실성은 극적으로 높아진다.

인종, 종교, 성 정체성 등을 함부로 거론하는 것을 절대 금기로 보는 PC(Political Correctness:정치적 올바름) 문화는 미국 사회에 뿌리가 깊다. 이 PC 문화를 납득하지 못하면서 눌려 지내던 사람들이 트럼프의 승리로 ‘동지들’이 다수임을 확인했다. 이제 이들이 ‘적들’에게 내뱉는 증오 공세가 거침없어질 가능성이 높다. 트럼프가 당장 미국이라는 거대 국가 시스템을 크게 뒤흔들 수 있다고 믿는 관찰자는 많지 않다. 하지만 문화는 얘기가 다르다. 인종주의, 성차별주의, 성소수자 혐오가 “우리가 다수다”라는 사회적 인증을 획득했다.  

불확실성은 또 있다. 미국은 글로벌 패권국가다. 핵안보 질서를 유지하고, 국제법과 국제기구의 권위를 지키고, 자유시장을 보호하며, 자유무역 체제에서 개발도상국 제품을 소비해주고, 글로벌 기축통화를 공급하는 등이 ‘패권국의 책무’다. 이런 비용을 지출해서 국제 질서를 유지할 때 가장 큰 이익을 얻는 나라도 미국이다. 그런데 세계화로부터 소외된 유권자들은 엘리트의 셈법에 이의를 제기한다. ‘민주적 제국’에서는 유권자가 제국의 유지비용을 용납하지 않을 위험이 늘 존재한다.

이제 트럼프가 이끄는 이 패권국가가 국제 규범을 준수할지가 더 이상 분명하지 않다. 당장 기후변화에 맞서는 국제협정인 파리협정이 위태롭다. 트럼프는 기후변화는 미국 제조업을 옥죄기 위한 거짓말이라고 주장한다. 자유무역 체제는 미국 패권을 떠받치는 핵심 기둥이지만, 트럼프는 이 역시 사정권에 두었다. 선거 캠페인 중에 그는 북미자유무역협정 재협상 또는 탈퇴,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탈퇴 등을 ‘취임 100일 프로그램’으로 공표했다.

이근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국제정치)는 트럼프의 등장을 미국 패권이 쇠퇴하는 징후로 해석한다. “오바마 시절의 미국은 경제 회복을 발판 삼아 다자주의와 국제 규범을 내세웠으며, 세계시장을 적극 공략하는 21세기 패권국가의 모습을 보여줬다. 하지만 트럼프 시대에는 미국이 국경선 안으로 후퇴할 것이고, 세계시장 접근보다 자국 보호를 우선순위에 놓으며 ‘수비적인 갈등’이 벌어질 가능성이 높다. 자체로 패권이 후퇴하는 징후다.”

 

 

 

 

ⓒAP Photo11월9일 미국 로스앤젤레스 시민들이 도널드 트럼프의 대통령 당선에 반발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M:Modern History(근대사)

불확실성이 높아지고 예측 가능성이 현저히 떨어지는 세계에서, 분석가들은 기댈 언덕을 찾아 역사로 눈을 돌렸다. 시선이 모이는 곳은 전간기, 그러니까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의 사이에 해당하는 1920~1930년대다.

대니 로드릭 교수는 올해 3월에 발표한 ‘분노의 정치’라는 글에서 전간기가 되돌아오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가 ‘첫 번째 세계화 시대’라고 부른 20세기 초반의 고삐 풀린 세계화는 소외된 이들의 반동을 불렀다. 그것이 전간기 정치를 휩쓴 공산주의와 파시즘이었다. 이 ‘첫 번째 분노의 정치’는 인류사 최악의 전쟁인 2차 세계대전을 낳았다. 2차 대전 이후 서구는 이 교훈을 바탕으로 세계화의 속도를 제어하고, 복지 시스템으로 분노의 정치를 예방했다. 하지만 고삐는 다시 풀려버렸다. 이 시각으로 보면, 2016년은 분노의 정치가 패권국가의 행정부를 장악한, 전간기에도 없던 놀라운 승리를 거둔 해가 된다.

영국의 역사학자인 닐 퍼거슨은 파시즘의 징후라는 관찰과는 거리를 둔다. 그는 이렇게 주장했다. “역사에 등장했던 파시즘은 군국주의가 필수 요소다. 트럼프 현상은 파시즘이 아니다. 전형적인 포퓰리즘이다.”

P:Populism(포퓰리즘)

포퓰리즘이 인민주의나 대중주의로 번역될 때는 ‘보통 사람을 대변하는 이념’이라는 가치중립적 의미가 된다. 하지만 일상 용법에서 포퓰리즘은 민주주의의 절차, 제도, 공동체 의식, 숙의 과정을 우회하거나 생략해버리고, ‘우리’와 ‘그들’을 나눠 ‘그들’에 대한 적대를 부추기는 정치 행태를 뜻한다. 이 용법에서 포퓰리즘은 민주주의의 한 갈래라기보다는 민주주의의 적이다.  

퍼거슨은 포퓰리즘의 재료로 다섯 가지를 꼽는다. 이민, 불평등, 기존 정치에 대한 신뢰 붕괴, 금융위기, 탁월한 선동가. 불평등은 소외되고 분노한 유권자를 대규모로 축적한다. 신뢰가 붕괴하면 선동가의 공간이 열린다. 1873년 대불황, 1929년 대공황, 2008년 금융위기는 모두 포퓰리즘의 훌륭한 배양액이었다. 그리고 이민자는 결정적으로 중요한 요소, 모든 문제의 근원으로 지목될 ‘그들’을 공급한다. 퍼거슨은 히틀러나 무솔리니가 아니라, 1870년대 캘리포니아 노동자당 당수 데니스 커니가 ‘트럼프의 원형’이라고 지목한다. 금융위기와 인종 갈등과 불평등을 이용할 줄 알았던 선동가 커니는 모든 연설문을 “중국인은 나가라!”로 끝내는 것으로 유명했다.

앞의 네 요소는 2016년의 세계가 충분히 갖췄다. 이제 탁월한 선동가가 등장하는 곳에서 포퓰리즘은 폭발한다. 트럼프는 훌륭한 성공 모델을 보여주었다. 그는 “함께하면 더 강하다”(클린턴의 선거 구호)라는 ‘물러터진’ 말은 하지 않는다. 대신에 “9·11 테러 때 뉴저지 주의 무슬림 수천명이 환호했다. 내가 TV로 봤다”라고 말한다.  

이 탁월한 선동가의 승리는 2017년의 세계에도 중요한 영향을 끼칠 가능성이 높다. 역사적으로 제1세계 유권자는 극우파 선동가 정치인을 선출하는 데 마음의 부담을 느껴왔다. 결선투표제가 있는 프랑스와 같은 나라에서는, 극우파 후보가 결선투표에 진출하면 광범위한 반(反)극우 좌우합작이 작동했다. 하지만 이제는 극우파 지도자가 현실에서 상상 가능한 대안으로 등장했다.

한국도 2017년 대선이 예정되어 있다. 한국은 퍼거슨이 제기한 5대 조건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이민 문제에서 미국이나 유럽보다는 자유롭다. 증오의 대상이 될 ‘그들’을 발견하기 쉽지 않다. 하지만 반대파 정당과 그 지지자를 ‘의견이 다른 동료 시민’이 아니라 ‘적’으로 증오하는 데까지 나아간 유권자 그룹이 소수이나마 존재한다. 이들의 분노가 이미 넉넉하게 존재하는 불평등과 정치 불신과 결합할 경우, 탁월한 선동가가 기회를 발견할 수도 있다.

 

 

기자명 천관율 기자 다른기사 보기 yul@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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