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아휴직 후 “잘 쉬었냐” 묻는 사회에서 정치가 할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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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2017.05.03. 오전 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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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기자가 그린 대선여지도] ⑥ 워킹대디

지난해 육아휴직 중 첫째 아이를 업고, 막내를 안고 있는 윤형중 기자의 모습. 글, 사진 윤형중 기자


저는 ‘워킹대드’입니다. 걸어다니는 좀비(walking dead)냐구요? 아니요. 좀비처럼 일하는 아빠(working dad)입니다. 아재개그가 아니라 아빠개그랍니다.

농담을 하긴 했지만, 무척 진지합니다. 워킹대드란 표현이 조금 어색하죠? 어감이 조금 나은 ‘워킹대디’도 ‘워킹맘’에 비해서는 생소할 겁니다. 워킹맘들은 직장에서 일하랴, 집에서 엄마로서의 역할을 하느라 힘들어하죠. 하지만 워킹대디는 아예 ‘워킹’(일)이 ‘대디’(아빠)로서의 정체성을 압도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육아를 하려고 해도 휴직하기 어렵고, 일상화한 과로노동과 부족한 휴식으로 아빠 노릇도 쉽지 않습니다. 아빠가 아기를 돌보느라 칼퇴근하고, 아이가 아프다며 발을 동동 구르다가 조퇴하는 일이 우리에겐 아직은 낯선 장면입니다.

새벽에 자는 아이 뒤로하고 출근
온종일 홍준표 후보 취재 전쟁
늦은 밤 집에 오면 이미 잠든 아이들
칼퇴근하면 달려와 안길 텐데

운 좋게 나는 아빠 육아휴직 했지만
주변에선 “불이익 당하면 어쩌려고…”
실질적인 보장제도 절실


그런데 말이죠. 아빠들이 일터에서 당당하게 워킹대디라고 주장하는 것이 생각보다 중요합니다. 그래야 ‘워킹맘’들이 직장에서 요구하는 것들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지고, 육아로 인해 일터에서 차별받는 일도 줄어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정부는 지난 10년간 저출산 대책에 모두 80조원을 썼다고 합니다. 한국이 초저출산 국가(합계출산율 1.3명 이하)로 접어든 지 올해로 17년째입니다. 작금의 저출산 현상은 정부가 어떤 특단의 대책을 써도 달라지지 않습니다. 올해는 출생아 수가 사상 최저를 기록할 거란 예측이 벌써부터 나오고 있죠.

이번 19대 대선에서 많은 후보들이 여러 공약을 발표하며 일과 삶의 균형과 저출산 극복을 약속했습니다. 대선 후보들을 밀착 취재하는 워킹대디는 삶 속에서 그런 공약들을 어떻게 느끼고 있을까요.

우리 집의 하루는 보통 막내 녀석의 울음소리로 시작합니다. 돌이 갓 지난 아들은 아직도 자는 중에 한번씩 배고파서 깨곤 합니다. 마치 알람시계처럼 오전 5~7시 사이에 울음을 터뜨립니다. 네 살 딸, 두 살 아들과 한방에서 자는 우리 부부는 울음소리가 나면 한 명이 일어나 아기를 안고 거실로 나옵니다. 그렇게 아기를 품에 안고 한 손으로 분유를 탑니다. 적당히 데운 물과 분유를 젖병에 넣고 흔든 뒤 아기 입에 물려주면 그제야 울음을 멈추고 오물거립니다. 배를 채운 아기는 한 두시간을 더 새근새근 자는 편이죠. 그때부터 어른들은 세수하고 아침식사를 준비합니다.

그런데 지난 4월20일은 조금 다르게 시작한 하루였습니다. 새벽에 아기가 울지 않았는데도 눈을 떴습니다. 창밖은 어스름한 하늘에 붉은빛이 감돌았습니다. 조용히 방을 빠져나와 벽시계를 보니 6시가 다 됐습니다. 정치부에서 자유한국당 출입을 하는 저는 이날 아침 7시반에 국회에서 출발해 인천으로 가는 버스를 탈 예정이었습니다. 이 당의 홍준표 대선 후보가 아침에 인천에서 공약을 발표하고, 종일 수도권 지역을 돌며 유세를 다닐 예정이었죠. 늦지 않으려면 30분 안에 나갈 준비를 마쳐야 합니다. 냉수를 한잔 마시고 주변을 둘러보니, 전날 밤늦도록 아기들과 노느라 어질러진 살림살이들이 눈에 띄었습니다. 평소 같으면 장난감 정도는 바구니에 담겠지만, 이날은 여유가 없었습니다. 물잔을 싱크대에 올려놓을 때, 설거지통에 있는 젖병 여섯 개가 눈에 띄었습니다. 젖병을 다 썼네요. 아침에 젖병이 없으면 일어나자마자 배고파 우는 아기를 달래지도 못하고, 설거지부터 해야 합니다. 그러면 아기 우는 소리에 첫째 아이도 깨고, 전쟁 같은 일상이 시작되곤 하죠. 조금 뒤에 어떤 상황이 펼쳐질지 눈앞에 선했지만, 서둘러 나갈 준비를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퇴근 뒤 두 아이를 안고 있는 윤형중 기자의 모습. 글, 사진 윤형중 기자
오전 7시반, 국회 본청에 도착하니 30여명의 기자들이 버스에 이미 탑승해 있습니다. 한 시간쯤 걸려 경인운하 들머리에 자리잡은 인천 경인항 아라타워에 도착했습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 총사업비 2조7천억원을 들여 만든 경인운하는 예상했던 물동량의 10분의 1 정도만 소화하는, 사실상 비어 있는 물길입니다. 아라타워 24층 전망대에서 홍준표 후보는 대통령이 되면 5년간 50조원을 투입해 상하수도관, 가스관, 교량, 도로 등 노후화한 사회인프라를 개선하겠다는 공약을 발표했습니다. 준비한 발표문을 읽고서 홍 후보는 즉각 자리를 떴고, 기자들이 우르르 따라붙었습니다. 24층이라 엘리베이터 앞에서 기다리는 시간이 조금 길었습니다. 이때 제가 물었습니다.

“대표적인 예산 낭비 사례인 경인운하에서 사회간접자본(SOC) 정책을 발표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홍 후보는 “경인운하는 치수사업이었다. 이 주변에 재해가 사라졌다. 실패한 사업이 아니다”라고 반박했습니다. 그사이 엘리베이터가 도착했고, 홍 후보는 먼저 내려갔습니다. 그땐 이 답변이 이날 그의 거의 유일한 답변이 될 줄 몰랐습니다.

오전 10시반, 인천 시내 버스터미널 앞 광장에 도착했습니다. 기자들은 연단 아래에서 홍 후보의 말을 받아적기 위해 땅바닥에 앉아 노트북을 펼쳤습니다. 안보를 위해선 자신을 지지해달라는 요지의 대중연설을 30여분 한 뒤에 차로 5분여 거리에 있는 인천 모래내시장으로 이동했습니다. 그를 따라 이동하는 중에 아내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고 집에 돌아왔다는 아내는 “첫째가 어린이집에 잘 안 가려고 한다. 가는 내내 울먹거렸다”며 불안해했습니다. 아이가 왜 그랬을까, 혹시 어린이집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꼬리에 꼬리를 문 걱정이 이어지다가 이내 끊겼습니다. 번잡한 시장 유세 현장에 도착했고, 황급히 전화를 끊고 홍 후보를 따라나섰습니다.

일행을 실은 버스가 인천을 출발해 평택으로 향했습니다. 문득 아내와 한 통화가 생각났습니다. 아내가 육아에 대한 고민을 제게 쉽게 털어놓을 수 있는 이유는 제가 ‘전업 양육자’를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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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남자 직장인으로서는 드물게 10개월 동안 육아휴직을 마치고서 9개월 전에 복직했습니다. 한겨레신문사는 최근 들어 남성 육아휴직자가 크게 늘었습니다. 최근 3년 동안 육아휴직자 중 남성이 19명, 여성이 20명으로 거의 동수에 이릅니다. 남성이 육아휴직을 하기 비교적 자유로운 분위기이지만, 그래도 가끔 불편한 말들을 접할 때가 있습니다. 복직 후 주로 중년의 남자 선배들은 “잘 쉬었냐”는 말로 첫인사를 건넸습니다. 악의는 아니었겠지만, 무슨 답변을 해야 할지 당황스러울 때가 있었습니다. 아마 본인들이 육아 경험이 부족해 육아휴직을 휴식으로 여긴 건 아닌지 조심스레 짐작해 봅니다.

남성 육아휴직이 활성화되지 않는 근본적인 배경에는 일과 삶의 불균형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장시간 근로가 만연하고, 법적으로 보장된 연·월차 휴가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는 사회에서 한 사람의 육아휴직은 또 다른 사람의 과로노동으로 이어집니다. 따라서 남성 육아휴직이 진정 노동자의 권리로 보장되려면, 근본적으로 충분히 쉬고, 적정 수준으로 일하는 사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도 저는 운 좋은 사람입니다. 이 글을 쓰기 위해 다섯 곳의 다른 언론사 기자들에게 “남성이 육아휴직을 한 사례가 있느냐”는 질문을 던지니, 세 곳에서는 사례가 없고 두 곳만이 “최근에서야 남자 육아휴직자가 나왔다”는 답변이 돌아왔습니다. 대기업에 다니는 한 친구도 “부서에 한 젊은 남성 직원이 육아휴직을 하고 싶다는 발언을 했다가 비웃음을 산 적이 있다. 그 이후로 얘기를 못 꺼내더라”고 말했습니다. 금융권에 있는 다른 친구는 “육아휴직을 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지금 있는 부서로 돌아오지 못하고, 앞으로 승진도 못할 것 같다”고 전했습니다. 통계를 보면 남성 육아휴직자는 급격히 늘고 있습니다. 지난해 육아휴직자는 모두 8만9795명이고, 이 중 남성은 7616명입니다. 10년 전만 해도 전체 육아휴직자가 2만1185명이었고, 남성은 불과 310명이었습니다. 전체 육아휴직자는 4배 이상, 남성은 25배 가까이 증가했죠. 하지만 여전히 역대 최저치인 지난해 출생아 수 40만6300명에 비해서도 육아휴직자는 너무 적은 편입니다.

육아휴직 부모 3개월씩 의무화
심상정 후보 공약 가장 적극적

육아휴직급여 사후지급 폐지
유일하게 안철수 후보만 약속

육아 위해선 근로시간 단축 필수
여러 후보 연월차 의무소진 주장


19대 대선 후보들은 남성의 육아휴직을 실질적으로 보장하겠다며 여러 공약들을 발표했습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효과가 있을 만한 공약은 찾기가 어렵습니다.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후보는 남성 육아휴직자에게 승진과 보직에 있어서 불이익을 주는 기업에 벌칙을 주겠다고 공약했습니다. 이 내용은 이미 현행 ‘남녀고용평등과 일·가정 양립지원에 관한 법률’에 있는데도 잘 지켜지지 않고 있죠. 홍준표 후보는 부모가 모두 육아휴직을 1년씩 사용하면, 부모 중에 한 사람에게 3개월의 휴직을 추가로 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지금도 회사 눈치를 보며 육아휴직을 못 내는 아빠들이 어떻게 3개월을 더 휴직할지 의문입니다. 안철수 국민의당 후보는 근로감독관을 늘려 육아휴직을 막는 사례가 있는지 철저히 감시하겠다고 공약했습니다. 그런데 근로감독관이 위반 사례를 적발하려면 노동자가 일단 육아휴직을 신청해야 합니다. 안 후보의 이 공약은 휴직신청 자체를 꺼리는 상황을 개선하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유승민 바른정당 후보는 육아휴직 기간을 3년으로 늘리는 공약을 내세웠지만, 남성 육아휴직에 대해선 별도 내용이 없습니다. 지난달 26일 티브이 토론에서 심상정 정의당 후보가 “여성이 3년 휴직하고 나면 별로 잘못한 것 없어도 영원히 퇴출된다. 유 후보의 의지는 좋지만, 아빠 엄마가 함께 육아휴직을 해야 한다”고 지적했습니다. 심 후보는 공약에서 부모 모두가 최소 3개월씩 육아휴직을 쓰도록 의무화했습니다. 그는 아빠 육아 활성화에 가장 적극적입니다.

고속도로를 달려 오후 1시에 평택 해군2함대에 도착했습니다. 연평해전 전적비와 천안함 추모비를 찾은 홍 후보는 “국가를 위해 희생한 분들을 확실히 예우하겠다”며 “민주화운동 유공자에 대한 보상이 과도하다. 이를 바로잡겠다”는 내용의 보훈 공약을 발표했습니다. 영내를 둘러보고 해군2함대를 빠져나오니 오후 2시였습니다. 기자들을 태운 버스는 다소 늦은 점심식사를 하기 위해 평택의 한 부대찌개집을 향했습니다. 때늦은 식사지만 느긋하게 먹을 순 없었습니다. 다음 일정은 용인 중앙시장에서 오후 4시반에 있었습니다. 뒤늦게 끼니를 챙기는 일은 휴직 기간에도 잦았습니다. 이상하게도 그때는 아기들의 하루 세끼를 챙기면 금세 하루가 흘러가곤 했습니다. 아기들을 먹이고 씻겨도 저 자신은 먹고 세수할 시간조차 내기가 힘듭니다. 아기들 먹이느라 기력을 다 쏟고, 지친 나머지 아이들이 남긴 것만 먹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그렇게 아기들 돌보고 집안일 하다가 문득 거울을 보면, 머리 떡지고 수염이 거뭇하게 자란데다 눈곱도 안 뗀 이상한 아저씨가 절 쳐다보고 있어 깜짝 놀랄 때가 많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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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육아휴직자는 고용보험기금에서 매달 통상임금의 40%를 50만~100만원 한도로 받습니다. 모든 대선 후보들이 이 육아휴직급여를 인상하겠다고 약속했지만, 홍 후보의 공약이 가장 파격적입니다. 홍 후보는 현재의 지급률(통상임금의 40%)과 상한액(100만원)을 모두 두 배로 올리겠다고 공약했습니다. 오히려 진보 쪽 심상정 후보는 지급률을 통상임금의 60%, 상한액을 150만원으로 공약했습니다. 저는 육아휴직 기간에 한 달에 75만원의 급여를 받았습니다. 월 통상임금이 250만원 이상이라 상한액인 100만원을 받는 대상이었으나, 급여의 25%는 복직 후 6개월 뒤에 일괄지급하는 ‘사후지급제도’ 적용을 받았습니다. 이 사후지급제도는 육아휴직을 이용한 뒤에 회사를 그만두는 일을 방지하기 위한 조처라는데, 육아휴직을 이용하는 노동자 대다수는 오히려 회사로부터 받을 불이익을 우려하는 게 현실입니다. 게다가 비정규직 노동자는 자신의 의사에 반해 회사 쪽이 계약연장을 하지 않아 복직 후 6개월 근무연한을 채우지 못하면 이 사후지급분을 받지 못합니다. 이런 문제를 공약에 반영한 후보는 안철수 후보가 유일합니다. 안 후보는 육아휴직급여 사후지급제도를 폐지하고, 복직 뒤 90일간 해고 금지 규정을 신설하겠다고 공약했습니다.

오후 5시 홍 후보가 용인 중앙시장에서 유세 연설을 마쳤습니다. 이날 오후부터 그가 2005년에 발간한 <나 돌아가고 싶다>라는 자서전에서 돼지발정제로 친구들과 한 여성 강간 모의 내용을 밝힌 게 알려졌습니다. 유세 현장에 홍 후보와 함께 있던 기자로서 이 논란에 대한 입장을 물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매번 질문을 받지 않고 현장을 떠났습니다. 저는 애초 서울로 돌아가는 시간을 고려해 마지막 일정을 건너뛰고 퇴근할 작정이었습니다. 그런데 돼지발정제가 워낙 논란이 커 후보의 마지막 일정이 있는 수원 지동시장으로 이동해 그를 기다렸습니다. 이 일정에는 상인들과의 만남도 예정되어 있었습니다. 현장 기자들은 절대 놓치지 말고 꼭 질문을 하자며 함께 각오를 다졌습니다. 그는 대중연설만 마치고 상인들과의 만남을 전격 취소한 채 황급히 차에 올라탔습니다. 경호원들에게 정신없이 밀리는 와중에도 한 기자가 “후보님, 자서전에 돼지흥분제…”라고 소리쳤지만, 후보는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답변을 받는 데 실패하고서 저를 포함한 기자 세 명은 저녁 7시반께 수원역 근처 식당에 앉았습니다. 식사를 주문하고 나오기 전 시간을 활용해 세 사람은 기사를 작성했습니다. 곧 비빔국수 하나와 잔치국수 두 개를 앞에 두고 서로의 근무여건에 대해 짧은 대화를 나눴습니다. 한 기자는 지난 한 달간 평균 주 6.5일을 근무했고, 하루에 10시간가량 일했습니다. 어림잡아 한 주에 65시간을 일한 셈입니다. 대선 후보들이 제시한 근로시간 주 52시간으로 단축, 돌발노동 방지 등의 공약에 대해 이 기자는 “나뿐 아니라 다른 직종에 있는 친구들의 얘기를 들어봐도 현실성이 없다”고 평가했습니다. 옆에 있던 다른 기자는 “주5일 근무제를 처음 시행했을 때도 지금처럼 현실성이 없었을 거다. 그런 취지에서 (멀리 보면) 후보들의 공약은 의미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기자가 연단 앞 쪽에 주저 앉아 유세 중인 홍준표 자유한국당 후보의 발언을 노트북에 옮겨 적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윤형중 기자


대선 후보들은 2015년 기준 연평균 2113시간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들 중 2위를 달리는 한국의 장시간 근무 상황을 개선하겠다고 공약했습니다. 홍 후보만 빼면 4명의 유력 후보가 모두 한 주에 52시간, 연평균 1800시간대로 근로시간을 단축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유 후보가 제안한 이메일, 메신저 등으로 퇴근 이후에 업무지시를 하면 할증임금을 부과하는 ‘돌발노동 방지법’은 티브이 토론에서 문재인, 안철수, 심상정 후보도 도입을 약속했습니다. 안 후보와 유 후보는 하루에 11시간 이상의 연속 휴식을 보장하겠다고도 밝혔습니다. 그러나 이런 공약을 제도화해도 현실에서는 지키기 어렵습니다. 앞서 언급한 육아휴직의 실질적 보장도 제도와 달리 현실에선 요원합니다. 이날 대화를 나눈 기자들도 야근에 대한 급여인 초과근로수당을 받아본 적이 없습니다. 이런 실태는 언론계뿐 아니라 국내 대부분 산업계에 만연해 있습니다.

서울역에 도착하니 밤 10시입니다. 집에 가려면 아직 한 시간은 더 가야 합니다. 도착해선 까무룩 잠에 들고 눈뜨자마자 출근하는 일상이 반복되겠죠. 대선 국면에선 후보자에게 주말과 휴일이 없듯이 후보를 취재하는 기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중소기업·대형마트·건설현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선거날에도 근무하느라 투표권마저 보장받지 못하곤 했습니다. 쉴 수 있는 세상을 위해 대선 후보들은 어떤 공약들을 발표했을까요. 다행히 후보들도 노동자 휴식을 보장하는 법들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 현실을 조금은 감안한 듯합니다. 이번에 여러 후보들이 주된 휴식 공약으로 내세운 것이 ‘연·월차 의무 소진’입니다. 연·월차를 보장해도 쓰지 않으니, 이젠 휴가 사용을 사실상 강제하겠단 의미입니다. 문재인 후보는 연차휴가의 전체 소진을 의무화하고, 비정규직에게도 한 달에 하루씩 유급휴가를 부여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안철수 후보는 미사용 휴가를 경제적으로 보상하는 것을 막고 다음 해로 휴가를 이월하는 공약을 제시했습니다. 홍준표 후보는 휴식권 관련 공약이 따로 없고, 심상정 후보는 국경일과 공휴일을 유급화해 연간 30일 이상의 유급휴가를 보장하겠다고 공약했습니다.

집에 도착하니 밤 11시였습니다. 아내와 아이들은 이미 곤히 자고 있었습니다. 다행히 젖병은 모두 깨끗이 설거지된 상태였습니다. 가끔 칼퇴근하면, 두 아이는 전속력으로 제게 다가옵니다. 큰아이는 “아빠”라고 부르며 뛰어서, 작은아이는 힘껏 기어서 옵니다. 저는 전속력으로 달려가 누군가를 맞아본 적이 있었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볼 때마다 감동입니다. 아이들이 자기 전에 집에 갈 수 있는, 일과 삶의 균형을 찾는 워킹대디가 당당하게 기를 펴는 세상은 언제쯤 올까요.

윤형중 기자 hjy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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