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낙태죄 손질, 전향적으로 검토할 때다

청와대가 형법상 낙태죄와 관련해 “현행 법제는 모든 법적 책임을 여성에게만 묻고 국가와 남성의 책임은 완전히 빠져 있다”며 “여성의 자기결정권 외에 불법 임신중절 수술 과정에서 여성의 생명권, 건강권 침해 가능성 역시 함께 논의돼야 한다”고 밝혔다. 조국 민정수석은 26일 시민 23만여명의 ‘낙태죄 폐지’ 청원에 대한 동영상 답변에서 “태아의 생명권은 소중한 권리이지만 처벌 강화 위주 정책으로 임신중절 음성화 야기, 불법 시술 양산 및 고비용 시술비 부담, 해외 원정 시술 등의 부작용이 계속 발생하고 있다”며 이같이 말했다. 문재인 정부가 낙태죄 개정 필요성을 제기한 것으로 본다.

현행 형법은 자기 낙태 및 의사 등의 낙태 시술을 불법으로 규정하고 있다. 인공 임신중절은 모자보건법상 ‘강간에 의한 임신’이나 ‘혈족 또는 인척 간 임신’ 등 극히 예외적 사유가 인정될 때만 허용된다. 그러나 법과 현실은 동떨어져 있다. 한국의 낙태 건수는 연간 16만9000건(2010년 기준)으로 추정되는데, 이 중 합법 시술은 6%에 그치고 있다. 낙태죄로 기소돼 재판받는 건수도 연간 10건 안팎에 불과하다. 외려 낙태죄는 여성을 협박하는 수단으로 악용되기도 한다. 지난 5월에는 헤어진 여자친구와 낙태수술 부탁을 들어준 의사를 모두 협박해 돈을 뜯고 고발한 남성이 실형을 선고받았다.

여성의 행복추구권을 침해하고 관련 법 규정도 사문화되다시피 한 낙태죄는 이제 손질이 불가피하다고 본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5개 회원국 중 29개국에서 ‘임신부 요청’이나 ‘사회·경제적 사유’가 있을 경우 낙태를 허용하고 있는 터다. 다만 경계할 것은 기존의 소모적 논쟁에 머물러선 안된다는 점이다. 현행 규정의 유지·폐지, 여성의 자기결정권과 태아의 생명권 등 이분법적 논쟁을 넘어 ‘어떤 낙태인가’를 논의할 때다. 예컨대 임신기간을 12주, 18주, 24주 등으로 나눠 허용 여부를 달리하는 ‘기한규제’는 두 권리의 균형과 조화를 꾀하는 방안이 될 수 있다. 상당수 국가처럼 낙태 시술 전에 의학적·사회적 상담을 제공하고, 일종의 숙려기간을 두는 방안도 보완책으로 검토할 만하다.

낙태죄 손질과 별개로, 당장 정부가 할 일도 적지 않다. 피임 교육·지원 시스템을 강화하고, 비혼모에 대한 사회·경제적 지원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 일부 국가에서 시행 중인 ‘생부 연대책임 제도’ 도입도 적극 검토할 필요가 있다. 여성이 아이를 낳을지, 낳지 않을지를 안전하고 합법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공동체를 만드는 일은 그 공동체에서 태어날 아이들을 위해서도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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