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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희 전 삼성그룹 회장이 10일 서울 서초구 서울고등법원에서 열린 항소심 선고공판에서 원심과 같이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과 벌금 1천100억 원을 선고받은 뒤 법원을 나서고 있다.
 이건희 전 삼성그룹 회장이 10일 서울 서초구 서울고등법원에서 열린 항소심 선고공판에서 원심과 같이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과 벌금 1천100억 원을 선고받은 뒤 법원을 나서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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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희 에버랜드 경영권 불법승계는 무죄"

10일 오후 2시 23분 <연합뉴스> 1보가 떴다. 지난 10년여 동안 에버랜드 전환사채(CB) 편법증여사건을 추적해온 시민단체 활동가들의 얼굴이 하나 둘 떠올랐다. 삼성그룹 이건희 전 회장에서 이재용 전무로 넘어가는 경영권 승계과정에서 불거진 불법행동들을 하나 하나 찾아내고 비판해온 활동이 일순간 물거품이 되는 건가? 

에버랜드 편법증여 항소심 판결 직후 김용철 변호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힘이 빠진 목소리, 몸살 기운마저 겹쳐 상태가 좋지 않다고 했다. 코멘트는 해서 뭐하냐는 핀잔도 날아들었다. 그도 그럴 터. 지난해 10월말 삼성 이건희 일가의 불법행위들을 직접 고발하고 나선 지 1년.

김용철 변호사를 통해 터져 나온 온갖 삼성관련 비리혐의들은 국민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전현직 임원의 차명계좌 관리, 떡값 검사 명단, 회장님 지시사항 문건 폭로, 비자금을 직접 날랐다는 '제2의 김용철', 삼성 돈다발을 받은 이용철 변호사 사건, 중앙일보 계열분리는 위장분리 의혹, 삼성가 여성들의 해외 고가 미술품 구매의혹, 에버랜드 경영권 불법승계 등 일일이 열거하기조차 쉽지 않은 일들이 연발로 터졌다. 2007년 하반기와 2008년 상반기는 삼성 문제로 들끓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터다.

수많은 사건이 터졌고 그래서 특검도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모두 무위에 불과했던 게 아니었냐고 김 변호사는 탄식했다. 오히려 지난 10년간 삼성의 불법 경영권 승계문제를 끈질지게 추적해온 김상조 경제개혁연대 소장 등에게 미안할 뿐이라고 말 높이를 낮췄다. 공연히 나서 긁어 부스럼만 만들었다는 자책이었다.

삼성그룹 비자금 의혹을 제기한 삼성그룹 전 법무팀장 김용철 변호사가 11월 28일 오후 검찰에 참고인 자격으로 출두하고 있다.
 삼성그룹 비자금 의혹을 제기한 삼성그룹 전 법무팀장 김용철 변호사가 11월 28일 오후 검찰에 참고인 자격으로 출두하고 있다.
ⓒ 연합뉴스 배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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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B 헐값 발행했어도 회사 손해 아니면 배임 아니다?

김 변호사가 느끼는 만큼 10일 열린 '에버랜드 경영권 불법승계' 항소심 판결은 충격적이었다. 서울고법 형사1부(부장판사 서기석)는 이날 오후 이건희 전 삼성그룹 회장에 대해 조세포탈 혐의만 일부 유죄로 인정하고 1심과 같은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 벌금 1100억원을 선고했다.

헐값으로 전환사채(CB)를 발행했다고 해도 회사에 손해는 없었기 때문에 에버랜드 경영진이나 그 공범으로 기소된 이 전 회장에게 배임죄를 적용할 수 없다는 게 재판부의 입장이다.

제3자 인수를 염두에 두고 CB를 헐값에 발행해 결과적으로 회사에 970억원의 손해를 끼쳤다는 삼성특검의 주장을 재판부는 전혀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다. 7700원이라는 CB 가격이 당시 에버랜드 적정 주가보다 현저하게 낮은 가격이라도 회사에 손해가 났다고 볼 수 없기 때문에 배임죄를 적용할 수 없다는 판단인 셈.

CB와 BW 발행 과정도 그것이 주주배정이든 제3자 배정방식이든 관계없이 회사에 손해가 없다면 문제가 안 된다며 지난 1심 때 공소시효 소멸로 면소 반결한 삼성SDS 신주인수권부사채(BW) 저가발행 혐의도 무죄 선고했다.

재판부는 이번 사건을 판결하면서 "이 전 회장이 조세회피를 목적으로 지배권을 이전한 사건으로 실정법상 무죄를 선고하지만 사회적으로 비난 가능성은 매우 큰 행위"라며 "사회지도층으로서 국가발전에 헌신해 달라"고 주문했다.

같은 혐의로 기소된 이학수 전 부회장과 김인주 전략기획실 사장에게도 각각 1심과 같은 징역 5년에 집행유예 5년,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이 선고됐다. 두 사람에게 1심에서 각각 740억원의 벌금도 부과됐으나 항소심은 이 대신 320시간의 사회봉사를 명령했다.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은 29일 오전 서울 제기동성당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전 삼성그룹 법무팀장인 김용철 변호사의 삼성비자금 조성에 관한 양심고백 내용을 발표했다.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은 29일 오전 서울 제기동성당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전 삼성그룹 법무팀장인 김용철 변호사의 삼성비자금 조성에 관한 양심고백 내용을 발표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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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법부가 삼성을 위해 법과 원칙을 무시했다"

경제개혁연대와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참여연대는 '시일야방성대곡' 수준의 성명을 냈다. 사법부가 삼성을 위해 법과 원칙을 무시했다는 비판이었다. 이들은 법원이 제3자를 위한 저가발행도 회사에 손해는 없으며 배임이 아니라는 해괴한 논리를 들고 나왔다며 정부정책에 대한 시장불신과 사법정의에 대한 국민 불신이 위기에 닥쳤다고 우려했다.

이들은 "사법정의 위에 군림해온 삼성그룹의 초법적 경제권력의 불법을 묵인하면서 법과 원칙을 무시한 재판부의 판결에 분노와 참담함을 금치 못한다"며 "재판부는 10년에 걸친 삼성그룹 총수일가와 경영진의 범죄행위에 대해 총체적 면죄부를 발부했다"고 비판했다.

경영진의 준법의무와 충실의무를 규정한 대한민국 회사법은 이번 에버랜드 전환사채 편법발행 항소심을 통해 '법전 속 공허한 개념'으로 사문화되었다고 못 박았다.

무엇보다 이들은 이번 재판부가 전환사채(CB)와 신주인수권부사채(BW)의 저가발행이 기존 주주들에게는 지분 희석화를 통한 손해를 발행시켰을 수 있지만, 회사에는 전혀 손해가 없었다고 주장해 그간 회사의 손해를 인정한 대법원 판례도 부정했다고 비판했다.

이들은 "재판부는 삼성이라는 거대 기업집단의 초법적 경제권력 앞에서 이사의 충실의무를 규정한 회사법의 기본원리도 부정했다"며 "이는 단순히 재벌총수 봐주기 차원을 넘어 사법적 규율을 포기한 것으로 유사범죄의 재발과 법질서 교란행위를 방치하게 됐다"고 일갈했다.

삼성이 아무리 우리나라 최대 재벌이라 하더라도, 총수 일가와 경영진 몇 명의 안위와 맞바꿔서야 되겠냐는 안타까운 탄식도 쏟아냈다.

이들은 "오늘 우리는 참담하게 무너지는 심정을 다스릴 수가 없다"며 "기업지배구조의 선진화와 합리적 시장 질서를 위해 공들여온 지난 10년간의 노력 탑이 한순간에 와해됐다"고 서글퍼했다.

정부정책에 대한 시장의 불신과 사법정의에 대한 불신이 오늘의 위기를 불렀고 결국 이 같은 불신이 해소되지 않는 한 민주주의와 경제 질서는 발전하기 어렵다는 인식을 왜 깨닫지 못하는지 답답할 따름이라고 성토했다.

이들은 "금융기관 경영진의 도덕적 해이가 일부 원인이 된 미국 발 경제위기가 세계 전체로 확산되는 요즘 이 항소심 판결은 분노를 넘어 공포스러운 상황을 연상케 한다"고 씁쓸해했다.

조준웅 특별검사가 17일 오후 서울 한남동 삼성특검 기자실에서 최종수사 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조준웅 특별검사가 17일 오후 서울 한남동 삼성특검 기자실에서 최종수사 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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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은 대법원으로, 디케가 울고 갈 것인가

이 사건은 벌써 12년 전으로부터 거슬러 올라간다. 지난 96년 당시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아들 이재용씨 남매가 에버랜드 CB를 헐값에 대량 인수한 뒤 주식으로 교환해 이 회사의 최대주주가 됐다는 게 문제의 발단이었다.

참여연대 경제개혁센터와 민주법학연구회 등의 지속적인 문제제기로 이 사건은 2003년말 검찰이 허태학 박노빈 에버랜드 전·현직 사장을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배임죄로 기소하면서 기나긴 법정싸움이 시작됐다.

1심과 2심 재판부는 당시 이 사건에 대해 각각 형법상 업무상 배임죄와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배임 혐의가 적용돼 유죄가 선고됐었다. 이 사건 현재 대법원에 계류 중인 가운데 김용철 변호사의 2007년 폭로로 지난 4월 다시 이건희 회장이 공범으로 기소됐다. 결국 속전속결로 무죄를 선고받았지만.

이제 대법원이 이 사건을 어떻게 종결할지가 관건이다. 대법원마저 대한민국 최대재벌 삼성 이건희 일가에게 면죄부를 주고 끝낸다면, 오른쪽엔 칼 왼쪽엔 저울을 들고 선 정의의 여신 디케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태그:#삼성 항소심, #김용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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