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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엘리자베스 키스. <민씨가의 규수> 채색 동판 25x38cm 1938년.
ⓒ 이충렬
기품있고 단아한 모습의 여인을 그린 작품입니다. 옥색 저고리와 병풍에서 느껴지는 온화함이, 자주색 옷고름과 조바위 앞에 늘어진 구슬의 강한 색상과 멋진 조화를 이루며 보는 사람의 눈길을 끕니다.

엘리자베스 키스 말년의 완숙미가 돋보이는 이 작품은 예술성이 뛰어날 뿐 아니라, 당시 상류층 여인의 장신구를 살펴볼 수 있는 자료적 가치도 있습니다.

그리고 키스가 이 여인이 누구인지를 밝힐 수 있는 단서를 기록으로 남겨, 우리나라 근대사의 한 부분까지 돌이켜 보게 합니다.

키스는 <옛 한국>에서 이 여인의 아버지가 "일본에 의해 시해된 명성황후의 친척으로, 프랑스에 외교관으로 파견되었던 최초이자 마지막 인물"이라고 기록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 외교통상부 자료에 의하면 최초의 주불공사는 1899년 3월에 최초로 프랑스 대통령에게 신임장을 제출한 이범진이고, 민씨 성을 가진 주불공사는 세 번째 공사 민영찬입니다.

키스는 주인공의 아버지가 영어가 유창하지 못해 프랑스어로 대화 하길 원했고, 그래서 그와 나눈 대화내용을 잘 기억하지 못한다고 했으니, 초대 주불공사 부분은 언어소통이 잘되지 않아 일어난 착오 같습니다.

그림에 담긴 우리나라 근대사

▲ 제3대 주불공사 민영찬.
ⓒ 여흥 민씨 대종중여흥회
민영찬이 3대 주불공사로서 마지막으로 수행했던 외교적 임무는 1905년 12월 7일, '미국의 루트 국무장관에게 1905년 11월 17일 체결한 을사늑약은 일본의 강압으로 조인된 무효'라는 고종의 서신을 전달하고 설명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루트 장관은 민영찬 공사에게 황제의 서신은 비공식 경로를 통해 접수된 것이기 때문에 미국정부는 아무런 행동을 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표면적인 이유이고 진짜 이유는 '일본은 미국에 필리핀의 지배권을 인정하고, 미국은 일본의 한반도에 대한 종주권(suzerainty)을 인정한다'는 1905년 7월 27일의 <가쓰라-태프트> 밀약 때문이었습니다.

을사늑약을 무효화하기 위한 고종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자, 우리나라의 해외 공관들은 페쇄됐고 민영찬도 귀국했으니, 민영찬이 대한제국의 마지막 주불공사라는 부분은 맞습니다.

▲ <민씨가의 규수> 상반신 세부.
ⓒ 이충렬
민영찬의 부친은 대원군의 손아래 처남인 민겸호로 고종의 외삼촌이고, 민영찬의 형은 충정공 민영환입니다. 그런데 고종 역시 어머니와 같은 여흥 민씨를 황후로 맞이합니다.

그리하여 민영환, 영찬 형제는 고종의 외척인 동시에 명성황후의 조카가 되어 왕실과 촌수를 계산하기가 복잡하게 되지만, 가까운 촌수인 명성황후의 조카들로 통칭됩니다.

따라서 그림 속의 주인공은 명성황후의 조카딸이자 민충정공의 조카입니다. 키스는 훗날 이 여인이 결혼해서 딸이 한 명 있을 때 다시 만났는데, 좋은 남편을 만난 것 같아 기뻤다고 회상했습니다.

여흥 민씨 족보에도 민영찬에게 딸이 한 명 있었고, 남편이 서정식이라고 나와있습니다. 그런데 여자의 이름은 족보에 기록되지 않아 그림 속 여인의 본명은 확인이 안 되었습니다.

우리나라 전통문화에 관심이 많았던 키스는 머리 부분의 장신구도 섬세하게 묘사했습니다. 이마와 귀를 가리면서 윗부분은 드러내는 조바위와 그 앞으로 늘어뜨린 산호구슬은 당시 상류층 여인의 화려한 삶의 모습을 잘 보여줍니다.

그런데 키스가 이 그림을 그리면서 가장 그리고 싶었던 부분은 코끝만 살짝 나온 신발이었습니다.

▲ <민씨가의 규수> 신발 세부.
ⓒ 이충렬
"나는 그녀를 고풍스러운 병풍 앞에 세웠고 예쁜 신발을 그리고 싶어서, 비록 실내지만 일부러 신발을 신게 하였다." - <영국화가 엘리자베스의 코리아>(196쪽)

상류층 부녀자가 신던 '운혜(雲鞋)'입니다. 제비의 부리같이 생겨서 '제비 부리신'이라도 불리는 운혜는 겉은 분홍색 비단으로 만들고, 신의 코와 뒤꿈치에 세모꼴의 녹색 비단 혹은 붉은 비단을 바르고, 그 위에 푸른색 구름무늬를 장식합니다.

옆 그림의 신에도 분홍색과 세모꼴의 녹색 부분이 보입니다. 외국인이지만 운혜가 갖고 있는 우아한 멋을 알고 그걸 신게 한 후 자세를 취하게 했으니, 우리나라 문화에 대한 이해가 깊고 화가다운 고집이 대단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키스가 화가의 안목으로 '고풍스럽다'고 칭찬한 병풍에 대해, 우리나라 고미술을 전공한 이원복 국립광주박물관장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 <민씨가의 규수> 병풍 세부.
ⓒ 이충렬
"병풍은 우선 그림 아래위에 옥색을 댄 조선 병풍이 틀림없다. 그림 내용은 <백동자도>라 하여 사내아이들이 노니는 모습을 담은 것이다. 배경의 산수에 대한 비중도 크며 묘사 솜씨로 보아 민화의 범주가 아닌 화원이나 직업 화가가 그린 병풍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림이 연결되지 않는 걸로 보아 병풍을 다 펼치지 않고 중간에 접었거나, 엘리자베스 키스가 그릴 때 중간 부분을 생략한 듯하다. 이 병풍의 그림은 전해지지 않지만 비슷한 <백동자도>는 많이 있다." - 10월 2일 인터뷰에서


키스가 병풍의 가운데 부분을 생략하고 오른쪽 그림을 연결한 이유는 아이들이 노는 모습이 재미있어 그 부분을 포함하고 싶어서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키스가 <백동자도>를 이렇게 모사하듯이 그린 이유는 우리나라 옛그림에도 관심이 많았기 때문인것 같습니다.

<옛 한국>에서 키스의 여동생 엘스펫은 언니와 함께 운양 김윤식의 집을 방문하여 <몽유도원도>로 추정되는 옛 그림을 살펴봤다고 기록했습니다. 이는 키스의 우리나라 옛 그림에 대한 관심을 알려줄 뿐 아니라, 만약 키스가 본 그림이 <몽유도원도>가 맞다면, 1900년 이전에 일본으로 반출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 모호한 유출경위를 보다 구체적으로 밝힐 수 있는 중요한 단서가 될 수 있습니다.

"아버지의 지시에 따라 두 아들이 가보인듯한 그림들을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하나는 길이가 3야드(275 cm)쯤 되었는데 거대 한국의 모습을 파노라마식으로 보여주는 두루마기 그림이었다. 그림의 제목은 <꿈>이라고 했다. 삼백여 년 전에 한 화가가 어느 시인이 꿈에 본 장면을 그렸다는 것이다.

비단 위에 그린 그림은 오래되어서 색갈이 약간 퇴색하였으니 퍽 잘된 그림으로 한국의 옛 모습을 보는 듯 했다. 낭만적인 산수가 겹겹이 연결되어, 보는 이로 하여금 마치 구름 위에 앉아서 눈 아래로 지나가는 산수를 내려다보는 느낌을 주었다 그림 속의 자그마한 노인들 모습은 절묘한 푸른색 노송과 강인한 암석들과 완전한 조화를 이루었다." (번역본 120쪽, 원서 50쪽)


현재 일본 덴리대학교 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있는 <몽유도원도>는 그림의 길이가 106.5 cm 이고, 그림에 붙인 22명의 찬문까지의 길이는 17미터이니, 키스의 동생 엘스펫이 서술한 길이와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현재의 <몽유도원도>는 일본에서 다시 표구되어 둘로 나눠지는 과정을 거쳤고, 키스가 그 그림을 볼 때 두루마기가 너무 길어 찬문의 일부까지만 펼쳤을 수도 있으니, 위의 기록을 단서로, 운양 김윤식이 <몽유도원도>를 소장하고 있었는지에 대한 판단과 일본으로의 유출경위를 미술사학자들이 정확히 밝히면 좋겠습니다.

▲ 엘리지베스 키스. <결혼식 행렬, 서울> 다색목판 26x38cm 1921년.
ⓒ 이충렬
'스케치를 하며 정신없이 신부 행렬을 쫓아가다 물에 빠졌다'는 일화가 있는 작품으로, 당시 청계천변의 풍경을 생생하게 그렸습니다. 그러나 말을 탄 신랑을 위한 일산(日傘)이 보이고 신부가 탄 가마가 있으니, 결혼식 행렬은 아닙니다. 당시 결혼식 날에는 신랑이 혼자 사모관대에 말을 타고 일산을 받으며 신부 집으로 갔기 때문입니다.

신랑이 신부가 탄 가마와 함께 움직이는 것은, 신방을 차린 다음날이나 삼일 후에 신랑집으로 가는 신행이라고 부르기도 하는 우귀(于歸)입니다. 그리고 우귀 때 신부가 혼수를 가져갔으니, 뒤따르는 일행이 갖고 가는 짐보따리가 바로 혼수입니다.

▲ 엘리자베스 키스. <신부> 채색 동판 24x37cm 1938년.
ⓒ 이충렬
소매에 붉은색, 파란색, 노란색 등의 색동과 끝에는 손을 가리도록 흰색의 한삼을 단 '녹원삼'이라고 불리는 서민용 혼례복을 입은 신부의 모습입니다.

녹원삼은 원래 공주, 옹주 궁녀나 사대부 부녀자들이 입었던 예복인데, 일반 서민들도 혼례 때만은 녹원삼을 입되 금박은 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구별하게 하였습니다.

"하루종일 신부는 안방에 앉아서 마치 그림자처럼 눈감은 채 아무 말 없이 모든 칭찬과 품평을 견뎌내야 한다. 신부의 어머니도 손님들 접대하느라고 잔치 음식을 즐길 틈도 없이 지낸다. 반면에 신랑은 다른 별채에서 온종일 친지들과 즐겁게 먹고 마시며 논다." - 앞의 책(110쪽)

이 작품은 영국의 로얄 아카데미 전시회에 출품되어 큰 반향을 일으키며 100장의 에디션이 모두 매진되었으니, 우리나라 신부복과 장신구의 아름다움이 영국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키스는 영국 뿐 아니라 세계 여러나라에서 우리나라 소재 작품으로 전시회를 하였습니다. 1920년 일본을 시작으로 1924년 미국과 런던에서 그리고 1926년에는 파리에서 전시회를 하며 우리나라를 알렸습니다. 1936년에는 우리 동포들이 많이 살고있던 하와이에서는 한국 소재 전작을 소개하여, "고국을 단 한번도 가본 적이 없지만 그래도 한국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변함없이 한복을 입고있는" 동포들의 심금을 울리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활발한 전시활동으로 키스의 한국 소재 작품들은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의 로얄 콜렉션을 비롯해 보자르갤러리, 샌프란시스코 박물관, 하와이 대학, 니콜슨 동양미술관(현 아시아 패시픽 박물관), 오레곤대학 박물관등에 소장되었습니다.

위의 <신부>는 당시 혼례식 때 신부의 장신구를 살펴볼 수 있는 좋은 자료적 가치가 있어, 복식과 장신구 연구가들에게 참고도판으로 인용되기도 합니다.

▲ <신부> 상반신 세부.
ⓒ 이충렬
<신부>에 그려진 장신구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머리 위에 족두리보다 화려한 화관을 썼고, 화관에는 움직일 때마다 떨림이 있어 '떠는 잠'이라고 불리는 보요들이 가지런히 꽂혀있습니다. 화관은 원래 왕가나 양반가에서 혼례를 올릴 때 사용되다가, 정조 12년부터 서민들의 혼례 때도 사용할 수 있게 허용되면서 보편화하였습니다.

쪽진 머리에는 용잠으로 보이는 커다란 비녀를 찔러넣었고, 그 옆에 손으로 만든 꽃, 그리고 쪽 뒤에는 도투락 댕기가 길게 늘어져 있으니, 우리나라 전통 신부 옷과 장신구를 볼 수 있는 작품입니다.

당시 해주결핵요양원에서 의료선교사로 활동하던 셔우드 홀 박사는 이 작품에 대한 뒷얘기를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키스 양은 우리 집에서 손님으로 묵은 적이 있었다. 그때 그녀는 우리 요리사의 딸을 그렸는데 조선 혼인식에서 풍습대로 눈을 아래로 깔고 있는 사랑스런 신부의 모습을 그렸다.

그때 신부 뒤의 배경에 조선 병풍을 그리면 어떻겠느냐고 내가 제안했지만 그녀는 선뜻 받아들이지 않았다.가까스로 그 안이 채택된 일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화가는 자기가 만족하게 생각하여 완성한 그림을 고치라면 쉽게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 셔우드 홀 <닥터 홀의 조선회상>(700쪽), 김동열 옮김, 좋은씨앗 2005년 판


키스가 그린 <신부>를 회상하며 셔우드 홀 박사가 화가의 고집을 걱정한 이유는 키스가 그려준 1940년도 크리스마스 실 도안 그림을 수정해야 하는 일이 발생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키스의 고집

▲ 엘리자베스 키스 왼쪽 <조선의 두 어린이> 다색목판, 가운데 <연날리기> 다색목판, 오른쪽은 키스의 그림으로 만든 1934, 1936, 1940년 크리스마스 실.
ⓒ 이충렬
처음에 언급하였듯이 키스는 해주결핵요양원에서 발행하는 크리스마스 실의 도안 그림을 3번 그려줬습니다. 그런데 위 왼쪽의 <조선의 두 어린이>는 1940년 실의 두 번째 그림입니다. 처음 그림과 실은 일본군의 국방안보 규정을 어겼다는 이유로 인쇄가 끝난 후 압수당하였기 때문입니다.

처음 그림이 일본군의 국방안보 규정을 어긴 부분은 '아이들이 입고 있는 조선옷, 그림 뒤 배경의 산 높이가 20m 이상, 일본 건국 2600 대신 표시한 1940이라는 서기 연대' 3가지였습니다.

"어째서 천진한 아이들이 국방을 위협한다고 생각됐는지 난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 아이들이 일본의 막강한 군대에 무슨 해를 미친단 말인가? (중략) 나는 2600년이라는 일본 연호는 결코 쓰고 싶지 않았다. 그러면서 그들의 감정과 대립되지 않는 대안을 생각해냈다.

실 보급 운동이 시작된 지 9년이 되었다는 의미로 'NINTH YEAR'로 대치하겠다는 내 안은 성공했다. (중략) 나는 가장 외교적인 방법으로 설득했지만 키스 양은 내 예상대로 펄펄 뛰었다. 그녀를 진정시키느라 진땀을 흘렸는데, 다행히 키스 양이 겨우 배경을 수정하기로 결심했다.

수정한 그림도 역시 멋있었다. 색동옷을 입은 소녀와 소년이 예술적인 대문 앞에 서 있는 그림이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먼 산이 대문을 통해 그대로 보였다. 이건 키스 양이 일부러 짓궂게 그렇게 한 것인데도 육군 검열관은 이를 알지 못했다. 이 실이 2차대전까지의, 조선에서 만든 마지막 실이 되었다." - <닥터 홀의 조선회상>(699∼701쪽)


▲ 엘리자베스 키스. <대금 연주자> 22X24cm 채색동판 1927년.
ⓒ 이충렬
위의 글을 볼 때 처음 그림에는 기와 대문 없이 눈 산만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일본군 검열관은 '백의민족을 상징하는 눈 산 아래에서 두 아이가 조선 고유의 한복을 입고 서 있으니, 민족정신을 고취시켜 사회를 혼란에 빠트릴 수 있는 불온한 그림'으로 파악하고, 실과 그림을 압수했던 것 같습니다.

그림을 고쳤지만 흰 산은 그대로 남겨둔 키스. 자신의 책 곳곳에서 일본에 대한 분노와 경멸을 표현했고, 우리 문화를 사랑하는 자신의 심정을 이렇게 나타냈습니다.

"지난 십 수년간, 조선의 탁월한 그림, 도자기, 조각들이 일본으로 밀반출되었다. 나는 일본이 이 귀중한 문화재를 본고장인 한국으로 반환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게 올바른 처사이기 때문이다." - 앞의 책 26쪽

키스는 이렇게 그림과 글을 통하여 일제강점기 시기의 우리의 삶의 모습을 유럽과 미국에 알렸고, 진심으로 우리나라를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키스의 우리나라 소재 작품에서는 우리 민족을 향한 '따뜻한 마음'이 느껴집니다.

그러나 키스는 1936년이후 다시는 우리나라를 방문하지 못하고 1958년 영국에서 생을 마쳤습니다. 키스 사후 미국과 일본에서는 여러번의 전시회가 열렸지만, 정작 그녀가 가장 사랑했던 한국에서는 한번도 전시회가 열리지 않은 '잊혀진 화가'였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전북도립미술관에서 처음으로 전시회를 개최하였으니, 늦었지만 다행한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자리를 빌려 일제강점기 시기에 우리민족을 사랑해준 고 엘리자베스 키스 여사에게 감사와 경의를 표합니다.

덧붙이는 글 | <푸른 눈에 비친 옛 한국-엘리자베스 키스 전>은 현재 전북도립미술관에서 열리고 있습니다. 

전북도립미술관의 위치는 완주군 구이면 모악산 주차장 위쪽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전시기간 : 2006. 9. 29(금) ~ 11. 5(일) <38일간> 
전시장소 : 전북도립미술관 5전시실 (10:00 - 18:00) 
매주 월요일 휴관, 
전화 063)222-0097 www.jbartmuse.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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