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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 3월 18일 미국 CIA는 '한일관계의 미래'라는 제목의 특별보고서를 발간한다. 이 보고서에는 일본기업들이 1961년부터 1965년까지 당시 박정희가 권력을 잡고 있었던, 공화당 총 예산의 2/3인 6600만 달러를 박정희에게 주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1961년은 박정희가 불법군사반란으로 정권을 장악한 해이고, 1963년은 전 대통령 윤보선과 군사반란 주역 박정희가 대통령 선거를 치른 해이다.

선거결과 박정희는 42.6%, 윤보선은 41.2%를 획득했고, 두 후보의 표차는 15만 6026표로 우리나라 대통령 선거사상 가장 근소한 표차로 박정희가 정권을 잡은 것이다. 만약 이때 일본이 박정희에게 막대한 선거자금을 지원해 주지 않았더라면 박정희는 대통령에 당선 되지 않았을 수도 있고 그랬다면 한국현대사는 좀 더 바람직한 방향으로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도 든다.

하여간 1961년 군사반란으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는 정권유지를 위해 천문학적 액수의 불법정치자금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럼 당시 일본은 왜 막대한 박정희의 정치자금을 지원했을까? 일본 입장에서는 친일파 박정희가 한국 대통령이 되는 것이 더 일본의 이익을 추구하는데 유리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한일국교정상화가 1965년 이루어졌으니 결국 박정희 정권은 한일국교수립 이전 일본의 불법정치자금을 토대로 수립된 정권이다. 인간은 정서상 돈을 대주는 사람에게 아무렇게나 대하기가 어렵다. 인간 박정희도, 특별히 일본에 대해서, 예외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래서 돈을 챙기고 굴욕적인 한일협정체결을 서둘렀던 것으로 추정된다.

위 미국 CIA 특별보고서에 의하면 일본정부 사주를 받은 것으로 짐작되는 일본기업들은 박정희가 군사반란을 일으킨 1961년부터 한일협정이 체결된 1965년까지 지속적으로 박정희 공화당에게 정치자금을 제공한 것으로 드러난다. 박정희 삶의 궤적이 증명하듯이 아마도 일본은 박정희가 한국에서 일본 이익을 가장 완벽하게 보장할 친일파 한국인으로 확신했을 것이다.

1965년 한일국교정상화 후 배상금이 아닌 독립축하금 명목으로 일본이 박정희에게 준 일제강점기 35년간 수탈의 대가가 무상차관 3억 달러였다. 그런데 그 3억 달러의 20%가 넘는 6천 6백만 달러의 거액을 일본은 불법정치자금으로 한일협정 체결 이전에 박정희에게 준 것이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일본에서 막대한 돈을 챙긴 박정희가 그 후 한일관계에서 민족주체성이나 당당한 자세를 유지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절망적인 한국 대선"

1963년 윤보선과 박정희의 선거전이 시작되기 일주일 전인 9월 7일 미 국무성과 외국 언론은 한국에서 벌어질 대통령선거에 부정적이고 절망적인 반응을 보였다. 당시 AFP통신은 9월 7일자로 우리나라 대선 분위기를 이렇게 전했다.

"미국의 고위 당국자들은 10월에 있을 한국 대통령선거가 참된 민주주의적인 분위기와 조건에서 실시되기 어려우리라는 생각으로 체념의 빛을 보이게 됐다. 워싱턴 당국은 아직 자유선거가 실시되리라는 '환상'이라도 가져보려고 애쓰고 있으나 박정희씨의 결의 앞에서는 무력하게 보인다. 미 국무성은 한국 군사정부와의 관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손발이 묶여 있다는 인상을 주었다."

일본이 박정희에게 막대한 불법정치자금을 제공했다는 것을 이미 아는 미국 정부 입장에서 윤보선과 박정희의 대선이 참된 민주주의적인 분위기와 조건에서 실시되기 어려우리라는 생각으로 체념의 빛을 보이게 되는 것은 그래서 어쩌면 당연한 결과이었을 것이다.

"윤보선-박정희 대선, 자유선거라고 할 수 없다"

미국 뉴욕타임스도 1963년 9월 7일자 '한국식 자유선거'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윤보선-박정희가 맞붙는 대선을 이렇게 절망적으로 보도했다. 

"한국 국민들이 다음 달 선거에서 자유선택에 의해 투표하도록 허용되리라는 희망은 이제 자민당 후보로 구속 중이었던 송요찬씨와 함께 앰뷸런스에 실려 군 형무소로 가버렸음이 명백하다. 1961년 군사반란을 일으킨 박정희 장군은 야당을 무자비하게 탄압하는 한이 있더라도 한국정부 수반으로 계속 남을 생각임이 분명하다. 설혹 다음 달 선거에서 비밀투표가 허용된다 해도 박정희는 자기 행동에 대한 일체의 공개비판을 허용하지 않고 있다. 유력한 야당 후보를 투옥한 사람들이 모든 선거 기관을 장악하고 있는 한 이 대선을 자유선거라고 할 수 없다. 워싱턴은 월남에서와 마찬가지로 한국을 버릴 수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양심상 거리낌 없이 지지할 수도 없는 상황에 직면해 있다."
http://www.donga.com/docs/magazine/new_donga/200112/nd2001120170.html

뉴욕타임스는 자기에 대한 공개 비판을 조금도 허용하지 않는 권위주의적인 박정희의 태도에 대한 심각한 우려와 함께 미국 정부의 정치적 딜레마를 소개했다. 당시 냉전하 미국에게 조차 "박정희는 버릴 수도 없고 지지할 수도 없는" 골치 아픈 존재였던 것이다.

1급 일본전범에게 훈장 수여해준 박정희

하여간 박정희는 미국정부의 우려와 언론의 신랄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한국 대통령이 되었다. 그리고 자기를 적극 지원해주고 불법정치자금을 지원 해 주었던 일본의 기대에 부응하는 행동도 기꺼이 해주었다.

1976년 박정희는 일본 1급 전범 사사카와 료이치(1899-1995)에게 '수교훈장 광화장'을 수여한다. 사사카와는 젊은 시절 이탈리아 독재자 무솔리니의 숭배자였다. 그래서 사사카와는 1931년 이탈리아 파시스트당을 모방해서 일본에 우익 국수대중당을 만들고 당원에게는 무솔리니와 독일 히틀러의 나치 군대처럼 흑색 국방복을 입게 한다.

당시 23개 지부와 1만 5000명의 당원, 그리고 20대의 자가용 비행기까지 거느린 사사카와는 1932년 국수의용항공대를 설립하고 '1인1기1함 격멸주의'라는 구호를 내걸었다. 이 의용대는 훗날 '가미카제 특공대' 창설에 도움을 준다. 평소에 사사카와는 "조선, 만주, 대만은 일본 식민통치에 의해 생활과 문화수준이 향상되었다"고 공개적으로 일본의 한국강점을 찬양했다. 그러나 1945년 일본 패망 후 사사카와는 'A급 전범'으로 체포되어 3년간 복역한다.

당시 미국의 일본점령군사령부의 한 보고서는 사사카와를 이렇게 평가하고 있다.

"사사카와는 일본의 정치 장래에 잠재적 위험인물이다. 그는 20여 년간에 걸쳐 일본 침략과 군국주의 배후에서 두드러진 활동을 해왔다. 그는 현재 재산가이기는 하지만 부를 축적하기 위해서는 앞으로 수단을 가리지 않을 인물이다."

그리고 이러한 미국의 예측은 정확하게 맞았다. 1948년 출옥한 사사카와는 전쟁 당시 축적해놓았던 마약과 무기거래 자금을 발판으로 1951년 경정사업에 손을 대면서 막대한 부를 축적한다.

1976년 9월23일 경기도 의왕에서 열린 나병연구원 준공식에서 사사카와는 당시 퍼스트 레이를 역할을 하고 있던 박근혜씨를 만나 이런 대화를 나눈다.

사사카와 : 한국에 올 때마다 발전하고 모두가 행복해 보입니다. 그러나 북한에서는 나쁜 생각을 갖고 있어 잘 안 되는 것이지요.

박근혜 : 동양 격언에 순천자는 흥하고 역천자는 망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북한이 하늘의 뜻을 거역하니 잘될 리가 없지요. 공산당도 언젠가는 종말이 올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258963

사사카와에 감동한 박정희는 그로부터 이틀 후인 1976년 9월 25일 그를 청와대로 모셔와 '훈1등 수교훈장 광화장'을 수여하고 그를 융숭히 대접한다. 이해 3월 1일 명동성당에서는 윤보선, 김대중, 문익환, 함석헌, 함세웅, 안병무 등 한국사회 각계 민주인사들이 박정희의 폭압에 맞서 긴급조치 철폐, 민주인사 석방, 언론·출판·집회 자유, 의회정치회복, 사법권독립, 박정희퇴진을 요구하는 선언문을 발표하고 옥고와 수난을 치르던 시기였다. 그런데 일본 1급 전범 사사카와는 청와대에서 국민의 세금으로 만든 훈장을 받고 융숭한 대접을 받는다. 당시 함석헌이 "이 나라가 뉘 나라냐?"고 절규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지 않은가?

사사카와는 더욱이 1988년에는 광주학살범 전두환이 백담사 생활을 할 때 그의 아들 사사카와 요헤이를 백담사에 보내 전두환에게 위로의 말과 친서를 전달하기도 한다. 이것이 "등뼈가 부러진" 우리 현대사다.

우리나라를 국가원수로 대표한다는 박정희는 어떻게 대통령의 신분으로 1급 일본전범에게 훈장을 수여 해 줄 수 있을까? 이래도 박정희가 과연 위대한 민족중흥의 영웅인가?

폭력으로 재산 강탈한 박정희와 물려받은 박근혜

박정희는 1962년 부산 김지태씨가 소유한 부일장학회를 강탈하여 정수장학회를 만들었다. 정수장학회는 현재 문화방송 지분 중 30% 그리고 부산일보 지분 100%를 보유하고 있다. 박근혜씨가 정수장학회 이사장을 역임한 적이 있고, 현재는 그녀 측근 최필립씨가 이사장을 맡고 있다.

정수장학회 모태인 부일장학회의 소유권이 이전되는 과정이 요즘 법률, 정치적으로 문제가 없는 '기업가의 헌납'이냐 '권력의 강탈'이냐 여부에 대한 논란이 한창이다. 부일장학회는 김지태의 재산으로 만들어진 장학회였다. 김지태는 1962년 3월 재산해외도피 혐의 등으로 당시 중앙정보부에 체포돼 두 달 정도 구금생활을 하다 부일장학회와 부산일보, 한국문화방송, 부산문화방송 등의 운영권 포기각서를 쓴 며칠 뒤 공소취하로 풀려났다.

박근혜씨는 여러 번 "부일장학회의 재산 포기는 헌납이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김지태 아들 김영구는 "1961년 5월 25일 부산 군수기지사령부 법무관실에서 아버지가 수갑을 찬 상태로 운영권 포기각서에 서명하고 도장을 찍었다. 내가 장남이라 인감도장을 가지고 가, 현장을 똑똑히 목격했다"고 주장한다. 정수장학회 전신인 5·16 장학회는 김지태가 재산을 강탈당한 후 5일 만에 설립됐다.

참여정부 당시 국정원 과거사건진실규명을 통한발전위원회는 정수장학회에 대한 조사결과를 이렇게 발표했다.

첫째,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의 지시에 의해 수사되었음이 당시 중앙정보부 지부장이었던 박용기씨의 진술에서 확인되었으며,
둘째, 62년 6월 20일 김지태가 구속상태에서 강압에 의해 작성된 기부 승낙서에 서명을 했으나 이마저도 구속 중 기부의 의혹을 지우기 위해 석방 이후인 6월 30일로 변조되었음이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필적감정에 의해 확인되었으며,
셋째,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의 대구사범 동기인 부산일보 주필 황용주의 석방을 빌미로 한 김지태에 대한 재산포기 종용이 사실로 밝혀졌으며,
넷째, 경향신문의 매각과정에서도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을 앞세워 몇 번의 간첩사건을 통해 압력을 행사하였음이 확인되었으며,
다섯째, 일련의 과정 속에 중앙정보부와 [박정희의] 국가재건최고회의를 비롯한 국가 주요기관의 조직적이고 치밀한 계획 하에서 이루어졌음이 국가기관에 의해 최초로 사실규명이 되었다.

정수장학회 돌려주어야

김지태 차남 김영우도 2010년 6월 소송을 제기하였고, 2012년 2월 24일 서울중앙지법에 의해 5·16장학회의 '헌납'과정에서 강압이 있었음이 다시 한 번 입증되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정수장학회의 실제 소유주와 다름없는 박근혜씨에 대한 것이다. 정수장학회는 박정희 동서 조태호와 박근혜, 이후락 중앙정보부장, 진혜숙 청와대 총무비서등 대부분 박정희 지인과 친인척으로 이사장이 임명되어 왔다.

박근혜씨는 정수장학회를 국가헌납 또는 이사진을 교체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 정수장학회와 자신은 관련이 없다고 주장한다. 박근혜씨는 정수장학회는 공익재단이기 때문에 이사진이 곧 주인이며, 이미 사회에 환원된 것이기 때문에 더 이상 환원할 수 없다는 논리를 세운다.

박근혜씨는 정수장학회 문제가 언론의 도마에 오르자 이사장직을 사임했고, 퇴임 이후 이사장은 박정희 의전공보관을 지낸 최필립이 맡고 있다. 최필립은 박근혜씨 사조직 미래연합 운영위원이었고 2007년 대선경선 당시에는 막후에서 박근혜씨를 도운 측근이다. 이런 면을 고려하면 박근혜씨는 대리인을 통해 정수장학회를 운영하고 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정수장학회가 과연 박근혜씨 주장대로 사회에 환원된 것으로 볼 수는 없지 않은가.

더욱이 정수장학회는 1961년 김지태 부산일보 사장에게 한국문화방송(현 MBC)·부산문화방송(현 부산MBC)·부산일보 3개 언론사 지분 100%를 넘겨받았다. 부산일보 지분 100%는 지금도 갖고 있다. MBC 주식 100%는 MBC가 1971년 유상증자를 실시하면서 장학회 지분이 30%로 줄었다. 부산MBC 지분은 1981년 문화방송에 51%를 양도한 후 1985년 나머지 주식 모두를 MBC에 18억 원에 팔면서 지금의 지분 소유구조를 갖게 됐다.

1974년 경향신문이 문화방송에 흡수합병 된 뒤 경향신문은 정동의 새 사옥으로 이주했다. 그러나 1981년 신문·방송 겸영금지를 규정한 언론기본법 발효 이후 문화방송과 경향신문이 각각 분리되는 과정에서 경향신문이 입주한 정동 부지를 정수장학회가 보유하게 됐다. 그리고 현재 경향신문은 매년 임대료를 정수장학회에 지급하고 있다.

박정희는 김지태씨와 그 부인을 아무런 법적 근거도 없이 잡아다 놓고 강제로 재산을 강탈했다. 그리고 그 강탈한 재산을 자기가 가졌다. 문제는 여기에 있다. 법적으로 하자가 있어도 국가기관에 재산이 압류되었다면 나중에 찾을 수 있다. 그러나 국정원 진실위와 사법부에서 부일장학회의 재산이 국가기관에 강제로 헌납되었다고 진실을 규명해도 정수장학회에 넘어간 재산은 찾을 길이 없다. 이것이 정수장학회의 가장 큰 문제다.

결자해지라는 말이 있다. 박근혜씨는 아버지 박정희가 총칼로 빼앗고 자기가 이사장 월급을 받았던 정수장학회를 책임지고 돌려줘야한다. 남의 재산을 총칼로 강탈 한 것은 보수우익도 아니고 자본주의는 더욱 아니며 조폭깡패가 하는 짓이다. 우리역사의 비극은 이러한 조폭깡패를 기념하는 일해공원이나 박정희기념관을 짓고 영웅으로 숭배하는 잘못된 풍조다. 박근혜씨에게 묻는다. 국민 재산을 강탈해서 그것을 가진 사람이 어떻게 국민의 삶을 책임지겠다고 할 수 있는가?

과거사 사과, 말이 아닌 행동으로 보여야

지난 4일 행정안전부는 "장준하 의문사 사건을 재조사 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그 이전인 지난 9월 23일 박근혜씨는 "과거사를 사과한다"며 앞으로 "피해자와 가족들의 아픔과 고통을 치유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하겠다"고 그 입장을 밝힌 바 있다. 박근혜씨는 이제 자기 발언에 책임을 지는 진정성 있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그리고 자신이 말 한 대로 피해자와 가족들의 아픔과 고통을 치유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하겠다는 자세로 이번 행안부 발표에 대해 자신의 입장과 후속조치를 밝혀야한다. 사과는 입술로만 하는 것이 아니고 진심어린 행동이 따라야 한다.

장준하가 어떤 사람인가? 장준하는 박정희가 베트남파병을 추진할 때 베트남파병 강행은 젊은이들의 피를 파는 매국행위이며, 국민적 여론을 다른 곳으로 돌리려는 기만술이라며 지적했다. 또 "우리나라 청년들을 남베트남에 팔아먹고 피를 판돈으로 정권을 유지하고 있다"며 박정희의 베트남 파병을 정면으로 비판했다. 그리고 박정희에 의해 옥고를 치르고 말할 수 없는 모멸과 고초를 당했다. 그러나 그렇게 장준하는 박정희의 베트남 파병을 앞장서서 반대했지만 일단 파병이 결정되자 '빽을 써서' 큰아들을 제일 먼저 베트남으로 보냈다. 남의 아들은 전쟁터에 보내 놓고 자기 아들은 안전하게 둘 수 없다는 심정에서였다. 이렇게 장준하는 공사의 구분이 엄격했다.

박정희는 불법군사반란을 일으켜 권력을 빼앗고 남의 재산을 폭력으로 강탈하여 자기 자녀에게 물려준 독재자다. 박근혜씨는 그런 아버지 박정희의 유산을 이어받은 사람이다. 그런 그녀가 지금 대통령 선거에 나오려고 한다. 공직자의 최고봉인 대통령을 꿈꾸는 박근혜씨는 장준하에게 공사를 구분하는 정신을 배워야 한다. 공사를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은 결코 한 국가를 이끌 대통령이 돼서는 안 되고 될 자격도 없기 때문이다.


태그:#김성수, #박정희, #박근혜, #함석헌,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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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영국통신원, <반헌법열전 편찬위원회> 조사위원, [폭력의 역사], [김성수의 영국 이야기], [조작된 간첩들], [함석헌평전], [함석헌: 자유만큼 사랑한 평화] 저자. 퀘이커교도. <씨알의 소리> 편집위원. 한국투명성기구 사무총장, 진실화해위원회,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투명사회협약실천협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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