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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세계사

레오나르도 다 빈치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거장

[ Leonardo da Vinci음성듣기 ]

출생 - 사망 1452.4.15. ~ 1519.5.2.

1519.4.23 레오나르도 다 빈치, 유서를 작성하다

“우리는 이따금씩 자연이 하늘의 기운을 퍼붓듯, 한 사람에게 엄청난 재능이 내리는 것을 본다. 이처럼 감당 못 할 초자연적인 은총이 한 사람에게 집중 되어서 아름다움과 사랑스러움과 예술적 재능을 고루 갖게 되는 일이 없지 않다. 그런 사람은 하는 일 조차 신성해서 뭇 사람들이 감히 고개를 들 수 없으니 오직 홀로 밝게 드러난다. 또 그가 내는 것들은 신이 손을 내밀어 지은 것과 같아서 도저히 인간의 손으로 만들었다고 보기 어렵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바로 그런 사람이다.”

스승은 어린 레오나르도의 재능에 놀라 붓을 꺾고 조각에만 전념했다

조르조 바사리(Giorgio Vasari)가 극찬한 이 사람. 그는 바로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거장 레오나르도 다 빈치였다. 레오나르도는 1452년 이탈리아의 빈치라는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는 피렌체의 유명한 공증인인 세르 피에르의 아들이었지만 적자가 아닌 사생아였다. 당시 이탈리아는 사생아에 대한 대우가 다른 나라들 보다는 좋은 편이었다. 하지만 귀족 가문의 피를 물려받지 않은 일반 사생아들은 의사도 약사도 될 수 없었고 대학에도 갈 수 없었다. 그래서 레오나르도 역시 선택할 수 있는 직업이 그다지 많지 않았다.

안드레아 델 베로키오의 <그리스도의 세례>.
레오나르도가 천사를 그려 넣었고 스승을 뛰어넘는 솜씨를 보여주었다.

열다섯 살이 되던 해, 레오나르도는 피렌체로 갔다. 그곳에서 아버지 세르 피에르는 어렸을 적부터 데생에 소질을 보이던 아들 레오나르도를 안드레아 델 베로키오라는 화가의 공방에 견습생으로 들여보냈다. 만약 레오나르도가 합법적인 아들이었다면 아버지는 그를 공증인으로 만들었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레오나르도는 자신의 관심사에 따라 의사의 길을 걸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었다. 그와 같은 출신이 할 수 있는 일 중에서 화가는 그나마 나은 직종이었을 것이다.

어린 레오나르도는 다른 견습생들과 마찬가지로 바닥 청소나 잔심부름 같은 허드렛일부터 시작했다. 그러다 붓을 닦고 안료를 빻는 일 등을 하면서 그림 그리는 일을 배웠다. 레오나르도는 열심히 그림 실력을 키워나갔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스승과 함께 그림을 그리게 되었다. 물론 레오나르도가 스승과 동등하게 짝을 이뤄 작업을 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단지 스승이 그리다 만 그림의 귀퉁이에 천사들을 그려 넣었다. 제자의 솜씨는 스승을 놀라게 했다. 전하는 말에 따르면 스승은 나이 어린 제자가 자신보다 그림을 더 잘 그린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고 그날 이후로 더는 그림을 그리지 않고 조각에만 전념했다고 한다. 훗날 레오나르도는 “스승을 능가하지 못하는 제자는 무능하다”라고 말했다.

공방 시절 레오나르도는 스승인 베로키오 말고도 보티첼리를 비롯해 유명한 여러 예술가들을 곁에서 지켜볼 기회가 있었다. 그는 단지 그들을 따라하는 것을 넘어 자신만의 방법을 개발해 나갔다. 나중에 그는 이렇게 주장했다. “예술은 자연의 딸이다. …… 다른 예술가의 방식을 흉내내지 말라. 그렇다면 예술은 자연의 딸이 아니라 자연의 손녀가 되고 말테니까.” 레오나르도는 피렌체 화가 조합에 가입했고, 스무 살이 되던 해인 1472년에는 정식 회원이 되었다. 이제 자신의 공방을 운영할 수 있게 되었지만 그렇게 하지는 않았다. 실력을 더 키우기 위해 스승 베로키오의 조수로 남았다.

이 시절 레오나르도의 그림 실력은 누가 보더라도 최고의 수준이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결점이 있었다. 주문받은 일감을 끝까지 완성시키지 않는 일이 잦았다. 1478년 처음으로 그림 그리는 일을 단독으로 맡았을 때도 밑그림만 겨우 그리고 그만 두었다. 1481년에 주문 받은 제단화인 <동방 박사의 경배> 역시 완성시키지 못했다. 이런 습관은 평생을 따라 다녔다. 그가 그린 것이 분명한 완성작의 수는 아무리 많이 잡아도 스무 점을 넘지 않는다.

1472-1475년경에 제작된<수태고지>.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베로키오 공방에 있을 때 그린 그림으로 추정.
이 당시 최고의 솜씨를 가지고 있었지만 스승의 조수로 남았다.

몇 시간씩 작품을 주시하면서 붓질 한 번 하지 않고 사나흘을 보내기도

서른이 된 레오나르도는 밀라노로 가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밀라노는 피렌체 보다 큰 도시였다. 예술과 과학과 학문이 발달한 곳이었다. 그는 그곳에서 스포르차공작의 전속 화가이자 군사 기술자이자 건축가로 일하며 17년 동안 머물렀다. 이 시절 그는 다양한 분야의 학자들과 교류하며 식물학, 광학, 수력학, 천문학, 해부학 등 온갖 분야에 대한 관심을 키워나갔다. 그는 웬만한 학자들보다 책을 더 많이 가지고 있었다.

한편 레오나르도는 자코모라는 열 살짜리 사내 아이를 집으로 들였다. “소년 두 명 몫의 음식을 먹고, 소년 네 명 몫의 말썽을 일으키는” 이 아이에게 레오나르도는 ‘살라이’라는 별명을 지어 주었다. 살라이는 악마라는 뜻을 지닌 말이었다. 하지만 레오나르도에게 그는 제자이자 조수였으며, 아들 같은 동료였다. 그는 이 아이에게 굉장한 애착을 보였다. 아이는 거의 삼십 년 동안 레오나르도의 곁에 있었다. 밀라노에서 레오나르도는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성당의 식당 벽에 <최후의 만찬>을 그렸다. 성당에는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그가 작업하는 모습을 구경했다. 그 중 한 사람이었던 마테오 반델로는 훗날 이렇게 회상했다. “그는 거기에 새벽부터 왔다가 해가 질 때까지 머물렀다. 잠시도 붓을 놓지 않고 먹는 것도 마시는 것도 잊은 채 쉬지 않고 그림을 그렸다. 그는 팔짱을 끼고 서서 그림을 스스로 검토하고 비판하면서 매일 몇 시간씩 작품을 주시하는데도 불구하고, 때때로 붓질 한 번 하지 않고 이틀이나 사나흘을 보내기도 했다. 또한 나는 그가 …… 그늘에 몸을 가릴 생각도 하지 않고 발판을 기어올라가 붓을 잡고는 두세 번 붓질을 하고 나서 돌아가는 것도 보았다.”

레오나르도는 이 작품을 당시에 일반적으로 쓰이던 프레스코 기법이 아니라 템페라 기법으로 그렸다. 하지만 안료에 달걀을 섞어서 그리는 기법을 택한 것은 그에게나 우리 모두에게나 엄청난 재앙이었다. 이 걸작은 몇 해를 가지 못해 벽화 바닥이 들뜨고 곰팡이가 생기는 등 상태가 나빠졌다. 재료를 잘못 선택한 것이었다. 원래대로 복원하려는 시도가 되풀이되었지만, 그때마다 상황은 더욱 더 나빠지기만 했다. 오늘날 이 그림은 거의 누더기 상태로 남아 있다. 1500년 레오나르도는 밀라노를 떠났다. 밀라노가 프랑스에 함락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피렌체로 갔다. 그곳에서 그는 또 하나의 걸작 <모나리자>를 그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 그림 역시 평생의 습관이 다시 도진 때문인지 완성되지 못했다. 그리고 1517년 프랑스의 국왕 프랑수아 1세의 초청을 받고 이탈리아를 떠나 프랑스에서 말년을 보냈다.

남자와 여자의 시체를 30구 넘게 해부하고 세밀하게 스케치

레오나르도는 미술뿐만 아니라 과학에도 뛰어난 재능을 보인 말 그대로 르네상스적인 인물이었다. 레오나르도는 쪽지 종이에 이런 저런 글과 스케치를 남겼다. 낱장의 그 종이들은 큰 것도 있었고 5-7센티미터 정도로 작은 것들도 있었다. 그는 이 쪽지 종이에 깨알처럼 작은 글씨로 글을 적어 넣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고안해 낸 헬리콥터 장치를 직접 제작해 시험 비행을 하고 있다.

심지어 거울에 비춰보아야만 해독할 수 있도록 좌우를 바꾸어 쓰기도 했다. 왼손잡이였던 그로서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써나가는 것이 더 편했을 수도 있지만, 어쩌면 자신의 생각을 누군가가 가로챌까봐 두려워서 그랬을 수도 있다. 레오나르도가 쪽지 종이에 남긴 글과 그림을 보면 그가 얼마나 천재적인 생각을 지닌 사람이었는지 금방 알아챌 수 있다. 그가 쪽지 종이에 남긴 그림들 중에는 오늘날의 낙하산, 비행기, 전차, 잠수함, 증기기관, 습도계에 해당하는 것들을 볼 수 있다. 그 중에는 당시의 기술로도 충분히 만들 수 있는 것들도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실제로 만들어진 것은 거의 없었다.

쪽지 종이에 그린 자궁 속의 태아(왼쪽) 인체 장기와 혈관 해부도(오른쪽)

레오나르도는 사람과 동물의 해부도를 평생 동안 끊임없이 그렸다. 당시 의학에 종사하던 사람들이 그린 것보다 훨씬 더 세밀하고 훌륭한 그림들이었다. 그는 “화가는 해부학에 무지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레오나르도는 “나이를 가리지 않고 남자와 여자의 시체를 30구 넘게 해부해 보았다.” 시체를 냉동시킬 방법도 방부제도 없던 그 시절, 그는 썩는 냄새를 참아가며 시체 한 구당 적어도 일주일 동안의 시간을 함께 보냈고 장기를 세밀하게 관찰하고 스케치로 남겼다. 어떤 이는 <모나리자>의 저 신비로운 미소는 어쩌면 얼굴 표정과 관계된 안면 근육의 구조를 나타내려다 보니 필연적으로 나올 수밖에 없었던 모양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보기에도 끔찍할 정도로 온몸이 잘리고 피부가 벗겨진 시체들과 밤마다 함께 지낸” 그의 열망을 감안한다면 어쩌면 그럴 수도 있을 것 같다.

천재의 한탄, "나는 내게 주어진 시간을 허비했다"

또한 레오나르도는 채식주의자였다. 부유층들이 기름진 음식과 진수성찬을 즐겨 먹던 그 시절, 그는 샐러드, 과일, 채소, 면 등을 즐겨 먹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쌀과 야채로 걸쭉하게 만든 수프를 좋아했다고 한다. 그는 자신만의 건강관리 규칙을 쪽지 종이에 적어 놓기도 했다. “식탁을 떠나자마자 서 있고, 점심을 먹은 뒤에 바로 잠들지 마라. 술은 절제할 것이며, 자주 마시되 적게 마시고……화장실에 가는 일을 미루지 말라……”

1519년 4월 23일, 레오나르도는 살라이에게 포도밭의 절반을 주겠다는 내용 등이 담긴 유언장을 작성했다. 오랜 세월을 함께 한 이에게 돌아갈 몫으로 보기에는 조금은 보잘 것 없는 것이었다. 그로부터 얼마 후인 5월 2일, 그는 예순 일곱의 나이로 세상을 떴다. 미술사에 길이 남을 걸작, 다양한 분야에 걸쳐 엄청난 분량의 쪽지 종이를 남겼으면서도 “나는 내게 주어진 시간을 허비했다”고 한탄하던 그는 어쩌면 ‘지나치게’ 천재적인 인물의 전형이었을 지도 모른다.

필자가 추천하는 덧붙여 읽으면 좋은 책

다 빈치에 관한 전기나 평전류는 우리말로도 꽤 많이 만날 수 있다. 그 중 가장 부담감 없이 추천할 수 있는 책은 <창조의 수수께끼를 푼 레오나르도 다 빈치> 이다. 이 책의 저자는 많은 컬러 도판과 함께 레오나르도의 삶을 훑으며 그의 주요 작품들에 대한 설명을 쉬운 언어로 다루고 있다. 어린이 책으로 기획된 것이지만 어른이 읽기에도 손색이 없다. (필자가 글 앞부분에 인용한 바사리의 글은 이 책 저자의 번역문을 재인용한 것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삶과 그가 살았던 시대에 관해 더 자세히 알고 싶다면 <르네상스의 거장, 레오나르도 다 빈치> 를 권한다. 그리고 그가 지닌 과학자로서의 면모가 궁금하다면 <레오나르도 다 빈치, 최초의 과학자> 가 도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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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만화로 보는 교과서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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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발행일 : 2009. 04.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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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공처 정보

  • 장석봉 저술가, 번역가

    장석봉 씨는 '인류의 문화를 바꾼 물건 이야기 100'등을 쓴 젊은 저술가다. 나라 안팎의 책을 맹렬하게 읽는 독서가이기도 하다. 특히 과학에 관심이 커서 수 십 권의 책을 번역, 소개했다. 위인들의 일생을 다룬 외국 원서들을 즐겨 읽으며 레오나르도 다빈치, 피카소, 에디슨 등의 평전을 번역,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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