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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홍? 분홍… 분홍!

 (나다니엘 호비 글,조슬린 호비 그림,노은정 옮김,곧은나무,2005.9.1./6200원)

 

 

미국에서는 <Priscilla and the Pink planet>이라는 이름으로 나왔던 그림책 <분홍? 분홍… 분홍!>을 읽습니다. 아이를 무릎에 앉히고 이 그림책을 펼치면, 아이는 제가 아는 뭔가를 손가락으로 짚으며 한 마디씩 합니다. "와, 나비다." "여기도 나비야." 그러다가는 "꼬옷, 꽃, 꼬시야." 합니다. 아이 아빠가 혀가 짧아 '꼬치야'라 말하지 못하는 바람에 아이는 이 소리를 그대로 따라합니다. 이럴 때 아이 엄마가 곁에 있으면 아이 아빠가 또 말을 잘못한다며 나무랍니다.

 

아이는 마당이나 숲이나 산이나 논밭에서 한들거리는 나비를 보면서도 나비인 줄 알아보고, <분홍? 분홍… 분홍!>에 나오는 나비를 보면서도 나비라고 알아봅니다. 들판에서 보는 나비라든지 그림책에서 보는 나비는 다 다릅니다. 생김새가 다르고 크기가 다릅니다. 그렇지만 아이는 모두 나비임을 알아차립니다. 꽃을 볼 때에도 그래요. 노란꽃이든 하얀꽃이든 빨간꽃이든 파란꽃이든 분홍꽃이든 모두 꽃임을 잘 알아보아요. 그러니까 이 땅 이 터전에는 한 가지 빛깔 나비나 꽃만 있지 않음을 압니다. 이 누리 이 나라에는 한 가지 얼굴 사람만 있지 않음 또한 잘 압니다.

 

.. 분홍 사과, 분홍 바나나에 분홍 오렌지! 자전거도 분홍, 구두 밑창의 고무도 분홍! 분홍 강물, 분홍 물고기, 분홍 유리, 그리고 분홍 하늘! 아무리 눈을 씻고 봐도 전부 분홍이에요. 빛깔 중에 분홍이 최고라는 사람도 있지요. 하지만 꼬마 아가씨 프리실라는 분홍이 지겨웠어요. 이제 분홍빛 죽은 단 한 숟가락도 먹고 싶지 않았어요. 온통 분홍뿐인 물건들도 더 이상 보기 싫어져서 창고에 넣어 버렸답니다 ..  (5∼6쪽)

 

온통 분홍빛이기만 별나라에서 살아가는 프리실라는 어디에서나 무엇에서나 분홍이기만 한 모습이 싫습니다. 보기 싫고 견디기 싫으며 살아내기 힘듭니다. 이리하여 프리실라는 먼 길을 떠나기로 해요. "세상 어딘가에 꼭 하나는 있을지도 모르는 다른 빛깔을 찾아 힘차게 길을 떠(7쪽)"납니다. 어머니한테 말을 않고, 아버지한테 말을 않으며, 다른 살붙이나 동무나 선생님이나 어른한테까지 말을 하지 않고 홀로 꿋꿋하게 길을 나섭니다.

 

어쩌면, 둘레 다른 사람들은 '분홍이기만 한 삶은 좋은데, 왜?' 하면서 하나도 질려 하지 않을 뿐더러 싫어하지 않기 때문인지 모릅니다. 모두들 '분홍이면 분홍이지, 뭘 어쩌라고?' 하는 마음이라 프리실라로서는 마음을 활짝 열고 이야기를 나눌 동무가 없어서인지 몰라요. '분홍이든 까망이든 무슨 대수람? 바빠 죽겠는데 그런 데까지 어떻게 마음을 쓰나?' 하니까 아예 아무하고도 말을 못 섞고 말아, 홀로 길을 나서기로 했는지 모르지요.

 

혼자 길을 떠나는 프리실라는 외로워 보이지 않습니다. 허전해 보인다거나 힘들어 보이지조차 않아요. 프리실라로서는 새로운 삶을 찾고 싶거든요. 무엇이든 똑같은 틀에 맞추어 버리는 삶을 벗어던지고 싶거든요. 홀가분하고 싶으며, 꿈꾸고 싶은 프리실라입니다. 기쁘고 싶으며, 아름답고 싶은 프리실라예요. 틀에 박힌 삶에서는 스스로 즐거울 수 없으며 아름다울 수 없음을 느낀 프리실라입니다. '틀에 안 박힌 삶이 얼마나 아름다울는'지는 아직 모르지만, 정작 '틀에 안 박힌 삶을 찾아내기는 했는데 조금도 아름답지 않아 슬플는'지 모르지만, 이러거나 저러거나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하나부터 열까지 숨을 쉬지 못하도록 옥죄는 갑갑한 틀을 떨치고픈 프리실라입니다.

 

.. "절대로 안 돼!" 여왕은 부르르 화를 냈습니다. "아무리 예쁘게 봐 주려고 해도 그 나비는 너무 꼴사나워! 저렇게 알록달록하다니, 우아하지 못해! 뭐니뭐니 해도 분홍이 제일이야. 그래서 내가 이 별에 분홍 마법을 걸었지." ..  (21쪽)

 

지난밤, 내내 잠을 못 이루며, 또는 자꾸 잠에서 깨며 아빠 또한 잠을 못 자게 하던 아이가 오늘 아침 일찍 일어납니다. 아빠는 졸음이 가득한 몸으로 겨우겨우 아침 일을 붙잡으려 하는데, 아이는 벌써부터 아빠를 붙잡고 놀자 합니다. 아이를 무릎에 앉혀 그림책을 펼쳐 놓다가는 홍초를 따순 물에 타서 먹입니다. 달짝지근한 물을 마시니 아이가 몹시 조용합니다. 더 어릴 때에는 당근을 갈아서 주면 아주 조용하게 먹기만 했는데. 한 달 두 달 한 살 두 달 나이를 먹어 가며 이 아이는 이 아이 나름대로 좋아하는 길을 따라 무럭무럭 자라겠지요. 우리 집 아이는 우리 집에서 이렇게 살아내며 스스로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무언가를 가슴에 담는다면, 다른 집 아이는 다른 집에서 다르게 살아가며 저 깜냥껏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무언가를 마음에 두겠지요.

 

둘레에서 아이를 키우는 분들 이야기를 들어 보면, 우리 집 아이만 한 아이들을 꽤 일찍부터 어린이집에 보냅니다. 아니, 첫돌조차 안 지난 갓난쟁이를 어린이집에 맡기는 분이 무척 많습니다. 우리 집에서는 엄마랑 아빠가 늘 집에서 아이랑 붙어 지내며 똥기저귀 빨고 오줌기저귀 갈며, 똥오줌 가리기를 시키려고 아침에 깨어나서 저녁에 잠들 때까지 기저귀를 채우지 않으며 지냈습니다. 첫돌이 지난 뒤부터 이렇게 하자니 그야말로 집안은 똥투성이에 지린내범벅이 되더군요. 그러나 이렇게 했기에 어버이는 손이 많이 가며 고단하지만, 아이는 즐겁고 튼튼히 기저귀를 (낮에는) 뗍니다. 스스로 오줌과 똥을 가려요.

 

어린이집(또는 보육원)이라는 곳은 아이를 맡아 무언가를 가르치는 곳이라 합니다. 아마 영어도 가르치고 놀이도 가르치며 뭣도 뭣도 보여줄 테지요. 아빠랑 엄마 둘이 바깥일을 하며 '뜻과 꿈을 이루려' 하는 집이라든지 '돈을 많이 벌어야' 할 집에서는 마땅히 어린이집에 아이를 맡길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엄마도 바쁘고 아빠도 바쁜 집에서는 당신들이 아이한테 사랑을 물려주지 못하거든요. 어린이한테는 무엇보다 사랑을 먹이고 사랑을 가르치며 사랑을 물려주어야 합니다. 똥오줌 가리기를 비롯해 말 배우기나 물건 다루기 모두 사랑으로 받아들이는 몸가짐입니다. 지식이 아닌 사랑으로.

 

지난날 한 집안 식구가 꽤 많아, 집이 곧 어린이집이라 할 만하던 때에는 아주 마땅히 아이들을 어떤 시설에 넣는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면 유치원이든 초등학교이든 굳이 보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초등학교(국민학교/소학교)가 생긴 지는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거든요. 기껏 백 해쯤 된 일인데, 백 해쯤 되었다 해도 그무렵부터 학교에 아이를 넣은 집은 아주 드뭅니다. 왜냐하면 아이한테 무엇인가 가르치면서 튼튼하고 씩씩한 한 사람으로 서도록 하는 몫은 '다른 사람 손'이 아닌 '내 손'이나 '내 살붙이 손'이었으니까요. 저마다 다른 살림집에서 저마다 다른 살림살이에 따라 저마다 다른 삶으로 아이들한테 새 삶결을 불어넣었어요.

 

.. 프리실라는 초록 나무를 보고서 입이 딱 벌어졌어요. 정말 예뻤거든요. 보랏빛 꽃을 보고는 하도 기뻐서 다리까지 후들거렸답니다. 눈부시게 밝은 노란 해님! 파란 하늘! "어쩜! 세상이 정말 새롭게 보여!" 프리실라가 외쳤어요 ..  (26∼27쪽)

 

프리실라는 분홍이 아닌 다른 빛깔을 찾으려고 길을 나서며 '도시 아닌 자연'에서 수많은 빛깔을 마주합니다. 프리실라는 제 손으로 제 빛을 찾았어요. 책을 읽다가 퍼뜩 궁금합니다. 프리실라가 자연이 아닌 도시에서 다른 빛깔을 찾으려 했다면? 프리실라가 도시에서 다른 빛깔을 찾았다면?

 

오늘날 사람들 거의 모두 도시에서 살아가거나 도시에 몸을 기대어 살아갑니다. 시골이라 하더라도 참말 시골인 곳은 드뭅니다. 시골 읍내나 면내는 도시 모습을 닮아 가고, 작은 도시이든 큰 도시이든 '남다른 빛깔'을 찾아볼 수 없어요. 서울이 서울답거나 부산이 부산답거나 광주가 광주답지 않습니다. 모두 한 가지 빛깔로 물들어 갑니다. 어디이든 한 가지 빛깔에 갇히고 맙니다.

 

자전거를 즐긴다는 사람들이 다 다른 모습과 다 다른 빠르기로 다 다른 삶결에 따라 자전거를 즐기는 모습을 찾아보기 힘듭니다. 책을 즐긴다는 사람들이 다 다른 넋과 다 다른 슬기로 다 다른 사랑에 따라 다 다른 책을 즐기는 모습을 마주하기 어렵습니다. 다 다른 사람들이 다 다른 길을 찾아 다 다른 일거리를 빛내거나 다 다른 대학교를 다닌다든지 다 다른 삶결에 걸맞게 대학교나 고등학교나 중학교나 초등학교를 처음부터 안 다니면서 스스로 아름다이 살아가는 모습을 만날 수 없이 됩니다.

 

하늘에 높이 떠서 우리를 따뜻하게 어루만지는 해님이 얼마나 아름다이 노란빛인가를 깨달을 요즈음 사람은 얼마나 될까요. 나뭇가지가 어떤 빛깔이요 나뭇잎은 어떤 빛깔인지 가만히 들여다보며 고운 내음을 맡는 사람은 얼마나 있을까요. 가을녘 골목동네나 시골 고샅에서 씩씩하게 자라난 맨드라미를 보며 어여쁘다 느끼는 사람은 얼마나 되나요.

 

나한테 느끼려는 가슴이 있다면 "기뻐서 다리까지 후들거"릴 만큼 내 둘레 아름다운 삶을 얼싸안을 수 있습니다. 나한테 사랑스레 살아가고픈 빛줄기 하나 마음밭에 비추고 있다면, '진달래빛만 있는' 누리가 아닌 '진달래빛이 함께 있는' 누리가 그야말로 즐거우며 밝고 좋은 누리임을 알아채겠지요. 진달래빛이 함께 있어 참으로 아리따우며 신나는구나 하고 방실방실 웃으며 반기겠지요.

덧붙이는 글 | - 글쓴이 누리집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cafe.naver.com/hboo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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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는 다음과 같은 책을 써냈습니다.
<사랑하는 글쓰기>(호미,2010)
<어른이 되고 싶습니다>(양철북,2010)
<골목빛, 골목동네에 피어난 꽃>(호미,2010)
<사진책과 함께 살기>(포토넷,2010)
<생각하는 글쓰기>(호미,2009)
<책 홀림길에서>(텍스트,2009)
<자전거와 함께 살기>(달팽이,2009)
<헌책방에서 보낸 1년>(그물코,2006)
<모든 책은 헌책이다>(그물코,2004)
<우리 말과 헌책방 (1)∼(10)>(그물코,2007∼2010)


분홍? 분홍... 분홍! - 창작 이야기

나다니엘 호비 지음, 조슬린 호비 그림, 노은정 옮김, 곧은나무(삼성출판사)(2006)


태그:#그림책, #그림읽기, #책읽기, #삶읽기, #어린이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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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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