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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강간의 왕국'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기고] 성폭력, 판사와 검사가 문제다

안산에서 발생한 아동 성폭행 사건으로 성범죄 처벌에 대한 의견이 오가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은 '중간에 감형되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특별히 언급했고, 한나라당 의원들은 이참에 형법에 규정된 유기징역의 상한을 높이거나 그 제한을 없애는 방향으로 법을 개정하자고 목소리를 높인다. 심지어 야당 의원 사이에서도 이른바 '전자발찌'의 착용 기간을 늘리자고 주장하거나, 혹은 화학적 거세 등의 방안을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가 없지 않다.

그런 논의가 한창이던 10월 5일, 대구지방법원은 13세 친딸을 성폭행한 혐의로 기소된 최모 씨에게 징역 3년을 선고하고, 그와 함께 성추행에 가담한 큰아버지 최모 씨에게는 징역 2년 6개월에 집행유예 4년, 사촌오빠 최모 씨에게는 징역 1년 6개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했다.

핵심적인 요소만 추려보자. 친딸 성폭행. 아버지는 징역 3년, 큰아버지와 사촌오빠는 집행유예. 성폭력범죄의 처벌 및 피해자보호등에 관한 법률(이하 성특법)을 보면, 4촌 이내의 혈족 혹은 2촌 이내의 인척 간의 관계에 있는 자가 강간의 죄를 범했을 시에는 최소 징역 5년, 강제추행의 죄를 범했을 시에는 최소 3년을 선고하도록 되어 있다.

법률만을 놓고 따져본다면, 친딸을 성폭행한 아버지에게 선고된 형량은 법으로 정해진 형량의 최소치에 불과하다. 피해자에게 큰 정서적 충격을 안겨줄 수밖에 없는 친족 간의 성폭행을 가중처벌하기 위해 규정된 형량은 이 시점에서 아무 의미를 갖지 못한다. 집행유예를 선고한 이유는 한층 더 가관이다. 언론 보도를 보면, 재판부는 "아버지와 큰아버지는 피해자에 대해 공소시효가 지나 기소되지 않은 성폭력도 저지른 것으로 보여 엄벌이 마땅하지만 초범이고 잘못을 반성하는 점 등을 감안"하여 낮은 형량을 선고하였다고 한다.

어린이가 집에서 가족들에게 성폭행을 당했다. 법원은 집행유예로 가해자들을 집으로 돌려보내준다. '초범'이니까. '잘못을 반성'하니까. 과연 그 사촌오빠와 큰아버지가 집에 돌아와서도 '반성'하고 있을까? 피해자의 입장에서 보자면 이보다 더 끔찍한 악몽을 상상하기란 불가능할 지경이다.

뭔가 심각하게 잘못되어 있다는 생각이 든다. 대체 어째서 한국의 사법부는 이토록 성범죄에 대해 관대할 수 있을까? 이른바 '조두순 사건'에 대해 분노하는 시민들은 '그 XX는 12년 징역이지만 OO이는 평생이 감옥이다' 같은 표현을 즐겨 사용한다. 이 사건도 마찬가지 아닌가? 성폭행의 충격, 특히 친족 간에 벌어진 성폭행의 충격은 평생토록 지워지지 않는다. 그런데 왜 판사와 검사들은 징역 3년에, 집행유예에 만족하는가? 왜 시민들은 이런 사건에 대해서는 그 사건에 대해서처럼 공분하지 않는가?

▲ 판사, 검사는 성범죄자에게 왜 이렇게 너그러운가? 그 이유를 파헤치는 것이야말로 성범죄 처벌을 둘러싼 토론의 핵심이 되어야 한다. ⓒ뉴시스

안타깝게도 시민들로서는 그 이유를 있는 그대로 알 수 없다. 시민들의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 기자가 질문을 하면 '판사는 판결문으로 말할 뿐이다'라고 엄숙히 대답하지만, 정작 그 판결문은 국민들에게 제대로 공개되어 있지 않다. 법적인 판단의 구조를 알 수 있는 방법이 차단되어 있다보니, 시민들은 무턱대고 양형을 높이면 성범죄가 예방될 것이라는 불안감에 휩싸여 흥분하는 경향을 보인다.

하지만 앞서 인용한 10월 5일 판결을 보면 알 수 있다시피, 사법부는 높은 형량을 선고할 수 있는 성범죄에 대해서도 '선처'를 배푸는 일에 익숙해져 있다. 성폭력 피해자가 어렵사리 주변인들에게 도움을 청할 때 '신고해 봐야 너만 손해'라는 식의 답변이 돌아오는 것도 그런 면에서 놀랄 일이 아니다. TV에 방영될 정도의 끔찍한 강간상해가 아닌 다음에야, 적당히 낮은 형량을 받거나 때로는 집행유예로 풀려날 테니까. 심지어 자신의 친딸을, 조카딸을, 사촌동생을 성폭행했더라도.

'강간의 왕국'은 바로 이렇게 만들어진다. 법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형량이 모자라서도 아니다. 한국의 성범죄에 대한 형량을 더 높이는 것은 법적으로 불가능하다. 이미 올라갈 수 있는 한도까지 올려놓았기 때문이다. 강간살해는 무기징역 혹은 사형이다. 이보다 더 높은 형량이 규정된 범죄를 찾기란 쉽지 않다. 이른바 '조두순 사건'에 적용되는 강간치상의 경우에도 무기징역 혹은 5년 이상의 징역형에 처하도록 되어 있다. 유기징역의 상한선이 15년인 것을 감안해본다면 결코 '객관적'인 형량이 낮다고 볼 수는 없는 것이다.

문제는 사법부가 어떤 칼을 쥐고 있느냐가 아니다. 그 칼자루를 쥔 사법부가 '성범죄'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느냐가 진정한 관건이다. 입법자는 친족 간의 성범죄에 대해 더 단호한 처벌 의지를 보이기 위해 징역형의 하한선을 높였다. 그러나 법원은 집행유예를 선고한다. 집행유예를 선고받은 가해자가 '가정'의 품에 돌아와 같은 범죄를 또 저지르지 않을 것이라고 보장할 수 있는가?

적지 않은 이들은 이번 사건을 놓고 전자발찌 감시를 강화해야 한다는 데에만 목소리를 높인다. 하지만 이미 한국의 사법 시스템은 숱한 성범죄자들을 솜방망이 처벌하거나 아예 풀어주는 일에 익숙해져 있다. 왜냐고? '순간의 욕정을 참지 못해' 저지른 범죄에 대해 '깊이 반성'하고 있으니까. 대체 이런 경우 정부는, 또 법원은 성폭력 피해자의 구제를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가?

TV에 방영된 끔찍한 사례에만 분노하고 주의를 기울이는 동안, 한국의 사법 체계는 성범죄에 대해 말 그대로 '줄줄 새고' 있다. 성범죄 피해자는 경찰서에서 조사를 받을 때부터 불리한 입장에 선다. 법정에 서더라도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이게 과연 형법에 규정된 형량이 부족해서 생기는 문제일까? 이미 형량은 더 높아질 수 없을 만큼 높아져 있다.

문제는 그 칼자루를 쥐고 있는 자들에게, 아래로부터 위까지 성범죄를 싹 훑어내야겠다는 단호한 의지가 있느냐, 또한 성폭력 피해자들의 고통을 절감하고 그들을 구제하기 위한 방안을 마련해야겠다는 결의가 있느냐 없느냐일 것이다.

우리는 대통령이 '못생긴 마사지걸이 더 서비스가 좋다'고 말해도 큰 탈 없이 지나갈 수 있는 그런 나라에 살고 있다. 행정부와 사법부 등 이른바 '사회 지도층'의 성문제에 대한 의식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성폭력 피해자들의 인권을 위해 힘써야 할 여성부와 인권위는, 각각 완전 문외한들이 낙하산 인사를 통해 발령되고 예산이 축소되는 과정을 통해 이빨 빠진 호랑이가 되어가고 있다. 이러한 본질적인 문제를 도외시한 채 오늘도 정치권에서는 전자발찌를 평생 채우네 마네, 화학적 거세를 하네 마네를 놓고 다투고 있는 형국이다.

성폭력과 관련하여 사법부의 판결에 국민들의 법 감정이 술렁이는 이유는 양자 사이에 소통이 부재하기 때문이다. 특정 판결에 대한 국민들의 반응이 좋지 않을 때에도 사법부는 입을 굳게 다물어버린다.

그 결과 현재 벌어지고 있는 논의들은 법치주의의, 혹은 인권의 기본적인 내용들을 거리낌없이 침해하는 포퓰리즘적 수준에 머무르는 경우가 태반이다. 신체에 손상을 가하는 처벌은 원칙적으로, 복구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최대한 절제되어야 마땅하다. 범죄를 예방할 목적이라면 아예 조선시대처럼 이마에 '강간범'이라고 문신을 새기는 것은 어떨까? 웃을 수만은 없는 것이, 정치권에 이런 농담을 진지하게 받아들일 사람이 없다고 장담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형량을 높이고 심신장애로 인한 처벌 감경 조항을 없앤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게 아니다. 중요한 것은 현재 존재하는 법률과 제도를 과연 법원과 검찰이 어떻게 활용하고 있느냐이다. 문제는 국민들이 바로 그 점에 대해 물어보고 대답을 들을 수 있는 방안이 사실상 전무하다는 데 있다.

성범죄 및 사법부에 대한 불신을 해결하기 위해 기왕 특단의 대책을 마련할 요량이라면, 차라리 '사법 청문회'를 열어보는 게 어떨까 싶다. 국회의원 절반 혹은 3분의 1의 발의와 제청을 통해 몇몇 사건에 대한 사법 관계자들의 진술을 듣고 질의를 하는 시간을 가져보자는 것이다. 진행 중인 판결에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확정 판결이 난 사건으로 대상을 한정한다면 본래의 목적에서 이탈할 우려를 조금이나마 불식시킬 수 있다.

'조두순 사건'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가장 큰 교훈은 바로 그것이다. 성범죄에 대한 사법부의 인식과 국민의 인식에는 큰 괴리가 있다는 것 말이다. 대체 왜 한국의 사법제도는 이렇게 성범죄 가해자들에게 너그러운가? 왜 이렇게 집행유예가 남용되는가? 성범죄의 근절을 위해 사법부가 제시할 수 있는 해법은 무엇인가? 일각에서 제기하는대로, 성범죄자들이 음주로 인한 심신장애를 빌미로 턱없이 감경을 요구하는 사례가 과연 빈번한가? 그에 대해 사법부는 어떻게 대처하는가?

정치권에서 목소리를 드높이는 사이, 정작 '조두순 사건'의 피해자들은 대중들의 관심을 피해 숨어버렸다. 그 누구도 그들의 진정한 바램을, 혹은 궁금증을 해결해주지는 못하고 있는 형국이다. 정치인들이 정말 이 사건에 대해, 성범죄의 예방과 처벌에 대해 관심이 있다면, 이제는 방향을 달리 잡아야 할 때이다. 판사들에게 속 시원하게 물어나 보자는 말이다.

이보세요, 판사님. 대체 왜 그런 판결이 나오는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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