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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대폰·트위터…넘치는 말, 외로운 나!

[철학자의 서재] 막스 피카르트의 <침묵의 세계>

말의 범람 속의 소통의 부재

손 안의 휴대전화는 침묵할 때도 말의 세계로 연결한다. 핸드폰, 이메일, 트위터, 온통 말 천지다. 매체는 말에 속도를 붙여 직접 만나지 않아도 빨리 수많은 말을 주고받게 한다. 인터넷 강의를 생각하면 늘 말하고 있는 것 같은 착각도 든다. 이메일에는 즉각 답해야 하고 여력이 없으면 차라리 열어보지 않는 게 상책이다.

그러면 무엇하는가. 내내 말에 둘러싸여 있지만 어떤 말을 하고 있는지 성찰할 여유가 없다. 말을 하기 전의 긴장이나 숙고, 때로 설렘은 끼어들 자리가 없다. 말을 듣는 상대의 기분이나 처지에 관심을 갖지 못하고 말할 때도 많다. 이러한 즉각적이고 자신만을 향한 말은 독백이 되고 결국 서로를 괴롭게 하거나 외롭게 한다.

소통을 가르치는 강좌와 책이 쏟아져 나오지만 다분히 기능적이고 전략적 화법에 치우쳐 있다. 이러한 상황에 막스 피카르트의 <침묵의 세계>(최승자 옮김, 까치 펴냄)는 말에 대한 다른 접근을 시도한다. 말이 아닌 침묵, 말을 위한 침묵에 대해 이야기한다. 오늘날 무엇보다 무용한 것으로 치부되는 침묵의 가치를 되찾으려 한다.

잡음어에 가려진 참된 말

▲ <침묵의 세계>(막스 피카르트 지음, 최승자 옮김, 까치 펴냄). ⓒ까치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에서 현대인의 공담(空談)을 비판했다. 공담은 자신의 말과 글이 아닌 평균적인 세인(世人)의 말과 글, 즉 의미가 비어있는 말이다. 공담은 근거 지을 수 없는 피상성, 일시적이고 즉흥적인 호기심, 결단이 결여된 애매함을 특징으로 한다. 하이데거가 현대인의 비본래적인 말을 분석한다면, 피카르트는 그러한 비본래적인 말의 현상학을 보여주면서 침묵에 주목하도록 유도한다.

"오늘날 말은 더 이상 침묵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다른 한 말로부터 다른 말의 잡음으로부터 나오고 있다. 반면 침묵으로부터 나오는 말은 침묵으로부터 말 속으로 나아가고 다시 침묵 속으로 되돌아가서 침묵으로부터 새로운 말로 그리고 거기서 다시 침묵 속으로 되돌아간다."

'침묵으로부터 나오는 말'과 '말에서 나오는 말'은 어떻게 다른가? 피카르트는 '침묵으로부터 나오는 말'은 참된 말이고 '말에서 나오는 말'은 잡음어라 규정한다. 잡음어란 "소리없는 공허를 덮어버리는 소리나는 공허"로 소음과 달리 침묵과 대치해 있지 않고 침묵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감추는 말이다. 이는 "인간의 말이 아닌 죽은 말들의 세계에서 튀어나온 망령들"로 자신이 소멸되리라는 불안을 피하려고 끊임없이 피해 다니는 말, 자신의 불확실함을 피하려고 퍼뜨리는 말, 개개의 사건들이 구별되지 않게 똑같이 만들어버리는 말이다.

피카르트는 잡음어를 생산하는 주된 매체로 라디오를 지목한다. 그가 이 글을 쓸 당시 라디오는 소통의 새로운 매체였고, 히틀러는 라디오를 전체주의를 위한 대중 지배에 사용했다. 피카르트는 쉴 새 없이 쏟아지는 라디오의 말이 인간의 사유를 방해하고 내면을 지배한다고 비판한다. "인간은 라디오를 통해서만 세계와 만나고 인간이 아니라 라디오가 관계를 세운다"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라디오보다 더 즉각적인 매체들에 둘러싸여 있다. 양방향 소통이어서 사정이 다르다 해도 정보의 소스가 진실인지 알 방법이 없다는 점에서 더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다. 말의 시뮬라크르 속에서 무엇이 진실인지 모른 채 스스로 말의 주체가 되지 못하고 말을 나르고 또 나른다. 피카르트의 잡음어 분석이 현재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지점이 여기에 있다.

잡음어를 가로막는 수직의 침묵

말이 고속도로처럼 잘 나가지만 같은 속도의 무의미함으로 돌아와 부서지는 날이 있다. 내 안에만 갇힌 자폐적인 말, 수없이 인용된 상투적인 말, 목적을 위해 설계된 전략적 말들이 그러하다. 반면 길 없는 길을 가는 것처럼 말이 끊기고 턱턱 막히지만 상대에게 도달할 것 같은 기분이 드는 때가 있다. 자신의 경향성을 이기고 타자를 돌아보는 말, 아직 구체적이지는 않지만 이전과 다른 사유로 나아가려는 말, 자신의 욕망을 내려놓는 말들이 그러하다. 이런 경험을 피카르트는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문장의 흐름은 침묵에 의해서 가로막힌다. 언제나 수직의 침묵이 문장의 수평적 흐름을 향해서 튀어나와 그 흐름을 가로막는다. 그와는 반대로 잡음어는 가로막힘이 없이 수평으로 나아간다. 잡음어에게는 무언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적으로 증대시켜 나간다는 것만이 중요할 뿐이다."

피카르트의 관찰처럼, 자기 증식이 존재 이유인 말은 유창하게 잘 흘러가지만 새로운 의미나 관계를 형성하는 말은 그렇지 못하다. 자신과 타인 사이에서 진정한 의미를 생산하는 말은 서로의 반응 속에서 나오므로 수직적 침묵을 동반한다. 맞지 않는 조각들이 이리저리 맞추어져야 하므로 상처 나고 아물면서 하나의 형상을 만들어나갈 시간이 필요하다. 이런 말, 즉 독백이 아닌 서로 간의 말은 침묵 속에서만 준비될 수 있다. 피카르트는 참된 말이 만들어지기 전 침묵의 역할을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진리의 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침묵과의 연관이 꼭 필요하다. 그러한 연관이 없이는 진리는 지나치게 엄격하고 경직된 상태가 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된다면 다만 개개의 진리가 있을 뿐이다. (…) 말은 침묵 속에 가라앉아 망각된다. 그리고 그 망각은 용서를 준비하고 있다. 그것은 언어의 구조 속에 사랑이 짜여 들어있다는 한 표시이다. 말은 인간이 망각 속에서 용서하도록 인간의 망각 속으로 가라앉는다."

피카르트는 말 이전의 침묵, 이러한 수직적 침묵의 순간이 갖는 성찰과 치유의 힘을 강조한다. 실제로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거나 타인의 마음을 돌아보려면 침묵이 필요하다. 말을 하는 동안 모순으로 보였던 것들이 침묵하는 동안 조화롭게 자리 잡을 때가 있다. 말로는 용서가 안 되는 것들이 침묵하는 동안 자신을, 타인을 용서할 때가 있다. 침묵은 새로운 사유로 나아가거나 자신과 타자를 감싸 안을 수 있는 차원으로, 이는 침묵이 말보다 더 큰 공간 즉, 인간의 넓고 복잡한 사유의 궤적을 감당할 만한 넉넉한 공간을 갖고 있기 때문인 것 같다. 피카르트는 이러한 침묵의 힘을 다음과 같이 들려준다.

"침묵은 서로 대립되는 것들 사이에 존재하면서 그것들이 서로에게 공격적으로 되지 않도록 작용한다. 한 쪽이 다른 쪽에 닿으려면 그 드넓고 유화적인 침묵의 평면을 넘어가야만 한다. 그렇게 서로 대립되는 것들 사이에서 침묵하는 실체가 중재한다. 그럴 때에만 인간은 자기 자신의 모순을 초월하게 되며, 그럴 때에만이 인간은 유머를 갖게 된다."

이러한 대목이 판단 중지나 부당한 화합에 승복하는 소극적이고 타협적인 것으로 읽힐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이것을 일단 자신의 모순과 혼란을 돌아보고 그런 시간을 견뎌낸 결과 새로운 시각과 마음의 도량을 얻는 것으로 이해했다. 그만큼 해 보고도 안 되면 그때는 자기를 주장하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대립의 말조차 이러한 침묵의 시간을 거친 후에야 의미 있게 전달될 수 있을 것이다.

침묵 뒤에 오는 말

피카르트는 <침묵의 세계>에서 여러 차례 '침묵을 위한 침묵'이 아닌 '말을 위한 침묵'임을 환기시키고 있다. 말이 마음 놓고 문장과 사상 속으로 멀리까지 움직여갈 수 있도록 그 밑에 드넓은 침묵을 펼쳐 놓아야 한다는 것이다. 침묵은 소통의 종결점이 아니라 소통을 위한 동력인 것이다.

<침묵의 세계>을 잊고 지내던 중 <위대한 침묵>이란 다큐멘터리를 보았다. 이 둘은 오래전 잃어버린 기억을 하나로 잇는 듯 잘 어우러졌다. <위대한 침묵>은 그랑드 샤르트뢰즈 수도원의 일상을 담은 것이다. 관심 있게 본 부분은 침묵 수행 중 허용되는 산책 시간에 나누는 수사들의 대화였다. 침묵의 담금질을 거친 말은 빛나는 추상이나 복잡한 논리를 가진 말이 아닌 계절의 변화, 성당의 대소사, 안부를 묻는 것 등 일상에 관한 말이나 소박한 감사의 말이었다.

이 글을 쓰면서 침묵 뒤에 오는 말이 어떤 것일지 생각해 본다. 오랜 골몰 후에 내미는 과작인 작가의 글, 인생의 뒤안길을 돌아온 노인이 건네는 느린 안부, 삶의 마지막 순간 긴 여행을 떠나는 이가 힘겹게 숨결처럼 밀어내는 감사의 말이 그려진다. 침묵을 견딘 말은 단순하지만 근본적이고, 설득하려 들지 않지만 이미 공감되고, 자신을 내려놓은 자만이 나누어 줄 수 있는 온기를 지녔다.

강아지 소리를 통역해 주는 기구를 판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사람 간에도 그런 것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그런 불가능한 생각이 들 만큼 소통은 어렵다. 소통은 단지 말의 교환이 아닌 욕망, 처지, 상황의 이해와 나눔이어야 하기에 그렇다. 그래도 우리는 말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다. 말이 없이는 서로 닿을 수 없기 때문이다.

다행히 침묵은 자신과 타인 사이에서 서로에게 닿을 수 있는 서툰 말을 생성하는 시간을 준다. 물론 너무 침묵하면 옆 사람이 괴로울 것이므로, 돈오점수의 마음으로 침묵의 세계에 다녀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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