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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 날 남해안여행] (1) 여수 향일암

입력 : 
2018-11-21 16:3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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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가 싸늘해지면 눈길이 남쪽을 향하는 건 인지상정이다. 모처럼 쾌청한 가을이 지속되던 11월 초순 여수행 KTX에 몸을 실었다. KTX 노선 가운데 최상급 코스다. 서울 수도권 사람들이 가고 싶어도 부담스러워했던 곳이 남해 중앙 지역, 여수, 순천, 고흥, 남해 등과 그 윗동네 지리산 일대였다. 용산역에서 여수엑스포역까지 소요시간은 세 시간. 서울에서 올려다 보았던 맑은 하늘은, 향일암이 있는 여수, 그 바다와 하늘까지 이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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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일암 언덕에 다다르니 마음이 깨끗해진다. 일주문 문턱을 넘은 것도 아닌데, 이미 마음은 천년 전 세상에 가 있는 듯 하다. 유명 사찰에 도달하려면 지나야 하는 관문이 꼭 있다. 그것은 마치 영화 ‘신과 함께 – 죄와벌’ 속 일곱 번의 재판과도 같은 일종의 통과의례이다. 먼 길, 교통체증, 주차난, 소란한 사하촌(절 아랫 마을), 다소 귀찮은 긴 도보까지를 속세의 문이라고 하면, 개울 위 극락교, 일주문, 해탈문, 석탑 등은 법계의 지존을 향하는, 불국의 문이라 할 수 있다. 향일암을 찾은 그날은 운이 좋았다. 평일이었고 여수에 관광객이 많은 때도 아니라 길도 시원했으며 주차도 널널했다. 향일암을 향해 만 배를 올려도 될 법한 사하촌은 여전히 시끌벅적했다. 여수 특산물인 김과 갓김치를 팔기 위한 그들의 몸짓과 목소리는 남대문 시장의 풍경과 다름이 없었다. 속세의 참 맛이라고나 할까? 일주문을 향하는 언덕길에 들어서면 왼쪽으로 해맞이광장이 내려다 보인다. 이제 연말이 되면 인산인해와 감탄사와 기도와 사랑이 가득한 작은 곶이 되리라. 언덕길에서는 귀염둥이 동자석상들을 만날 수 있다.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쓰다듬었길래, 새카맣게 변한 석상과의 기념 촬영은 기본! 조금 더 성의를 보인다면 석상 아래에 새겨진 법구경을 나지막한 목소리를 읊어보도록 한다.

첫 번째 법구경은 ‘아니 불, 말씀 언 不言’

“나쁜 말을 하지 말라 / 험한 말은 필경에 나에게 돌아오는 것 / 악담은 돌고 돌아 고통을 몰고 끝내는 나에게 되돌아 오니 / 항상 옳은 말을 배워 익혀야 하리.”

두 번째 법구경은 ‘아니 불, 들을 문 不聞’

“산 위의 큰 바위가 바람에 흔들리지 않듯이 / 지혜로운 사람은 비방과 칭찬의 소리에도 평정을 잃지 않는다.”

세 번째 법구경은 ‘아니 불, 볼 견 不見’

“남의 잘못을 보려 힘쓰지 말고 / 남의 행하고 행하지 않음을 보려하지 말라 / 항상 스스로를 되돌아 보고 / 옳고 그름을 살펴야 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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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너나 잘 사세요’를 가르치는 부처의 말씀이다. 쿨하고 시크하다. 겸둥이 석상 삼총사를 지나면 ‘등용문’이 있다. 이 문은 최근에 세워진 것이다. 세상 곳곳, 사찰 구석구석에 의미 없는 일이 하나라도 있을까 하지만, 향일암 등용문은 그 건축의 뜻을 한번은 헤아려 볼 가치가 있다. 등용문에서의 ‘용문’은 중국 황하 상류의 험곡 이름이다. 물살이 세고 지형이 험난해서 이 계곡 아래에 사는 물고기들은 좀처럼 용문으로 뛰어오르지 못한다고 한다. 그러나 수백 번 시도한 끝에 용문으로 올라간 물고기는 곧 용이 되어 승천한다는 전설이 있다. ‘등용문’은 그러므로 ‘용문에 오른다’는 벅찬 뜻을 담고 있는 말이다. 등용문 안내석에는 ‘등용문’에 대학입시, 공무원 등 속세의 각종 시험과 난관을 극복하는 세인들의 삶을 대입하고 있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등용문이 ‘향일암’의 고통과 연결되어 잠깐이나마 착잡한 마음이 되었다. 2009년은 향일암과 사하촌 임포마을의 시련의 시간이었다. 2012년 여수엑스포를 앞둔 시점에서 향일암은 4년 동안 공들여 온 ‘원통보전’ 건축을 끝내고 잔잔한 기쁨 속에 있었다. 사하촌 사람들의 기대도 엄청났었다. 그러나 12월20일에 발생한 화재로 향일암은 순식간에 잿더미가 되었다. 화재 원인도 밝혀지지 않았다. 방화 가능성이 크게 제기되었으나, 잿더미에서 증거를 찾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화재 당시 향일암 스님들보다 더 충격을 받은 사람들은 사하촌 임포마을 사람들. 마을 사람들 가운데는 어업과 농사로 사는 사람들도 많지만, 향일암을 찾는 참배객과 관광객들이 쓰고 가는 돈에 의지하는 사람들도 한둘이 아니다. 게다가 향일암이 무언가. 우리나라 최대의 관음기도처 아니던가. 마을 사람들은 화재 즉시 달려 올라가 진화 작업을 했지만 속수무책, 모든 가람은 불에 타 버렸고 남은 것은 시커먼 잿더미와 타버린 마음뿐. 향일암은 사죄와 참회의 기도, 그리고 2년 여의 복구 작업 끝에 2012년 1월 해맞이 기도를 시작으로 다시 대중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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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일암 ‘해탈길’, 바닷가 사찰이라서 그럴까, 거북이 석상이 무척 많다, 대웅전에서 본 풍경
▶해를 향한 암자, 해를 품은 마음 향일암 등용문을 지나면 향일암 여행 최대의 명소를 만날 수 있다. 아직 본 가람에 들어서지도 않았는데 무슨 최대 명소? ‘해탈길’이 그곳이다. 등용문을 지나 대웅전을 향해 걷다 보면 거대한 바위를 만난다. 처음 가는 사람들은 그 앞에서 멈칫하기 일쑤다. 바위 틈새로 난 그 길을 발견하기 전에는 말이다. 원통보전으로 향하는 이곳은 ‘불이문’이라는 정식 이름이 있지만 보통은 ‘해탈길’로 불린다. 열 걸음 남짓한 이 바위틈을 걷는 시간은 아주 잠깐이지만, 순식간에 자연 깊은 곳으로 들어왔다는 놀라움의 여운은 오래 갔다. 또한 이 암자를 지은 스님의 건축적 재치에 잔잔한 웃음도 일어난다. 이 해탈길을 걸어 원통보전에 다다랐을 때 정말 해탈의 경지를 깨달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윽고 향일암 마당에 올라서자 앞으로는 원통보전이, 그 뒤로는 삐죽삐죽, 삐뚤 빼뚤, 울퉁불퉁 바위들이 튀어나와 있다. 돌아보니 이곳에 암자를 지은 스님의 공간 개념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통보전을 중심으로 왼쪽 뒤로는 관음전이, 오른쪽으로는 삼성각이, 그리고 대웅전(원통보전) 바로 앞 바다 쪽으로는 범종각과 또 다른 관음전이 있다. 절 한 곳에 관음전이 두 곳 있는 게 특이하다. 바다 쪽 관음전은 용왕전이라고도 불린다. 서울에서 다섯 시간 걸려 달려온 향일암을 둘러보는데 걸린 시간은 고작 10분? 물론 꼼꼼하게 들여다 보고 사색도 하고 기도도 하고 하려면 더 오랜 시간이 걸리겠지만, 공간만 훑어보는데는 잠깐이면 될 정도로 향일암의 면적은 좁고 가팔랐다.

대체 이 좁아빠진 곳에 왜 절을 지을 생각을 했을까. 향일암 창건에 대한 이야기는 백제 의자왕 시대까지 거슬러올라가지만 대부분 전설로만 전해지고 있다. 기록에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조선 숙종 때로, 1715년 인묵대사가 지었다고 한다. 원래는 다른 곳에 있었는데 주민들의 헌신에 힘입어 지금의 위치로 옮겨 창건했다. 기록에 있던 요사채들은 모두 사라졌고, 오늘날 볼 수 있는 가람들은 1986년에 새로 지은 것이다. 그러나 2009년 의문의 화재로 대웅전인 원통보전, 종각, 종무실이 전소되어 다시 건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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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자의 소원을 부처님께 빈다, 백 원짜리 동전을 바위에 붙이기 신공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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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 듣고, 말하고를 조심하자는 ‘법구경’, 향일암 계단길 언덕, 향일암에서 본 여수 바다
원통보전은 향일암의 면적과 오밀조밀한 주변 자연과 비례를 잘 맞춘 아담한 건축물이다. 작지만 전면 3칸, 측면 2칸, 팔작지붕, 배흘림 기둥 등 전형적인 대웅전의 면모를 지니고 있다. 전각의 중심이 되는 건물이지만, 그곳에서 조용한 시간을 가져보겠다는 생각은 애초에 포기하는 게 좋다. 스님의 기도 소리만 들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 소리를 배경 삼아 끝없이 펼쳐지는 바다와 다도해해상국립공원의 수많은 섬들을 물끄러미 마음에 담을 수 있다면 또한 얼마나 행복할까. 하지만 뛰어난 경관과 신비한 해탈길, 해너미와 해돋이를 같은 지점에서 볼 수 있는 ‘출몰 포인트’ 등 여행지로서의 향일암을 고즈넉한 암자로 남겨두기에 우리의 볼 거리는 너무도 부족하다. 원통보전 마당에 서니 스님의 기도 소리와 관광객들의 한껏 들뜬 기쁨의 목소리들, 가족을 부르는 아버지의 우렁찬 음성, 아이들의 재잘거림 등이 뒤섞여, 그 어떤 소리도 제대로 들을 수 없었다. 마치 석가모니의 ‘야단법석’이 시작되기 전 현장을 보는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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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생만 고초를 겪는게 아니다, 종교 또한 마찬가지. 향일암은 기가 막힌 시점에 대화재를 맞는 고난의 길을 겪기도 했다, 사하촌. 여수 갓김치와 김을 파는 상점이 즐비하다.
나 또한 향일암 소음의 일부이거늘 누구에게 조용히 하자고 말할 수 있을까. 여행자들의 목소리들은 오히려 ‘자신에게 집중하게 하는’ 계기가 되고, 누구든 향일암 안에서 고요한 마음을 만들 수 있다. 시끄러우니 집중하는 게 아니라,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것이다. 원통보전에서 (상)관음전으로 올라가는 길은 ‘해탈길’과 같은 바위틈을 걸어야 한다. 폭이 좁기 때문에 서로서로 양보하며 걸어야 한다. 그 좁은 바윗길을 올라 관음전에 도착한 사람들은 또 다시 줄을 서서 기도의 순서를 기다린다. 관음전 앞에서 ‘관세음보살’의 뜻을 다시 생각해 본다. 관세음보살은 중생이 마음 속이 아닌, 소리를 내어 자신의 이름을 부르면 그 음성을 듣고(관음) 중생을 구원하는 모성이 아니던가. 그러니 조금 전 원통보전 마당에서 아들 이름을 크게 부르던 아버지, 친구에게 함께 셀카 찍자며 크게 웃던 여인네 모두 가슴 속에 품고 있던 커다란 소망을 관세음보살을 향해 외친 것이었을까? 암튼, 절에만 오면 모든 퍼즐이 맞춰지는 것 같은 느낌은 착각인지 억지인지. 향일암을 떠날 때는 아까 올라온 계단길이 아닌 마을길을 이용했다. 계단길이 속세와 구별되는 분위기로 조성되었다면, ‘평길’이라 불리는 마을길은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산간 마을의 전형적인 모습을 볼 수 있는 평범한 시골길이다. 물론 길 곳곳에는 여수 특산물을 파는 가게, 식당, 카페, 숙박 시설들이 여행자들을 부르고 있다. ‘갓김치 맛 좀 보고 가시라’, ‘햇김 좀 사 가라’는 상인들의 목소리에 끌리지 않더라고, 여기까지 왔으니, 그 가게들 중 한 곳에서 갓김치 한 통과 김 한 상자 쯤 집으로 보내두면 어떨까. 여수 향일암에 또 언제 올지 누가 알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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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 해상케이블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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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동도
▶요즘 대세 케이블카! 여수해상케이블카 케이블카를 타기로 했다. 해상 케이블카, 항구 풍경, 낙조, 그리고 오동도 산책을 위해서였다. 케이블카 터미널은 돌산공원. 이곳에서 케이블카를 타면 여수 (구)항구, 거북선대교를 가로질러 자산공원 탑승장에 도달할 수 있다. 공중에 부양한 상태로 내려다 보는 여수의 어슬녘은 고요하고 평화로웠다. 거북선대교의 높은 탑을 지나칠 때는 아찔한 느낌도 들었다. 항구가 내려다 보이는 언덕 마을의 붉은 지붕들도 아름다웠다. 여수해상케이블카는 8인승 일반 케빈과, 5인승 크리스탈 케빈 등 두 가지 케빈이 운행 중이다. 크리스탈 케빈은 바닥이 투명해서 좀 더 아찔한 스릴을 주는데, 주로 젊은 연인들이 즐기는 것으로 보였다. 승차권은 일반 케빈 대인 왕복 1만5000원, 편도 1만2000원, 소인 왕복 1만1000원, 편도 8000원. 크리스탈 케빈의 경우 대인 왕복 2만2000원, 편도 1만7000원, 소인 왕복 1만7000원, 편도 1만2000원이다. 왕복 표를 산 이유는 돌산에 렌터카를 주차했기 때문이지만, 결론적으로 잘 한 일이었다.

케이블카 승차권은 세 시간 안에 이용해야 하는데, 자산공원에서 내려 오동도를 산책하고 되돌아오기에 다소 빠듯한 시간이었다. 계획한 일은 아니었지만, 되돌아 오는 시간이 낙조 타이밍과 딱 떨어져서 자산공원에서 돌산으로 가는 케이블카 안에서 나는 인생 낙조를 만날 수 있었고, 그 차고 붉은 기운 가득한 공중에서 가슴 뛰는 낭만을 맛볼 수 있었다. 꼭 낙조를 보지 않아도, 대단한 풍경이 스치지 않아도,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이는 세상은 늘 아름답다.

▷돌산공원 승차장 여수시 돌산읍 돌산로 3600-1 운행시간 왕복 약 25분 운영시간 09:00~21:30 토요일 09:00~2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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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수세계박람회장은? 2012년에 개최되었던 여수박람회장은 ‘여수해양공원’으로 변신했다. 공원 시설은 해양과 빛의 조화로운 쇼를 감상할 수 있는 ‘빅오쇼’, 박람회장 전체와 다도해를 바라보며 음악과 커피를 즐길 수 있는 높이 67m의 ‘스카이타워 전망대’ 등이 있다. 그러나 재구성된 ‘공원 지역’은 겨울철을 맞아 대부분 휴장에 들어간다. 반면에 ‘전시 체험시설’은 계속 운영된다. 주제관 옥상에서 아쿠아리움 상공을 지프라인과 같은 방법으로 날아갈 수 있는 ‘스카이플라이’, ‘테디베이뮤지엄’ 등이 그곳들이다. 특히 아쿠아플라넷은 여전한 인기를 누리고 있다. 해양 생물을 관람할 수 있는 아쿠아리움, AR트릭아이뮤지엄, 360도 5D 영상관 등을 즐길 수 있다. 각 시설의 이용은 공식 웹사이트에서 확인할 수 있다.

▷위치 전남 여수시 박람회길 1

[글과 사진 이영근(여행작가)]

[본 기사는 매일경제 Citylife 제655호 (18.11.27)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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