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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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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숨 걸고 ‘차별금지법’ 외쳐도 언론에 한 줄 나지 않는 이유

‘차별금지법’ 투쟁 ‘적극적으로’ 외면하는 대다수 언론, 권력자인 취재원에게 감정이입하며 허위 주장도 방관
등록 2022-05-21 08:20 수정 2022-05-22 02:38
차별금지법제정연대가 2022년 5월17일 국회 앞에서 6·1 지방선거 전에 차별금지법 제정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차별금지법제정연대가 2022년 5월17일 국회 앞에서 6·1 지방선거 전에 차별금지법 제정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서 두 활동가가 ‘차별금지법 제정’을 촉구하며 단식농성을 벌였습니다. 이종걸 차별금지법제정연대 공동대표와 미류 책임집행위원입니다. 4월 11일 시작한 농성은 5월 19일까지 39일간 이어졌습니다.

단식은 그야말로 최후의 투쟁 방법입니다. 하나뿐인 목숨을 걸기 때문이지요. 그런 선택을 하지 않도록 절박한 이들에게 확성기를 쥐여주며 ‘목소리 없는 이들의 목소리’를 들려줄 책임이 언론에 있습니다. 하지만 극단적 투쟁을 선택해야 뒤늦게 카메라를 들고 찾아오는 게 현실 속 언론입니다.

곡기를 끊어야 비로소 눈길을 주는 언론도 불편하지만, 그조차 하지 않는 무서운 언론도 있습니다. 일부 진보언론을 제외한 대다수 언론 보도에서 두 활동가의 단식농성은 ‘세상에 없는’ 일이었습니다. 목숨 걸고 단식을 벌이는데 거들떠보지도 않습니다. 참 모질고 냉혹한 언론입니다.

‘민감 이슈’ 좋아하는 언론의 “민감한 사안”

보수언론에서 차별금지법과 관련된 소식을 보기란 하늘의 별 따기입니다. 박지현 더불어민주당 공동비상대책위원장이 법 제정 필요성을 언급하거나 방송인 하리수씨가 국회를 찾았을 때 짧게 언급하는 정도입니다. 그마저도 늘 ‘논란’이라는 꼬리표를 붙입니다. 중대재해처벌법 같은 진보적 의제를 다루는 데 적극적이었던 KBS 뉴스도 차별금지법과 관련해서는 소극적 중계를 하는 수준에 그치고 있습니다.

차별금지법이 너무 과격하거나 급진적이기 때문일까요? 차별금지법이 시행되면 종교시설에서의 설교가 규제당하거나 일자리가 줄어든다는 극우세력의 가짜뉴스만 믿는다면 그렇게 보일지도 모릅니다. 사실 차별금지법의 내용은 상식적이고 소박합니다. 성별, 나이, 학력, 병력, 장애, 성적 지향, 종교, 인종 등 어떤 이유에서든 차별받지 않도록 하자는 것뿐입니다. 생각해보세요. 누군가를 ‘차별하자’는 주장과 ‘차별하지 말자’는 주장 가운데 위험하고 반사회적인 쪽은 어디인가요?

여론도 차별금지법 제정에 우호적입니다. 국가인권위원회가 리얼미터에 의뢰해 2022년 4월 성인 남녀 1003명을 조사한 결과, 응답자의 67.2%가 ‘차별금지법이 필요하다’는 의견에 동의했습니다. 2007년 차별금지법안이 처음 발의된 시점부터만 계산해도 사회적 논의가 시작된 지 15년이 지났습니다. 이쯤 되면 더는 ‘시기상조’라 말하긴 어려워 보입니다.

차별금지법 제정이 하염없이 미뤄지는 일차적 책임은 정치권에 있습니다. 하지만 언론도 공범입니다. 언론이 관심을 보이지 않으니 정치권도 미온적인 거지요. 언론은 차별금지법에 ‘적극적으로’ 무관심합니다. 언론이 지닌 ‘의제설정’(Agenda-setting)이라는 고유한 영향력을 애써 행사하지 않으려 합니다. 차별금지법의 의미와 효과를 왜곡하는 허위 주장도 방관하고 있습니다.

기자들에게 차별금지법을 본격적으로 다루지 않는 이유를 물으면, “민감한 사안이라서”라는 답이 돌아옵니다. 그런데 언론이 가장 좋아하는 게 바로 ‘뜨거운 감자’ 아니었나요? 다른 경우엔 민감한 이슈를 다루는 데 주저하지 않으면서, 아니 오히려 이목을 집중시킨다며 좋아하면서 왜 유독 차별금지법 앞에서만 약한 모습일까요?

2021년 언론에 대한 징벌적 손해배상을 가능케 하는 언론중재법 개정안이 논란이 됐을 때를 떠올려봅시다. 언론은 찬반이 첨예하게 엇갈리고 치열한 토론이 벌어졌던 언론중재법 개정안 소식을 목청 높여 보도했습니다. 똑같이 ‘민감한 사안’이라도 자신들이 이해당사자인 이슈에선 정반대 반응을 보인 겁니다.(오해 없으시길 바랍니다. 저는 언론중재법 개정안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다만 언론의 이중적 태도를 이해할 수 없다는 이야깁니다.)

주류 엘리트 집단과 동일시하다보니

저는 언론이 유독 차별금지법에 무관심한 건 언론사와 그 종사자들의 ‘주류 지향성’과 관련 있다고 생각합니다. 언론은 그 본질적 속성상 사회 중심부에서 벌어지는 주류 엘리트 집단의 의사결정과 행동을 관찰하고 전달하는 데 집중합니다. 많은 사람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권력을 가진 이들의 이야기가 대중의 흥미를 끌고 뉴스 가치가 더 높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기자들은 언제나 우리 사회에서 가장 ‘잘나가는’ 권력자인 취재원을 가까이에서 보고 만납니다. 일상의 시선이 늘 그쪽에 고정돼 있으니, 무의식중에 자신을 주류 엘리트 집단과 동일시하거나 그들과 똑같이 되기를 바라는 기자가 많습니다. 이렇게 되면 어느샌가 주변부의 비주류 이야기에는 흥미를 잃고, 나와 상관없는 ‘남의 일’이라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정말 ‘남의 일’일까요? 누구나 적어도 한 가지 면에서, 또는 인생의 특정 단계에서는 사회적 소수자가 됩니다. 우리는 일류 대학을 나오지 않았거나 비정규직이거나 여성입니다. 결혼을 하거나 하지 않아서, 사고를 당하거나 병에 걸려서 소수자가 될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걸 피해 가더라도 나이 들면 누구나 노인이 됩니다. 우리 삶의 마지막 정체성은 소수자입니다.

그래서 차별금지법은 동성애를 ‘합법화’하는 법이 아니라 언제 겪을지 모를 차별로부터 나와 내 가족을 보호해주는 법입니다. 스스로 다수라 믿으며 인정하지 않을 뿐, 누구나 차별금지법의 잠재적 수혜자입니다. 기자들은 소수자의 정체성을 깨달을 기회가 적습니다. 특히 메이저 언론사에서 일하는 남성 기자라면 차별의 당사자가 되는 경험을 해보기 어렵지요. 언젠가 차별받을 거라는 생각을 해보기도 쉽지 않습니다.

기획기사 아이템으로만 소수자 찾지 말고

이런 기자들에게 소수자는 언제나 ‘나와는 다른 존재’입니다. 성소수자, 다문화가정, 난민은 이따금 기획기사에서 다룰 만한 취재 아이템에 불과합니다. 기사에 ‘외눈박이’나 ‘절름발이’와 같이 장애인을 비하하는 표현을 무의식중에 써버립니다. 이들의 눈에 차별은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더라도 대수롭지 않게 여깁니다.

언론이 보도하지 않는다고 해서 차별이 만연한 현실이 지워지진 않습니다. 관심 두지 않는다고 내가 차별의 피해자가 될 가능성이 사라지는 건 아닙니다. 차별금지법은 누구에게나 ‘나의 일’입니다. 모든 시민이 자기 모습 그대로 자유롭고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는 길입니다. 따뜻한 기자실에 앉아 있는 기자들이 차가운 무관심과 중립에의 강박을 버리고 차별금지법 제정에 힘을 보태야 할 이유입니다.

박영흠 협성대학교 미디어영상광고학과 교수

*박영흠의 고구마 언론 비평: 시원한 사이다보다는 고구마처럼 건강에 좋은 언론 비평을 지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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