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 성폭력, 페미니즘, 사회주의 조직

* 작년 캐나다의 좌파 조직들 두 곳에서 내부 성폭력을 은폐해 왔다는 폭로가 터져 나와 큰 이슈가 되었다고 합니다. 한국에서도 좌파 단체들 중에 성폭력 피해자에게 2차 가해를 일삼다가 민주노총으로부터 연대 단절을 당한 사례들이 있고, 페미니즘에 부정적인 태도를 취하거나 아예 “페미니즘”이란 용어조차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경우도 있는 것 같습니다. 3.8 여성의 날을 맞아 페미니즘을 지지하는 영국과 캐나다의 사회주의자들이 이런 문제들에 대해 토론한 내용을 번역해 보았습니다. (책방 들락날락 번역모임)

* 원문 : https://www.rs21.org.uk/2022/12/15/revolutionary-reflections-sexual-violence-feminism-and-socialist-organising/

빅터의 아이들(Victor’s Children), 2022년 12월 15일

이 글은 데이비드 캠필드(David Camfield)가 진행하는 팟캐스트 <빅터의 아이들(Victor’s Children)> 2022년 11월 방송 분을 정리한 것이다. 이 팟캐스트는 캐나다에서 제작되지만, 이번 에피소드에는 영국에서 활동하는 rs21 회원 헤이즐(Hazel)의 회고가 담겨 있다. 그 외에도 캐나다 ‘파잇백(Fightback)’의 전 회원인 제이미(Jamie)와 1980년대 말 운동 사회에서 성폭력을 겪은 피해 생존자 쉴라(Sheila)가 게스트로 참여했다.

데이비드 : 우리는 성희롱과 성폭력이 빈번하게 일어나는 사회에 살고 있다. 왜 그럴까? 남성의 생물학적 특성 때문이 아니라, 젠더 불평등 때문이다. 그 뿌리는 성차별 사상들보다 훨씬 더 깊다. 우리의 삶은 어느 정도 젠더 관계에 따라 물질적으로 조직돼 있다. 이 젠더 관계는 그동안 쟁취한 그 많은 법적 평등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가부장적이고, 시스젠더* 우월주의적(다시 말해 트랜스젠더에 대해 억압적)이며, 이성애 중심적이고 성차별적(hetero-sexist)이다. 그러니 젠더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에 헌신하는 좌파들 사이에서도 성희롱과 성폭력이 발생한다는 사실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오히려 놀라운 일은 페미니스트들이 그동안 그렇게나 애써왔는데도 좌파 일부는 여전히 성희롱이나 성폭력 문제에 대응을 매우 잘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2022년, 우리는 캐나다에서 큰 이슈가 된 사건을 목격했다. 캐나다의 군소 사회주의 조직들 중 가장 큰 두 조직인 ‘파잇백’과 공산당**에서 일어난 사건들이다. 오늘 우리가 나눌 두 가지 토론 주제는 왜 이런 일이 일어나며, 이런 문제에 더 잘 대응하려면 사회주의자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관한 것이다.

* 시스젠더(cisgender)란 타고난 성별과 본인이 정체화하고 있는 성별 정체성이 같다고 느끼는 사람을 뜻한다.
** ‘파잇백(Fightback)’은 캐나다의 트로츠키주의 조직이고, 캐나다 공산당은 1921년 창당해서 소련 붕괴 이후 분당과 쇠락을 거치면서도 아직 유지되고 있는 정당이다. 작년에 두 조직 모두 내부에서 벌어진 성폭력을 조직적으로 은폐해왔다는 폭로가 나왔다.

우선 캐나다 총리 쥐스탱 트뤼도가 전형적인 예가 될 매우 얄팍한 자유주의 형태의 페미니즘이 그 어느 때보다 관심을 끌고 있다는 평가부터 얘기해 보자. 보다 중요한 것은 반갑게도 지난 10년간 진지한 페미니즘이 부활하고 있다는 것이다. 비록 많은 페미니즘 활동이 노라 로레토(Nora Loreto)가 <투쟁을 탈환하라(Take Back the Fight)>에서 탈중심적인 활동이라고 부른 ‘해시태그 페미니즘’(이는 로레토의 표현이다.) 같은 형태로 이루어졌지만 말이다. 이와 같은 페미니즘 돌풍은 좌파 진영 전반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지만, 그와 동시에 페미니즘 및 여타 억압에 반대하는 정치들을 자유주의 ‘정체성 정치’로 폄하하고 무시하는 경향도 나타났다. 애비 바칸(Abbie Bakan)의 용어를 빌려 말하자면, 이런 경향은 ‘마르크스주의 반페미니즘’이라고 부를 수 있는 훨씬 오래된 전통과 맞닿아 있다고 생각한다. 자 그럼, 우선 이 얘기부터 해보자. 오늘날 좌파 정치는 젠더 억압 문제에 있어서 전반적으로 어디쯤 서 있다고 생각하는가?

제이미 : 몇몇 학자들이 ‘페미니즘적인 국가(feminist state)’라고 지칭하는 것에 흥미로운 동학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 페미니즘적인 국가라는 건 실제로 자본주의에 발을 들여놓은 중산층 시민들에게만 혜택을 준다. 트뤼도 정부가 내놓은 정책의 수혜자가 될 수 있는 사람은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정부가 자원 채굴 프로젝트를 강행하는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피해를 입게 될 여성들’과 대비해서 보면 더 그렇다. 내가 보기에 캐나다에는 여성 및 여타 젠더 억압을 겪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처우와 서비스 접근성 같은 측면에서 특히 계급에 따라 아주 분명한 격차가 존재한다. 적어도 내가 알기로는 이런 이슈들로 급진화된 사람들을 잡으려는 정치 운동은 전혀 없다. 그게 바로 내가 십대 후반에 사회주의 운동에 가담하게 됐을 때, 적어도 내가 처한 환경에서는 어쩔 수 없이 반정체성 정치 입장을 따를 수밖에 없었던 이유이다.

헤이즐 : 내가 이 문제에 특히 관여하고 관심 갖게 된 것은, 바로 제가 수년 간 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SWP)*의 일원이었기 때문이다. 아시다시피, 2013년에 이 조직에서 엄청난 사건이 있었다. 조직 주요 인사가 강간을 저질렀고, 나는 그 문제 때문에 조직을 떠났다. 그 일은, 이런 사안에 대해 조직이 실질적으로 어떻게 대응하느냐 뿐 아니라 강간 및 성폭력을 둘러싼 조직의 이론적, 정치적 문제가 어떠한지, 이것이 좌파 조직들 내에서 어떻게 드러나고 있는지 재평가를 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 조직을 나온 뒤로 그 문제에 대해 굉장히 많은 생각을 하고 있다.

* 국내에서도 유명한 토니 클리프, 알렉스 캘리니코스, 크리스 하먼 등이 주도적 이론가로 널리 알려져 있는 사회주의 조직이다. 한국어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2013년 사회주의노동자당 지도부 위원이 청소년 당원들을 상대로 성폭력을 저질러 논란을 빚었다. 그러나 정작 사회주의노동자당 지도부는 성폭력 사건에 대한 그 어떠한 책임도 지지 않았으며, 오히려 성폭력 사건을 은폐하고 피해를 호소한 당원들을 제명하였다. 이에 영국의 유력 일간지인 가디언은 사회주의노동자당을 영국 역사상 가장 악랄하고 파렴치한 집단이라 비판하였다.” 이 사건으로 많은 회원이 탈퇴했으며, 탈퇴자들 일부가 rs21을 만들었다고 알려져 있다. 자세한 내용은 여기를 참조

페미니즘, 그리고 소위 얘기하는 ‘해시태그 페미니즘’에 관한 원래의 질문으로 돌아가면, 한계가 무엇이든 간에 #미투 운동은 전반적으로 아주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한다. 이 운동 덕분에 사람들이 이 문제가 심각하구나, 이런 문제제기를 할 수 있구나, 하고 느끼게 됐으니까 말이다. 현장에도 영향을 미쳤다. 물론 이런 얘기는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는데, 영국에서는 내가 일하고 있는 대학 행정직 같은 영국의 몇몇 공기업 현장의 사례만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장에서 #미투 운동의 의미는 이런 문제가 이제 정식으로 다뤄지게 됐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 직장에서 그 문제를 해결하려면 올바르게 체크 표시를 해야 한다”라는 식이긴 하지만 말이다. 하지만 사람들에게 한 발 나와 이런 것들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자신감을 줬다는 면에서 변화를 일으켰다고 생각한다. 또 그 자체로 이 문제들에 대해 좌파가 대응하는 방식에도 영향을 주고 있다.

영국에는 다른 문제들도 많이 있다. 소위 ‘젠더 비판 페미니스트들(gender critical feminists)’라는 사람들이 있는데, 본질적으로 트랜스젠더를 혐오하는 사람들이다. 이 사람들은 소위 페미니스트 좌파 입장이라는 것으로부터 나타나고 있다. 대개는 노조 관료들이고, 또 대개는 공산당의 영향을 받는 이들이다. 이런 맥락에서 몇몇 좌파 그룹들은 성폭력을 그들이 투쟁하고 있는 주요 문제가 아니라 부차적인 문제로 간주하는 구태의연한 방식을 고수하고 있다. 이런 입장은 공산당의 영향을 받는 조직들, 노동당과 연계된 몇몇 조직들, 또 어느 정도 사회주의노동자당(SWP) 같은 조직들에서 여전히 우세하다. 그러나 최근 몇 년 간 성장한 젊고 새로운 조직들은 대부분 성폭력에 대처하는 방식에 있어서 매우 다른, 훨씬 더 적극적인 관점을 취하고 있다. 특히 성폭력에 맞서 싸우는 소규모 활동가 그룹들도 있다. 내가 주목하고 있는 그룹은 ‘시스터즈 언컷(Sisters Uncut)’으로 매우 활동적인 젊고 활기찬 성폭력 문제를 담당하는 반인종주의 그룹이다. 내가 보기에는 많은 지지를 받고 있는 것 같다. 이 그룹은 성폭력에 대처하는 방법과 방식에 있어 좌파의 분위기를 바꾸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구 트로츠키주의 그룹이나 급진 좌파 그룹들에 성폭력이 주요 문제가 아니라는 시각이 존재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제이미 : 내 개인적인 경험은 대부분 내가 조직 활동을 하던 당시의 현실에 관련된다. 그때는 오래된 정파들이 반정체성 정치 입장을 많이 취하고 있었고, 그 결과 사실상 1950년대 이후 일어난 성폭력에 관한 이론적 발전들에 완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내가 속했던 그룹이 그랬던 것처럼, 정통 마르크스주의 경전들 외에 다른 책을 못 읽게 할 정도로 진짜로 정통 마르크스주의 방식만을 고집한다면, 성폭력을 이해하는 방법에 대한 이론적 발전을 놓치고 있는 셈이다. 예컨대, 성폭력은 우연히 벌어지거나 개인적 영역에서만 발생하는 것이므로 그렇게 다루면 된다는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구조적인 것으로, 즉 기존 문화가 만들어내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 말이다. 그리고 나는 이러한 분석의 부재로 인해 이 그룹들 내에 성폭력을 만들어내고 그것을 묵인하는 문화가 존재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발견했다.

마르크스주의적 반페미니즘 또는 반정체성 정치 경향은 이런 그룹들 내부의 억압받는 사람들이 스스로 조직하는 것을 반대하게 만들고, 심지어 여성 분회나 퀴어-트랜스젠더 분회 같은 것들을 만드는 것을 정체성 정치로 간주하게 만드는 것 같다. 소외된 사람들이 연대하여 함께 조직하는 것을 막는다면, 폭력을 저지르고 폭력을 묵인하는 남성들 간의 연대는 계속될 것이다. 이렇게 되면 피해자나 불만을 제기하는 사람들에게 불리하게 작용하는 분위기가 조성된다.

데이비드 : 올해 캐나다에는 사회주의 단체의 지도자가 성폭력을 매우 잘못 처리한 사건이 두 건이나 발생하여 큰 주목을 받았다. 캐나다 공산당과 ‘파잇백’은 많은 차이가 있지만, 한 가지 공통점은 두 조직 모두 소수당 노선(micro-party line)이라고 할 수 있을 노선을 기초로 조직하는 그룹이라는 것이다. 이들은 자기들이야 말로 진정한 사회주의당인 것처럼, 다시 말해 노동계급의 일부에 기반을 둔 훨씬 큰 조직인 것처럼 행동하지만, 그들이 내세우는 이름과 무관하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이는 새로운 일이 아니다. 사회주의 좌파의 일부에서 오랫동안 지속되어 온 관행이다.

소수당 특유의 기풍과 구성원들이 벌이는 억압 행위에 대한 사회주의 그룹들의 부적절한 대응들은 대개 연관성이 있다. 그런 기풍은 구성원들의 머릿속에 조직의 중요성을 부풀리려는 경향이 있으며, 조직을 보존하는 것 자체가 목적이 되는 경우가 많다. 사람들이 지도부 및 ‘레닌주의’ 권위의 안정적 보존을 최우선시 하다보면, 억압 행위를 한 구성원, 특히 소위 지도자를 징계나 제명하는 것을 피하려고 할 수 있다. 지도부를 맹신하는 소수정당 노선에 따라 조직을 만드는 것은 폭력적인 집단 문화를 조장할 수 있으며, 이런 문화는 우리 사회의 억압적인 행동 양식에 도전하기보다는 오히려 반복하게 한다. 자조직의 확대를 가장 중요한 과제로 삼는 사회주의 그룹들은 보통 억압에 대항하는 투쟁들에 스스로를 활짝 열고, 그 투쟁들에서 배우고 변화하는 데 보통 저항한다.

헤이즐과 제이미, 두 분은 모두 이런 조직에 몸담고 있었던 분들인데, 소수당 모델과 성폭력의 연관성에 관해 특별한 견해가 있다면, 공유해 줄 수 있는지?

헤이즐 : 우리 모두가 이 사회 안에 살고 있기 때문에, 사회주의 조직 내에서도 성폭력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는 데 어느 정도는 동의하지만, 그렇게 말하는데 매우 조심스러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솔직히 말해, 그런 말이 핑계로 사용되는 것은 정말 문제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내가 영국에서 사회주의노동자당(SWP)에 있을 때, 확실히 “오, 이건 어디든 일어날 수밖에 없는 일이야”라는 핑계가 곧바로 생각났다. 우리는 그 점을 지적하는 데 매우 신중해야 할 것 같다. 실제로 내 즉각적인 반응은 사회주의 조직에 더 나은 것을 기대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 위기에 대한 명백한 사실들 중 하나는 조직이 피해생존자의 입장보다 가해자를 우선시했고, 그 결과 그 조직이 지향해야 한다고 알려진 원칙들과 모든 것보다 가해자를 더 우선시했다는 것이다. 조직에서 이런 유형의 조직들에서 지도부가 떠받들어 지는 것도 사실이다. 그것은 많은 면에서 구성원들보다 조직이 우선시된다는 사고방식을 반영하며, 그것은 확실히 사회주의노동당 내부에서 발전된 문화였다.

나는 여러 해 동안 그 조직의 회원이었고 조직의 간행물 등에 글을 썼다. 확실히 위기가 발생하자 나는 내 모든 행동을 되돌아보게 되었다. 나는 어떤 행동이 성차별적이라고 생각하거나 불편함을 느꼈을 텐데도, 일을 너무 키우고 싶지 않아서 넘어가고 말았던 많은 사례들을 발견했다. 당의 이익이 이 개인들이 겪는 어떤 것들보다 우선시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나는 그것이 사태를 바라보는 완전히 잘못된 방식이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그런 조직들의 문화가 실제로 사람들이 말을 꺼내거나 나서는 것을 어떻게 막고, 어느 정도 수위의 성차별적 행동이 계속되도록 어떻게 허용하고 있는지에 관해 아직 이야기 하지 않았다. rs21에서 우리가 시도하고 있는 일 가운데 하나는 다른 문화를 만들려고 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피해생존자 중심’ 가이드라인이라는 걸 만들기도 했는데, 이에 따르면 성폭력 사건에서 우리는 중재자와 판사, 또는 작은 국가기구인양 행동하려 들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피해생존자 중심의 접근, 즉 피해생존자들을 지지하고 사건을 다루는 데 있어 진정으로 억압을 반대하는 해방의 정치를 중심에 놓으며, 항상 폭력과 학대의 생존자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그런 접근을 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우리 가이드라인이 완벽하다고 말하는 건 아니다. 나는 우리의 가이드라인이 좋지만 더 발전하고 더 나아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들을 토론해왔다. 더 많은 지원을 제공해야 하는가? 회복적 사법정의* 유형 모델로부터 배울 점들이 있는가? 그래서 우리는 다른 방향들도 모색해 보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분명 진행 중인 토론이다. 또 가만히 앉아만 있으면 안 되는 토론이다. 늘 그에 대해 생각하고 있어야 한다.

* 회복적 사법정의(restorative justice)란 범죄 행위로 인해 발생한 피해와 책임에 대해 피해자, 가해자, 사회공동체가 함께 참여하여 자발적인 합의를 통해 피해를 바로잡고 관계를 회복시키려는 입장이다.

제이미 : 이 그룹들은 정말로 자신들이 내부적으로 성폭력을 처리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마치 작은 국가라도 된 양, 부르주아 법정 시스템을 흉내 내면서 말이다. 내 경험으로는, 그럴 경우 부르주아 법정 시스템에서 나오는 온갖 나쁜 일들을 겪고 트라우마를 얻게 되면서도, 부르주아 법정 시스템에서 해주는 최소한의 보호도 받지 못하게 된다. 그래서 양쪽의 가장 나쁜 점만 겪게 되는 것이다.

나는 이런 기풍이 조직이야말로 무엇보다 우선적으로 헌신해야 하는 대상이라는 비현실적인 집단 신화에서 매우 많이 기인한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 한다” 식의 분위기로 귀결되기 십상인 듯하다. 왜냐하면, 정말로, 당신이 어디든 작은 사회주의 조직이 인류를 위한 유일한 길이라고 진심으로 믿는다면, 그 속에서 나타나는 사람들 사이의 위해와 폭력을 어느 정도 정당화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직의 상태와 운동에서 조직이 할 수 있는 역할에 관해 더 건강하고 현실적인 관점을 가져야, 조직 내부에서 더 건강한 인간관계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보기에 일부 그룹들은 자기 홍보와 거의 그 자체의 유지가 목적인 내부 관료조직을 만드는데 집중하고 있다. 이런 활동 방식은 이기적인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경우도 종종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사람들 사이에 벌어지는 위해가 예를 들면 상호부조 그룹이나 아나키스트 조직에는 나타나지 않는다고 말하는 건 아니다. 그런 일은 거기서도 매우 많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 자체가 목적인 당을 만든다는 것은, 단지 권력 구조가 더 커지게 될 미래 상황을 가정하고 만들어내는 권력구조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내 생각에 그건 다른 사람들보다 더 높은 권력의 위치에 있기를 원하는 자들을 끌어들일 수 있다.

소수정파가 가진 일종의 기생적인 성격 때문에, 조직에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바칠 수 있는 사람의 지위가 높아지는 문제도 있다고 생각한다. 현재 우리 사회에는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이유로 소외되거나 사회적으로 해체되어 있다. 건강한 조직이라면, 자신의 건강과 안녕을 해칠 정도로 평생을 당에 헌신한 사람을 보면, 개입해서 “이봐요, 동지 괜찮아요? 동지의 삶은 문제없이 잘 되고 있나요?”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소수정파에서 평생 당에 몸담고 있는 누군가는 그 당을 위해 너무 많은 일을 하고 있기 때문에 차마 어떤 비난도 할 수 없는 매우 중요한 간부가 되곤 한다. 나는 이런 일을 여러 번 목격했다. 신문을 팔 대학생을 몇 명 조직했다고 조직화의 슈퍼스타로 떠받드는 것이 사태를 더 악화시키는 일일 뿐이라는 점을 빼고는 그 문제 대한 대답을 확실히 하긴 어렵다. 나는 다만 더 건강한 조직 환경에서는 그런 일이 덜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한다.

데이비드 : 우리가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다음으로 얘기했으면 싶은 것은 성폭력을 예방하고 대응하는 데 있어서 좌파인 우리가 어떻게 하면 더 잘 할 수 있는지 하는 것이다.

쉴라 : 조직 문화에 대해 생각해봤을 때, 전반적으로 동의냐 반대냐가 가장 중요한 것이다. 우리는 보통 미꾸라지 몇 마리가 일으키는 예외적인 문제를 제외하고는 자기 조직에는 아무 문제없다고 생각하곤 한다. 하지만 과연 조직 내에서 어떤 문제에 대해서건 견해를 달리 할 수 있을까? 과연 견해 차이가 있는 정치적 토론을 포용하고 장려하는 환경을 가지고 있을까? 그게 아니면 공식적인 지도자, 혹은 더 나쁜 예로 비공식적 실세들의 노선을 따라야만 하는 건 아닌가? 만약 온갖 주제들에 대해 건강한 의견 차이를 가질 수 없는 조직이라면, 성폭력 문제를 잘 처리할 가능성은 절대로 없다고 봐야할 것이다.

헤이즐 : 나는 소위 레닌주의 정당 모델이라고 불리는 것은 정말 시대에 뒤떨어진 모델이고 완전히 바꿀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정말 다시 생각해 봐야한다.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지만, 사실 약간의 변화만 줘도 지금보다는 더 나아질 것이다. 그동안 좌파의 성폭력 문제 대응이 너무나 형편없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는 좌파가 항상 이 문제를 회피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내 경험에 따르면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오, 글쎄요, 우리는 사회복지사(social worker)가 아니에요. 우리는 훈련을 받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이 문제를 처리할 수 없어요.” 하지만 이 역시 아무 것도 안 하고 가만있거나, 성폭력 문제들을 다루지 않는 핑계로 이용된다. 그래서 “성폭력을 겪고 있는 사람들을 어떻게 지지할 수 있을까?”라는 문제부터 생각하기 시작해야 할 것 같다. 이 문제들에 대해 깊이 있게 이야기 나눌 수 있는 전반전인 교육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우리가 그런 교육을 충분히 받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개인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 그리고 그것들이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파악하기 힘들어하는 장애와 정신건강 문제 역시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그 문제가 진짜로 정치적인 문제는 아니라고, 우리가 관심을 기울일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편을 더 선호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사회주의자로 하고 있는 일의 중심에 있다.

그래서 나는 억압이 어디서 나오는 지에 대해 익히 아는 일이라고 흘려버리지 말고, 실제로 그것을 더 깊이 탐구해야 한다는 면에서 우리가 더 이론적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좌파는 폭력을 이해하고, 국가 폭력과 사람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폭력 사이의 연결성을 이해하는 데 관련해서 폭력 일반에 대해 훨씬 더 많은 것을 이론화할 수 있을 것이다.

제이미 : 정말 맞는 말이다. 사실, 방금 헤이즐이 말한 것은 정말로 나를 놀라게 했다. “글쎄요, 우리는 사회복지사가 아니에요. 우리는 이 문제를 다룰 수 있도록 훈련을 받지 않았습니다.”라는 상투적인 반응 말이다. 내가 지금 사회복지사 교육을 받고 있기 때문에 이런 생각을 많이 한다. 직업으로서의 사회사업의 역사는 계급사회가 부상하기 전에 사회적 돌봄(social care)이 공동체의 모든 사람들이 공유하던 공동의 업무였다는 점에서 매우 흥미롭다. 초기 산업 자본주의에 와서 돌봄은 가족 단위 내에서 일어나는 매우 사적인 일이었다. 그 이후 가족 단위의 균열을 통해 일종의 추락을 겪은 사람들, 산업 대도시에서 홀로 살아가며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돌보기” 위해 (내가 여기서 “돌보기”란 말에 따옴표를 친 것은, 초기의 사회사업은 매우 강압적이었고 대개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기보다는 해를 끼쳤기 때문이다.) 사회사업의 초기 형태들이 나타났다.

따라서 사회적 돌봄이 훈련된 전문가들만의 일이라는 생각은 계급사회가 낳은 괴이한 돌연변이일 뿐이다. 물론 좌파 그룹들이 사회복지사의 역할을 떠맡아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지금 사회보다 더 나을 것이라고 믿으며 우리가 만들려는 사회가 어떤 사회이든, 거기서 사회적 돌봄이 소수 전문가들만이 할 수 있는 전문적인 업무로 남겨질 것이라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지금 상황에서 우리가 이 문제를 어떻게 바로잡을 수 있는 지 모든 답을 갖고 있진 않다. 하지만 그것은 답을 찾아내기 위해 우리 모두 힘을 모아야 하는 매우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 문제는 우리가 그것을 해결하거나, 적어도 더 잘 대응하는 법을 배울 때까지 계속 반복될 문제이기 때문이다. 특히 최근 좌파 조직들이 무너진 역사를 살펴보면, 상당히 일관된 패턴이 있다. 따라서 내가 보기에 이 문제는 제대로 이론화되지 못했으며, 우리 정치교육에서 당연히 그래야 하는 것보다 비중이 크지 못한 정말 긴급한 문제인 것 같다.

만약 우리가 어떤 종류의 운동이나 조직으로 사람들을 사회적으로 통합시키고자 한다면, 건강하고 실용적인 공동체를 구축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런 공동체를 만드는 것을 체득하지 못한다. 대신 자기 이익을 위해 타인들을 이용하는 법을 배우고 있다. 우리가 완벽한 것을 만들 수는 없겠지만, 좀 더 나은 것을 만들 기회는 있다. 나는 그것을 위해 싸울 가치가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데이비드 : 좌파 시스젠더 남성들을 젠더 억압에 맞서 적극적으로 싸우도록 설득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가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해졌다. 억압에 저항한다는 것이 단지 일반적인 정치적 입장 표명이 아니라 사람들이 행동하고 살아가는 방식에 대한 모든 실질적인 의미를 포함하고 있음을 깨닫도록 말이다. 어떻게 하면 이를 더 잘 할 수 있을지 여러 분들의 생각을 듣고 싶다.

쉴라 : 극좌파에선 요즘 조직원 훈련(training)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있는 듯하다. 조직원 훈련을 정치적인 교육으로 재구성하기만 한다면, 그래서 우리가 지금 논의하고 있는 주제들에 가치를 두고, 그것을 조직의 중심에 둔다면, 그게 시작일 거 같다. 왜냐하면 그것이 조직 활동이 중심적인 일이 되면 남자들이 그 대화에 참여해야 하고, 그 내용을 다룰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헤이즐 : 솔직히 말해서 나는 굳이 시스젠더 남성에게 초점을 맞출 필요는 없다고 본다. 다 알다시피, 시스젠더 남성들은 이론에서나 실천에서나, 회의들에서나, 누가 발언하는지, 누구의 발언이 힘이 있는 지에 관해서나, 기타 등등 문제에서 온갖 방식으로 토론을 지배하려 드는 경향이 있다. 우리가 이런 문화를 바꾸고 성폭력에 대한 대화를 발전시키기 위해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일은 어떻게 하면 시스젠더 남성들에게 이런 주제를 이해시킬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는 것보다는 어떻게 하면 우리의 공간이 가정 폭력이나 성폭력 생존자들에게 더 편안한 곳이 될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의 공간이 여성, 트랜스젠더, 논바이너리* 사람들도 동등한 발언권을 갖는 곳으로, 조직 작업과 이론 작업을 수행하는 모든 면에서 자신들의 목소리가 반영되고 중심적인 역할을 하는 곳으로 느껴질 수 있도록 말이다.

* 논바이너리(non-binary)는 남성과 여성 둘로만 성별을 분류하는 기존의 이분법적인 구분을 벗어난 종류의 성 정체성이나 성별을 지칭하는 말이다.

제이미 : 또 한 가지 중요한 건 진짜 위험한 지경에 이르기 전에 이런 대화를 하고 이런 주제를 던지는 것이지 않겠나? 성폭력이나 여성과 트랜스젠더에 대한 억압에 대해 얘기하는 것이 좌파 정치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일상이 된다면, 오랫동안 같이 일하고 동지로 여기며 존경했던 사람들이 그 동안 드러내지 않았을 뿐 실은 낡아빠진 성폭력에 대한 통념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갑자기 알게 되는 지경에 이르지는 않을 것이다. 거기에는 아주 깊은 배신감이 따른다. 그리고는 스스로에게 묻게 될 것이다. 세상에, 왜 이제 서야 이런 얘기가 나오게 된 것일까, 하고.

그리고 전반적으로 우리가 이런 일에 대응하는 방식에 있어서 극복해야 하는 큰 문제는 우리가 스스로의 공감 능력에서 멀어지게 하는 문화에서 길러졌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사회주의 운동에 참여하려면 정치적인 교육과 개개인들 간의 직접적인 연대를 통해 다양한 사회적 분열을 넘어서는 공감 능력을 회복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성폭력과 성차별이 운동에 명백하게 독이 된다는 사실을 이해해야만 한다.

혁명적인 사회 문화는 운동 전반에 퍼져 있는 억압에 강력히 반대하는 입장을 가져야 한다. 우리는 우리가 만난 사람들을 변화시켜야만 한다. 그런데 젠더 문제에 대해서는 좌파 조직들이 이런 두려움을 갖고 있는 듯하다. 정치에 무관심한 사람들에게 사회주의자가 되라고 하는 건 이미 대단한 요구이기 때문에 거기에 뭔가를 더 추가해서는 안 된다고 말이다. 사람들이 겁을 먹을 지도 모른다는 거다. 이는 그런 조직들이 시스 젠더 남성을 기본적인 정치적 주체라고 상정하고 있다는 우리의 주장과 딱 맞아 떨어지지 않은가? 페미니즘이나 퀴어 해방, 혹은 반인종차별주의가 낯설고 무섭다고 한다면, 무서워하고 도망갈 것 같은 그 정치적 주체를 과연 누구라고 상정한 결과일까?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사회주의자가 된다는 것은 이미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에 중요한 변화가 있다는 것이며, 그 때문에 혁명적 정치에 참여가 사회 변혁적인 것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 기사는 rs21 회원 Úna OS와 Kate B가 녹취를 풀고 편집한 것이다. 이 문제와 활동가들의 경험에 대한 더 자세한 얘기가 실린 팟캐스트 전체는 여기에서 들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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