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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범 묘지에서 출국 고유 인사를 드리는 권중희 선생(오른쪽)과 필자
ⓒ 박도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백범 선생님!

글자 그대로 대한 추위는 매서웠습니다. 그러나 사흘 내리 계속된 강추위도 흐르는 세월 앞에서는 두 손을 들지 않을 수 없나 봅니다.

어제부터 햇살이 따스했습니다. 오늘은 한결 더 풀렸습니다. 곧 남녘에서는 봄소식이 전해질 것입니다.

2004년 1월 27일 정오, 효창동 선생님의 묘소 앞에서 권중희 선생과 저는 큰절을 드리면서 선생님께 출국 고유(告由) 인사를 올립니다.

“백범 선생님! 잘 다녀오겠습니다.”
“선생님!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잘 다녀와.'
선생께서 흐뭇한 미소를 보내시며 우리의 장도를 축원해 주시는 옥음이 들리는 듯합니다.

1949년 6월 26일 오후 12시 30분 무렵, 서대문 네거리 경교장(현 강북삼성병원 본관)에서 “탕! 탕! 탕! 탕!” 네 발의 총성이 울렸습니다. 그 총탄에 우리나라 독립운동지도자요,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이었던 선생이 비명에 가셨습니다. 그 총소리와 함께 이 땅에는 민족정기도 허물어져 버렸습니다.

그 날로부터 55년, 조국은 조금도 변한 게 없습니다. 나라는 그제나 이제나 두 동강난 채 아직도 동족끼리 서로 총구를 겨누고 있습니다.

그 때의 삼팔선은 한 차례 동족상잔 후 휴전선으로 바뀌고, 더욱 공고하게 나라 한복판을 가로지른 철조망이 한 겹 두 겹 쳐진 채 서로가 서로를 미워하는 마음은 아직도 엄동설한입니다.

적확한 예언자

▲ 미국행 왕복 항공권을 마련해준 김명원씨(삼우설계소장)에게 감사한 마음으로 손수 쓴 백범어록을 드리는 권중희 선생, 귀국 후 성금을 보내준 독자에게도 원하시는 분은 써드릴 예정이시다
ⓒ 박도
“삼팔선 때문에 우리에게는 통일과 독립이 없고, 자주와 민주도 없다. 어찌 그뿐이랴. 대중의 기아가 있고, 가정의 이산이 있고, 동족의 상잔까지 있게 되는 것이다.”

선생이 생전에 남기신 어록은 적확한 예언자 말씀으로 당신이 운명하신 후 한 치 어긋남이 없이 그대로 오늘까지 이어져오고 있습니다.

백범 선생님!

선생님의 옥체에 총탄을 쏜 만고역적 안두희란 놈이, 대낮에 활보하면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을 두 눈 뜨고 볼 수 없었던 한 우국지사 권중희씨가 12년 동안 그 뒤를 쫓으며 응징하다가 끝내 명쾌한 배후도 가리지 못하고, 그 자가 다른 의인에게 맞아죽는 바람에 그만 표적을 잃고 방황했습니다.

한 독자가 저에게 권중희씨의 근황을 취재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제가 그 독자의 뜻을 받들어 권중희씨를 만났더니 백범 선생의 배후를 밝히기 위해 남은 방법은 미국 문서보관소밖에 가는 길이 없는데 가는 여비가 없다고 했습니다.

그 여비를 마련코자 몇 분에게 부탁했으나 거절당하고, 심지어 당신을 미국으로 보내주겠다고 한 국회의원들마저 3년이 지나도록 ‘꿩 구워 먹은 소식’이라 마지막 희망은 ‘로또 복권’ 사서 당첨되면 그 돈으로 미국에 머물면서 원도 한도 없이 비밀 해제된 문서를 들춰보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동포들이 모아준 여비

저는 그분 말씀 그대로 기사를 써서 인터넷신문 <오마이뉴스>에 올렸더니 네티즌들이 권중희 선생 미국 가는 여비를 모금하라고 저에게 명령했습니다. 저는 <오마이뉴스>의 전폭적인 협조를 받아 그 명령에 따랐습니다.

오늘(27일)까지 952분이 3745만여원을 보내주셨습니다. 성금을 보내준 분은 하루하루 벌어먹고 사는 일당 노동자에서 가난하고 이름 없는 백성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리고 미국 독일 중국에 사는 교포와 유학생도 멀리서 보내주셨습니다.

마치 선생님이 중국에서 독립운동 하실 때 보내준 성금도 대부분 국내 무지렁이들의 쌈지 돈이나 해외 동포들의 눈물겨운 품삯이었듯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기업가들은 제 이익을 위해 정상배들에게는 사과상자에서 이제는 차떼기로 검은돈을 갖다 바치지만 선생님의 배후를 밝히려 가는 저희 성금함에는 한 푼도 보내지 않았습니다.

아직도 백성들에게 사기치는 정상배들

그런 검은 돈으로 정상배들은 제 배를 불리고, 선거철이면 어리석은 백성들에게 사기 치면서 입만 열면 “구국의 화신 백범 선생”을 부르짖으면서 자기만이 애국애족한다고 백성들의 눈과 귀를 속여 왔습니다.

정말 이대로 가다가는 이 나라 살림이 거덜나고 국론이 분열되어 반쪽 나라마저 난파선으로 또다시 이민족의 혹독한 식민지 시대로 되돌아갈까 염려됩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든든한 것은 이제 차차 어리석은 백성들이 깨어간다는 것입니다. 깨어있는 백성만이 제대로 된 나라를 만들고 그 나라에서 복되게 산다는 평범한 진리를 체득해 가고 있는 듯합니다.

씨나 뿌리고 오겠습니다

▲ 참배객 일행(왼쪽부터 김명원, 광복회 이항증, 권중희, 박도, 권중희 선생 후원자 박찬원씨)
ⓒ 박도
출국을 앞두고 권중희씨는 동포들의 귀한 성금으로 미국까지 가서 선생의 암살 배후 실체를 밝히지 못할까 노심초사하고 있습니다.

그곳에서 서류를 열람해 본 전문가들의 말에 따르면, 약 500만 파일의 문건에서 한국 관계 자료를 찾고 그 중에서 백범 관련 문서를 찾는 일은 ‘솔밭에서 바늘 찾기’보다 더 힘들다고 합니다.

어느 멍청한, 베일 속의 배후 인물이 안두희에게 백범 암살 지령을 남들이 모두 알아보게 남겼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그분에게 우리는 최선을 다하되, 꺼져 가는 민족혼에 불씨나 지피고 굴절된 현대사를 바로 잡는 일에 씨나 뿌리고 오자고 달래드렸습니다.

민족혼이 살아있다면 우리 후손 중, 그 누군가가 해방 정국에 감춰진 그 베일은 말끔히 벗길 것입니다. 살아있는 저희는 그들에게 민족혼을 잃지 않게 깨우쳐주고 안타까운 사실을 기록으로 남기는 일입니다.

백범 선생만 생각하겠습니다

한 독자가 떠나는 저희에게 여비를 보태주면서 어려운 때는 백범 선생만 생각하라고 했습니다. 미국으로 가는 가방에다 제일 먼저 <백범일지>를 넣겠습니다. 그분 말씀대로 힘들 때마다 펼쳐보겠습니다.

백범 선생님!

낯설고 물선 미국 땅에 가지만 거기에는 200만 동포가 살고 있습니다. 모금 운동이 시작될 때부터 그 어느 지역보다 뜨거운 성원을 보내왔습니다.

애초에는 국내의 사학도를 모시고 가려고 했지만 그곳 교포들이 열 일 제쳐두고 도와주겠다고 제 메일을 뜨겁게 달구었습니다. 이도영 박사를 비롯한 아름다운 그분들의 모습과 함자는 제가 미국에 가서 만나 뵙고 한 분 한 분 소개해 올리겠습니다.

이 일의 모든 일은 공개리에 명명백백하게 진행시키고 있습니다. 미국에서, 그리고 귀국해서 다시 자세한 고유 인사 겸 보고 말씀 올리겠습니다. 어리석은 저희를 지켜주십시오.

2004년 1월 27일 효창동 선생의 묘지 앞에서

권중희, 박도 큰절 두 번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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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중희 선생을 미국으로 보내드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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