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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우리사회에 친일파 논쟁이 뜨겁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친일문제연구가인 정운현 <오마이뉴스> 편집국장이 지난 98년부터 1년여 대한매일(현 서울신문)에서 연재한 후 단행본으로 묶어펴낸 <나는 황국신민이로소이다>(개마고원 출간)의 내용을 '미리보는 친일인명사전' 형식으로 다시 소개합니다.

이 내용 가운데는 '을사오적' 등 익히 알려진 유명 친일반민족행위자는 물론 조선·동아의 사주를 비롯해 일반인들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은 '발굴 친일파' 등 40명 가량의 친일파들의 행적이 담겨져 있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친일문제에 대한 우리사회의 본격적인 논의를 촉진하는 차원에서 주2회 이를 연재할 예정합니다... 편집자 주)


친일조각가가 만든 남산의 백범 동상 1969년 서울 남산 중턱에 세워진 백범 김구 선생 동상 뒷면의 표지판. 이 동상은 친일조각가 김경승이 민복진과 함께 만들었다. 건립문과 백범의 약력을 쓴 박종화와 이은상도 친일경력 논란이 있는 사람들이다.

지난 1998년 11월 말 한 시민단체가 보낸 공문 한 통이 국가보훈처에 접수됐다. 발신자인 신시민운동시민연합(의장 고경철)측은 공문을 통해 “친일조각가 손으로 세워진 애국선열의 동상을 방치하는 것은 민족사의 왜곡행위로 뜻 있는 국민의 성금으로 다시 세워 민족정기 회복의 계기로 삼아야 한다”며 보훈처의 조치를 촉구하였다.

이 공문에서 신시민운동연합측은 ‘친일조각가’로 김경승을 지목하고는 “해방 후 역대 정권과 결탁해 비호를 받으면서 조각계의 거목으로 변신한 김경승이 그 더러운 손으로 민족사에 길이 남을 애국선열과 역사적 기념물을 제작했다는 사실은 반만년 문화민족임을 자부하는 우리 민족에게 견딜 수 없는 모멸감을 주는 반역행위”라고 지적하고는 “하루 빨리 친일반역자의 작품을 철거하고 국민들의 정성을 모아 다시 세워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 공문에서는 김경승이 제작한 애국선열의 동상으로 경남 충무 소재 충무공 이순신 장군상(1953년 제작), 남산 안중근 의사상(1959년 제작)과 백범 김구 선생상(1969년 제작), 도산공원의 도산 안창호 선생상(1973년 제작), 서울 종묘공원의 월남 이상재 선생상(1989년 제작) 등을 들었다.

두 형제, 일제 땐 친일미술가...해방후엔 화단 '원로' 군림

김경승(金景承, 1915∼1992년)은 우리 현대미술사에서 손꼽히는, 유명한 조각가다. 그는 서양화가 김인승(金仁承, 89세·미국 거주)의 친동생으로 두 사람은 형제 미술인으로도 유명하다. 두 사람은 일제 강점기부터 80년대까지 한국 화단(畵壇)의 원로로 군림해온 사람들이다.

이들은 일제 때는 조선총독부가 주최한 미술전람회에서 상(賞)을 휩쓸었고, 해방 후에는 교단과 화단에서 다시 명성을 날렸다. 특히 김경승은 국내의 대표적인 위인·애국선열들의 동상제작을 거의 도맡다시피 했다. 예인(藝人)으로서 이들 형제는 재능을 떨쳐왔지만 민족사에서는 비난을 면치 못하고 있다. 해묵은 미술사 한 페이지를 들춰 그 이유를 알아보자.

김인승·경승 형제는 1915년 일본 메이지(明治)대학 법문학부를 나온 지주 김세형의 6남매 중 장남·차남으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두 사람은 미술에 재능을 보여 학생미술전에서 수 차례 입상하였다. 1932년 김인승은 재능을 살리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가 도코(東京)미술학교 유화과에 입학하였다. 김경승도 2년 뒤 형을 따라 이 학교에 입학하였는데 과(科)는 형과 달리 조각과를 택하였다.

1887년 일본 메이지정부에 의해 관립학교로 세워진 이 학교는 소위 ‘서양미술’을 가르치는 일본 내 유일의 미술학교였다. 이 학교는 일본인 이외에도 조선·대만의 미술학도들을 청강생으로 받아 장학금을 주면서 미술교육을 시켰는데 이들 형제 이외에도 조선인으로 심형구(沈亨求·1908∼1962년)도 이 학교를 졸업하였다.

김인승과 심형구는 선전(鮮展·조선미술전람회의 약칭) 출품과 친일활동은 물론 해방 후 이화여대에서 재직하는 동안 반평생을 단짝으로 지낸 사이다.

지주의 아들로 태어나 부친에 이어 일본 유학

▲ 미술가 김인승
한편 김인승은 이 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평균 98점이라는 학교 최고점을 기록, 우등생으로 졸업(1937년)하였다. 재학 시절 그는 이미 일본 문부성이 주최한 ‘황기(皇紀) 2000년(1940년) 봉축기념전’에 출품, 입선한 것을 시작으로 화단에 얼굴을 내밀었다.

졸업하던 해인 1937년에는 제16회 선전(鮮展)에 〈나부(裸婦)〉를 출품하여 최고상인 ‘창덕궁상’을 수상하였다. 3·1만세의거 이후 소위 일제의 ‘문화통치’의 일환으로 시작된 ‘선전’은 1944년까지 23회나 개최되었는데 초기 서예나 4군자를 제외하고는 모든 부분의 심사위원들이 주최측인 총독부가 위촉한 일본작가였다.

따라서 선전에 출품된 조선인 작가들의 작품들은 일본인 심사위원들의 취향을 반영한, 왜색(倭色)이 짙은 작품들이 주로 입선되었다. 이들은 조선인 작가들이 민족적 현실을 표현하기보다는 단순한 자연미나 표현 그 자체만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작용하였다.

바로 이 ‘선전’에서 김인승은 1937년부터 연속 4회 특선하여 1940년 선전의 추천작가가 되었다. 이때 서양화 부문에서 추천작가로 오른 사람은 그를 포함해 심형구·이인성(李仁星) 세 사람뿐이었다.

형에 이어 동생 김경승 역시 ‘선전’에서 연속 입상하였다. 1939년 〈S씨상〉(흉상), 40년 〈목동〉(전신상) 등이 특선으로 입상하였고 41년에는 남자 입상(立像)인 〈어떤 감정〉으로 총독상을 받았으며 이듬해에는 〈여명〉이라는 작품으로 총독상을 2회째 수상하였다.

‘선전’에서 관록을 쌓은 그는 43년 마침내 추천작가가 되었다. 44년 그는 ‘선전’에 〈제4반〉을 출품하였는데 이는 애국반원인 조선여성이 ‘시국하의 총후(銃後)’에 열성적으로 나선 모습을 담은 것이다.

'시국색' 강한 작품...은연중에 전쟁협력 부추겨

김경승이 ‘선전’에 출품한 작품들은 추천작가로서 출품한 작품을 포함, 다섯 점 모두 모두 강한 ‘시국색(時局色)’을 띠고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일제 침략전쟁을 후방에서 지원하기 위해 식량증산이나 근로에 동원된 조선인들을 담은 것으로 이는 은연중에 전쟁협력을 부추기고 있다.

한편 이 두 사람은 일제하 대표적인 친일미술단체인 조선미술가협회에서 간부로 활동하였다. 1941년 2월 22일 시국하의 ‘회화봉공(繪畵奉公)’을 맹세하면서 탄생한 이 단체는 당시 조선총독부 학무국장 시오바라(鹽原時三郞)가 회장, 학무국 사회교육과장 계광순(桂珖淳)이 이사장,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의 학예부장 백철(白鐵) 등이 이사로 있던 관민합작 단체였는데 두 사람은 각각 서양화부(김인승), 조각부(김경승)의 평의원으로 활동하였다.

이 단체는 나중에 조선문인협회·선전미술협회·보도사진협회 등 11개 예술단체와 더불어 1943년 1월 국민총력조선연맹 산하의 예술가단체연락협의회를 구성하게 되는데 이들은 전람회를 열어 수익금을 국방헌금으로 바치기도 하였다.

김인승의 대표적인 친일행위는 그가 단광회(丹光會)에 참여하여 활동한 점이다. 이 단체는 ‘성전하(聖戰下) 미술보국(美術報國)에 매진한다’는 취지로 1943년 2월 조선인·일본인 화가 19명으로 결성됐는데 ‘선전’ 추천작가 중심의 최고 엘리트화가 집단이었다.

'조선 징병제 시행기념 기록화' 1943년 8월 조선에서 징병제가 실시되자 단광회 소속 조선인과 일본인 작가 19명이 4개월에 걸쳐 공동제작한 '조선 징병제 시행기념 기록화'. 대표적인 친일미술작품으로 꼽히는 이 그림 제작에 조선작가로는 김인승 박영선 심형구 손응성 이봉상 임응구 김만형 등이 참여했다.
이 단체에서는 1943년 8월 조선인 징병제가 실시되자 이를 기념하여 회원 전원이 4개월간 합숙하여 1백 호 크기의 〈조선징병제시행기록화〉(사진)를 제작하였다.

이 그림은 강제징집된 조선청년을 중심으로 조선군사령부 보도부장, 지원병훈련소장, 총력연맹 사무국 총장, 경기도지사, 친일파 윤치호 등이 등장하여 징병으로 나가는 조선인 청년을 믿음직스럽게 바라보고 있는 내용이다.

특히 이 그림은 인물 주위로 남산의 조선신궁(朝鮮神宮)·병사들의 행진모습 등을 곁들이고 있어 일본정신 고취와 성전(聖戰)참여를 조장하고 있다.

제작연대-작가 사인 등 일본식 표기

김인승은 이밖에도 1944년까지 세 차례에 걸쳐 열렸던 ‘반도총후미술전’에 운보 김기창(金基昶)·심형구·월전 장우성(張遇聖) 등과 함께 추천작가로 참여하였다.

또 그는 작품의 제작연대를 일본식 황기(皇紀)로 표기하였으며 ‘선전’ 출품작에는 작가 사인을 ‘김인승’의 일본어 발음인 ‘Jinsho, Kin’으로 표기하였다. 그의 친일의식을 보여주는 한 단면이라고 할 수 있다.

해방 후 이들 형제는 ‘친일미술가’로 낙인찍혀 ‘조선미술건설본부’에서 제외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그러나 이들은 도쿄미술학교 출신, ‘선전’ 추천작가 등의 화력(畵歷)을 앞세워 다른 친일미술가들과 함께 승승장구하였다.

김인승은 47년 이화여대 미술과 교수로 부임한 것을 시작으로 49년 제1회 국전(國展)추천작가·심사위원, 예술원 회원·목우회 창립 주도, 이대 미대학장, 미협(美協) 이사장 등을 지내면서 서양화 구상계열을 주도했다.

김경승 역시 국전 심사위원·예술원 회원 등을 비롯해 전두환 군사독재 시절 조각가로서 평통(平統)자문위원을 지내기도 했다. 특히 그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백범 김구·도산 안창호 선생·안중근 의사 등 애국선열의 동상을 도맡아 제작하였다. 이들 형제는 상복도 많아 문화훈장을 비롯해 ‘3·1문화상’까지 나란히 수상하였다. 남산 중턱에 서있는 백범 동상을 새로 만들자는 주장은 이래서 나오는 것이다.

나는 황국신민이로소이다 - 새로 밝혀 다시 쓴 친일인물사

정운현 지음, 개마고원(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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