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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내내 먼지 쏘이며 바깥일을 한 사람 백 명 정도가 씻고 나면 저러지 싶다. 군산 도선장 앞 바닷물은 땟국물 빛이다. 볼 때마다 그랬는데 토요일엔 푸르댕댕했다. 뭐지? 안개 때문에? 안개가 바닷물에 스며서 녹으면 푸른빛이 배어 나오나? 다른 날과 달리 말쑥한 바다 빛을 의뭉스럽게 내려다보고 있던 나는 바다 바람에 금방 포위 당했다.

91년 3월 대학 입학식 날. 언니와 둘이서 군산에 왔다. 바닷바람은 남도에서 올라온 언니와 나를 겁줬다. 그게 거슬린 언니는 나에게 목 폴라티 두 개를 사 주고 내려갔다. 그 때까지 나는 목까지 올라와서 간지럽고 깔끄런 목 폴라티 입는 걸 별로 안 좋아했다.

입학식이 끝나고 곧바로 하숙집으로 가지 않았다. 대신 버스 터미널에서 들고나는 '광주 고속' 버스를 바라봤다. 나는 고등학교 3년 내내 우리 동네에서 영광읍내까지 그 이름이 써 있는 버스를 타고 다녔다. 걷던 길, 만나던 사람들... 두고 온 것들만 생각났다. 해 질 무렵에야 터미널 앞 공중전화에서 집으로 전화를 했다. 울먹여지는 걸 겨우 참고 있는데 기운 센 바람이 어깨를 툭툭 건드리는 바람에 기어이 눈물을 쏟고 말았다.

토요일 한낮, 바다 위에 이는 물결은 자잘했다. 방학하는 날 한꺼번에 교문을 빠져나가면서 재잘대는 아이들 뒷통수와 닮아 있다. 유람선이 공단을 지나고 오식도를 지나칠 무렵 물결은 제법 굵어졌다. 속이 조금 욱욱거리더니 괜찮아졌다. 객실 바깥으로 나와 일부러 찬바람을 맞고 선 이들 얼굴은 저마다 아득하다. 그게 그거인 심드렁한 일상. 아직도 꿈이 있는 얼굴들. 그리운 얼굴을 품고 있는 청춘들. 가지런한 일상의 물결대로 따라 흐르면 왜 맘속에서는 멀미가 나는 걸까.

유람선은 계속 바다를 달렸다. 바다와 하늘 사이에 얇포름하게 저며 있는 안개는 우리가 기억하고 있는 빛을 다 잡아 먹었다. 딱 두 가지 빛만 보게 했다. 먼바다 색을 닮은 푸르스름한 옥빛, 습자지 세 겹쯤 덧대고 하늘을 보면 보이던 희멀건 암죽빛.

횡경도. 섬이 길어서 가로지르다 횡을 쓸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횡경도가 유람선 곁으로 슬슬 다가오자 안개도 잡아먹은 빛을 토해 냈다. 바닷바람에 혼자 외로워서 곰삭은 바위 빛, 바위섬에 드문드문 서 있는 소나무 빛...

방축도에는 떡시루를 절반으로 갈라놓은 듯 보이는 떡바위와 말 그대로 독립문을 닮은 독립문 바위가 있다. 안내방송이 아니었으면 그냥 지나쳤겠다.
관리도. 궁금한 게 있으면 잘 참지 못하는 섬이다. 유람선 옆으로 바짝 다가와 고개를 내밀고 있다. 조금 야단스러운 섬 이미지에 맞게 만물상 바위가 있다.

유람선은 선유도에서 쉰다. 소금물에 담가놓으면 떫은 맛이 우려지는 감처럼 안개도 오는 내내 바닷물에 우려져서 아주 희미해졌다. 그런데도 딱 30분만 섬을 둘러보고 다시 유람선으로 돌아와야 한다. 사람들은 내리자 마자 자전거 빌려주는 곳으로 달려들었다. '손님 찾기 달리기' 하는 것 같다. 저만큼 앞으로 달려가서 쪽지 하나를 줍는다. 거기에 적혀 있는 거를 빨리 찾아서 달려야 한다.

자전거를 타고 아무리 빨리 달려도 아쉬울 게 뻔하다. 그냥 걸었다. 선유도는 가제트 형사 팔처럼 쭈욱 쭉 늘어나면서 개발의 손길을 타게 생겼다. 반듯한 민박집과 술집 횟집도 여럿이다. 뭍에서 온 이들이 씨석대며 지나가도 섬사람들은 무던하게 굴을 다듬고 있다. 진안 마이산처럼 생긴 바위가 있어서 이름을 물었더니 망주봉 민둥바위라고 일러주신다.

막 달려가서 만난 선유도 해수욕장.

"쓸쓸해"
라고 말하면 지지리 궁상으로 보일 수 나이. 그게 조심스러워서
"오늘은 하는 일마다 왜 이러지? 일찍 들어가서 잠이나 잘까?" 처럼 다르게 말하는 법을 깨우친 사람들. 선유도 해수욕장도 속마음을 드러내는 나이를 넘어선 게 분명하다.
"오늘 별로야. 그래서 지금 잠자고 있는 거야."

낮잠 깨워 봤자 얼굴만 멀뚱멀뚱 바라보겠지 뭐. 되돌아 나왔다.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나무들은 그네끼리 무슨 신호를 주고받는가 보다. 섬에 있는 나무들도 단풍이 들었다. 바람 불 때마다 그네들끼리 부딪쳐서 탁탁탁 메마른 소리도 낼 줄 안다.

사람들이 날렵하게 유람선에 오르고 나서 섬은 곧 멀어졌다. 배가 지나가게 물살은 알아서 갈라지고 흰 물결을 일으켰다. 유람선은 허리에 한껏 힘을 주고 자기가 지나가는 길을 끌로 새기듯 깊게 파 놓았다. 물결은 씨익 웃으면서 물길을 지우고 덮는다. 유람선은 눈치 없이 내내 자신만만이다.

비응도에서 새만금까지 잇는 방조제 공사. 바다 위에 아주 긴 막대자석을 얹어놓고 있는 듯 보였다. 깝깝하다. 천식이 있어서 밤마다 그르렁거리고 밭은 기침을 하는 우리 집 아이 생각이 났다. 해 줄 건 없고 곁에서 보고 있으면 마음이 괴롭게 텅 비고 붕 떠서 어지러운.

군산에 가까워질수록 안개가 걷혔다. 자세히 보니 바다는 가려움증이 있어 보였다. 몸을 뒤틀고 배배 꼬았다. 안 돼 보였는지 바다를 세게 긁어 주는 파도가 있었다. 마지못해 슬렁슬렁 긁어주는 파도, 대놓고 모른 척 하기에는 맘이 약해 도망치는 파도. 객실 바깥에서 안으로 들어오니까 덩달아 나도 가려웠다. 찬 데 있다가 따뜻한 데 들어와서 그럴 거다. 긁어주라고 다른 누구에게 부탁하지 않아도 되는 가려움증이라 다행이다.

군산에 살면서도 내가 걸어 다니는 길 어디쯤은 바다로 닿아 있다는 생각을 않고 지낸다. 과연 얕게 보는 내 눈 그대로 평범한 작은 도시라고만 여기고 지낸다. 그런데 맘 먹고 조금 더 바깥으로 나오니까 공단을 끼고 있는 항구도시 모습이 보인다. 도시 옆구리에 몸을 걸치고 무심하게 오락가락 하는 바다가 낯설기도 하다.

유람선에서 내리며 턱까지 끌어올린 목 폴라티를 다시 반으로 접었다. '뭍에서 부는 바람은 시시하기까지 하군' 잘난 척을 해 본다. 군산에서 맞는 열 한 번째 겨울, 이제 더 이상 버스 터미널에 가서 '광주 고속' 버스를 보며 두고 온 그리움을 생각하지 않는다. 간지럽고 깔끄런 목폴라도 잘 입고 방 옷장을 열면 얇거나 두터운 목 폴라티가 여럿이다.

내가 낳은 아이는 군산이 고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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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면』 『소년의 레시피』 『남편의 레시피』 『범인은 바로 책이야』 『나는 진정한 열 살』 『내 꿈은 조퇴』 『나는 언제나 당신들의 지영이』 대한민국 도슨트 『군산』 『환상의 동네서점』 등을 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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