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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어붙은 파리 전경. 눈에 뒤덮인 도로와 얼어붙은 운하. 이런 추위 속에서 지금도 많은 노숙자들이 거리에서 밤을 지새우고 있다.
 얼어붙은 파리 전경. 눈에 뒤덮인 도로와 얼어붙은 운하. 이런 추위 속에서 지금도 많은 노숙자들이 거리에서 밤을 지새우고 있다.
ⓒ 한경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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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내에 외출하러 나갈 때마다, 시장 보러 나갈 때마다 지나치는 거리에서 그 노인을 볼 수 있었다. 파리 19구 지하철 볼리바역으로 내려가는 도로의 벤치 위에서 일상을 보내는 노인을 발견한 지가 벌써 1년이 넘었다. 벤치 옆에는 카트가 하나 놓여 있고, 이불이며 옷가지 몇 개가 얼굴을 내민 것으로 보아 SDF(정기 주거지가 없는 자) 노인임이 분명했다.

사실 파리에서는 길거리에서 노숙하는 SDF를 만나는 일이 드문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 노인은 묘하게도 내 눈길을 끌었다. 우선 양처럼 선한 얼굴을 하고 있는 노인은 구걸 따위는 하지 않았다. 걸인 앞에 반드시 놓여 있기 마련인 구걸통을 이 노인은 갖고 있지 않았다. 집이 없어 거리에 나앉아 있기는 하지만 자신이 구걸하는 걸인은 아니라는 것을 지나가는 통행인에게 보이기라도 하는 듯했다.

또 하나 특이한 점은 시간 나는 대로 무엇인가를 읽고 있는 노인의 모습이었다. 대부분의 SDF들이 온종일 누워서 자고 있거나 깨어 있더라도 술을 마시고 있기가 십상인데, 이 노인의 주변에는 술병이라곤 찾아보려 해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책 읽는 노숙자?

책을 읽고 있는 SDF. 뭔가 소설의 제목 같은 느낌이 든다. 아마 주위에서 보고 난 잡지 따위를 읽으라고 넘겨주는 모양이었으나 때로는 소설책이나 만화 따위를 읽고 있는 모습도 보였다. 안경까지 심각하게 집어쓰고 책을 읽는 노인의 모습을 볼 때마다 가슴이 저렸다.

이 노인이 항상 그 자리에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낮에는 종종 모습을 감추기도 하는데 밤에 덮고 자던 이불을 얌전히 개어서 벤치 구석에 올려놓고는 어디론가 사라진다. 혹시라도 단 돈 몇 푼이라도 벌겠다고 어디 가서 일품을 파는 것은 아닌지? 아니면 동네를 한 바퀴 도는 산책을 하러 가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개와 늑대를 분간할 수 없는 석양 무렵이 되면 이 노인은 항상 집에 되돌아오곤 했다. 파리 시에서 설치한 길거리 위의 공중 벤치이지만 그 노인에게는 소중한 집이었다. 집에 돌아와서는 이 노인도 남들처럼 저녁식사를 했다. 가끔은 바게트 빵에 정어리 통조림을 까서 먹는 모습이 보이기도 했고, 때로는 피자 조각을 먹고 있는 모습이 보이기도 했다. 벤치 위에는 반드시 음료수 병이 같이 놓여 있는 걸로 보아 누군가가 먹을거리를 가져다주는 듯했다. 적어도 굶어서 죽지는 않겠다는 작은 안심이 들었다.

이 노인 옆에 앉아서 무슨 사정으로 길거리에 내앉게 되었는지 물어보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이 지경까지 오게 된 자신의 지난한 삶을 타인에게 털어놓고 싶을까 하는 생각에 용기도 내지 못하고 시간은 흘러갔다. 행여라도 노인의 모습이 보이지 않으면 궁금한 생각이 들기까지 했다.

그런데 작년 가을부터 이 노인이 이사를 했다. 자신이 집으로 사용하는 벤치 뒷건물에서 공사를 하는 바람에 30여 미터 떨어진 가까운 거리로 이사를 간 것이다. 볼리바 지하철 앞 광장에 놓인 그의 새집 벤치는 많은 행인들이 지나가는 부산한 통로에 위치하고 있었다.

유난스럽게 춥고 스산했던 파리의 겨울

올 겨울 파리의 겨울은 유난스럽게 춥고 스산했다. 평균 영하 7, 8도까지 내려가는 혹독한 날씨의 연속이었다. 휑한 공터에 자리 잡은 그의 새집은 칼날 같은 매서운 바람을 막기 위한 아무런 보호막도 갖고 있질 못했다. 파리에는 드물게 내리는 눈까지 와서 질퍽하게 눈이 녹은 도로 위에다 젖은 담요를 깔고 밤을 새우는 노인을 보며 마음이 불안해졌다. 하루하루 늘어나는 담요 수로 보아 주위에 사는 주민들이 담요 하나씩 가져다주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담요를 아무리 여러 장 두르고 있다 해도 물리칠 수 있는 추위가 아니었다. 나는 이 노인이 밤에는 벤치 바로 뒤에 있는 시장 안에 들어가 밤을 지새우는 게 좋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밤이면 자물쇠로 문을 잠그긴 하지만 적어도 차가운 밤 공기를 면할 수는 있을 듯했다. 그러나 노인은 자신의 집을 떠나지 않았다.

한 열흘 전쯤 파리의 기온이 영하 10도로 떨어지면서부터 노인은 잠자리를 옮기지 않을 수 없었다. 벤치 바로 앞에 놓여 있는 버스정류장은 그나마 유리로 3면이 둘러쳐져 있어 어느 정도 바람을 막을 수가 있었다. 그러나 아침이 되어 버스가 새로 운영하게 되면 어디서 나타났는지 경찰이 나타나 자리를 옮기라고 했다.

날씨가 조금 풀어진 지난 일요일인 18일, 노인이 다시 자기 집에 돌아왔다. 날씨가 풀어지긴 했어도 냉기가 소록소록 솟아나는 길거리 위에 담요를 깔고 누워 자는 노인의 모습이 마지막 모습이 될 줄이야….

노인의 마지막 집이었던 벤치 위에 놓여진 꽃송이들. 나도 장미 한 송이를 바쳤다.
 노인의 마지막 집이었던 벤치 위에 놓여진 꽃송이들. 나도 장미 한 송이를 바쳤다.
ⓒ 한경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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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같이 지나다시피 하는 그 거리를 나는 월요일, 화요일 이틀 동안 지나지 않았다. 어제(22일) 수요일 오전 장을 보러 그곳을 지나가는데 잔뜩 쌓여 있던 노인의 짐과 담요들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깨끗이 비워진 벤치 위에는 꽃 몇 송이와 초 등이 놓여 있었다. 벤치 등 위에는 이 노인의 죽음을 알리는 공고가 붙어져 있었다. '작끄'라는 이름의 이 노인의 나이는 78세. 월요일 오전 이른 시각에 죽어 있는 노인의 시체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갑자기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지나가는 통행인들이 혀를 끌끌 차며 지나갔고, 일부는 가던 길을 멈추고 연민에 가득 찬 시선을 던지기도 했다. 30대 중반으로 보이는 한 마담이 이건 우리 모두의 탓이며 길거리에서 이렇게 얼어 죽어 나가는 작끄가 한두 명이 아니라며 흥분해서 토를 달았다.

마침 그곳을 지나던 50대 초반의 중년남자가 말을 받는다. SDF가 길거리에서 죽어나가는 것이 왜 우리 탓이냐고. 우리가 노숙자들을 다 집에 데려와 재우게 해야 되겠냐고….

이들이 이렇게 비참하게 죽어나가는 것은 저 위에 있는 정치권자들의 탓이라고 한마디 하자, 옆에 있던 30대 중반의 흑인 하나도 맞는 말이라며 맞장구를 친다. 새로운 사람들이 다시 가세하면서 이들은 열띤 토론을 벌이기 시작했다.

벤치 위에 붙여있는 '사망 통지서'.
 벤치 위에 붙여있는 '사망 통지서'.
ⓒ 한경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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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통지서' 내용

"78세로 추측되는 작끄 노인이 마지막 생을 보냈던 이 벤치에서 19일 월요일 새벽에 사망하였다. '주민들이 너무 많은걸 갖다줘'라고 말했던 노인은 잘 듣지 못했다. 벤치 위의 그의 존재가 주변 사람들을 힘들게 하고 불편하게 한건 사실이다. 통행인이여, 주민들이여 그러나 그의 부재가 우리를 더욱 불편하게 하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시길. 그의 영혼에 평화가 깃들기를."


저세상에선 추위 없는 따뜻한 곳에서 편히 지내시길

한 십여 분 이들의 얘기를 듣고 집에 들어온 기자는 온몸이 으슬으슬 떨리는 것을 느꼈다. 얼마 전에 약 없이 힘들게 물리쳤던 감기 기운이 다시 접근해오고 있는 중이었다. 겨울 한낮에 10여 분을 밖에서 서 있어도 감기에 걸리는 상황에 작끄 노인은 계속해서 밤을 새웠으니….

오후에 다시 그 앞을 지나치는데 누군가가 쓴 편지가 놓여 있었다. 사망자의 이름이 작끄가 아니라 로랑이고, 나이도 78세가 아닌 87세라는 내용이었다.

나는 사망공고를 내붙인 '거리 사망자 협회'에 전화를 넣었다. 이들에 의하면 사망자가 신분증을 갖고 있지 않아서 확실치는 않지만 사망자의 이름이 작끄. 성이 로랑일 가능성이 많다고 했다. 1933년생으로 올해 76세였다. 현재 경찰이 이 이름으로 신원조회를 하고 있는 중인데 만약 가족을 찾게 되면 가족에 의해 장례가 치러지고, 가족이 나타나지 않을 경우엔 시에서 시립묘지에 장례를 치른다고 한다.

2008년 한 해에 프랑스에서 377명의 SDF들이 거리에서 죽어갔고 올해에 공식적으로 나온 수치는 17명이라고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훨씬 더 많은 자들이 길에서 죽어가고 있는 상황이라고 한다. 길거리에서 노숙하고 있는 자들의 평균 수명은 48세라고 한다.

76세의 작끄 노인은 어쩌면 최근에 길거리에 나앉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가 76년간 끌고 다녔던 삶의 흔적과 비밀은 그의 죽음과 함께 끝이 났다. 조만간 무덤 속에 안치될 그는 자신의 비밀을 안고 떠났다. 늦게나마 동네사람들이 바치는 꽃 한 송이 한 송이가 그에게 작은 위안이라도 될까?

변변치 않은 이 글을 작끄 로랑 노인에게 바친다. 저세상에서는 추위가 없는 따뜻한 곳에서 맛있는 것 많이 드시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내내 함께 살 수 있게 되기를….


태그:#노숙인, #파리, #작끄 로랑, #길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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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가, 자유기고가, 시네아스트 활동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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