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26일 오후

매미의 죽음
녀석들의 산란 흔적을 좀더 정확히 보기 위해 확대경을 준비했다. 매미들의 산란 흔적은 아주 작았다. 일종의 줄기 방향대로 찢어진 모양이었다. 확대경으로 갈라진 나무 틈 사이를 들여다 보았다. 산란흔적을 보니 매미가 아주 어렵게 알을 낳았다는 것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산란 흔적은 한마디로 나뭇가지를 줄기 방향으로 즉 나무의 목질 방향대로 섬유질을 갈라 놓은 흔적이었다.

세로로 1cm 가로로 2,3mm정도. 매미의 산란은 처절했을 것이다. 아무리 나뭇가지의 섬유질 방향대로라고 하지만 단단한 가지를 작은 곤충의 꽁지에 달린 산란관이 벌려 놓으려면 거기에는 엄청난 힘과 인내심 그리고 고통이 따랐을 것이다. 사람이 송곳으로 그런 흔적을 만든다고 해도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것도 한번도 아니고 여러 번을 한꺼번에 한다고 치면 더더욱 그럴 것이다. 매미의 산란에도 분명 산고가 있었던 듯 했다. 매미도 사람들처럼 산란을 하다가 죽을 수도 있을까? 단단한 나무 표면에 산란관을 박아 넣기 위해 전신에 힘을 주고 용을 쓰다 보면 기진맥진하거나 죽을 수도 있지 않을까?

산란을 한 매미 암컷은 어떻게 될까? 매미가 땅 위에서 살 수 있는 시간을 고려해 볼 때 산란을 한 매미는 이내 죽을 것 같았다. 2주 정도의 시간 사이에 짝을 찾고 교미를 하고 산란을 하고 그것마저도 벅찬 삶의 일정이었을 것이다. 매미 소리가 잦아 든 10월 말의 정원에도 매미들은 있었다. 물론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 죽은 채로 말이다.

10월29일

정원 여기 저기에서 매미들의 사체를 확인할 수 있었다. 매미들의 사체의 형색도 가지가지였다. 보도블럭이 깔린 정원 둘레의 길 모퉁이에 먼지가 겹겹이 쌓인 채로 뒤집어져 있는 녀석, 6개의 다리로 가느다란 나뭇가지를 꼭 부여잡고 있는 녀석, 겉으로 보아서는 매미인지 아닌지 구분이 안될 정도로 부패해서 푸른 곰팡이를 온 몸에 뒤집어 쓰고 있는 녀석 등등 그들의 죽음에는 어떤 차이가 있었을까 하는 의문을 불러 일으켰다.

▲ 마치 살아 있는 매미처럼 보이지만 죽은 채 나무가지에 매달려 있는 것이다

ⓒ 박성호
가느다란 나뭇가지에 붙은 채 죽음을 맞이한 녀석의 상태는 정말 신기했다. 한마디로 곤충 박제 같았다. 외관상으로 보아서는 죽은 녀석인지 살아 있는 녀석인지 구분이 안될 정도였다. 여름에 그런 실수를 한 적이 있었다. 아무 가까이 가도 꼼짝도 안길래 죽은 녀석인줄 알고 덥석 손으로 잡으려고 하는 순간 냅다 줄행랑을 치는 녀석이 있었다. 녀석은 도망치면서 ‘내가 죽은 줄 알았지’라고 나를 비웃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외관상으로 전혀 변하지 않은 매미의 사체를 보고 잠깐이나마 살아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녀석은 계절을 이길 수 있는 초능력 매미는 아니었다. 손으로 나뭇가지에서 떼어 내려고 해 보았는데 쉽지 않았다. 녀석은 6개의 발이 나뭇가지를 강하게 감고 있었다. 죽음의 순간에 살기위해 용을 쓴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녀석의 신체 중에서 변화가 있었다. 바로 눈이었다. 신체의 다른 부위는 정말 살아 있는 매미와 정말 다를 바 없었는데 유독 눈만 흰색을 띄고 있었다. 마치 흰 눈을 가진 어떤 특정한 종처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분명히 녀석의 눈은 죽음으로 인한 변색이었다. 왜 몸 전체는 하나도 부패하지 않았는데 눈만 색깔이 변한 것일까?

▲ 만져 보지 않고 죽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은 눈 색깔때문이다. 원래 매미의 곁눈은 검은색...

ⓒ 박성호
푸른 곰팡이를 뒤집어 쓴 녀석과 달리 전혀 부패를 하지 않은 이 녀석은 죽음의 장소를 잘못 선택한 것일까? 잎이 큰 나무, 그것도 잎과 잎이 겹겹이 가려서 비가 오더라도 전혀 비를 맞지 않을 만한 장소에서 생의 마지막 순간을 맞이한 듯 했다. 포름알데히드 덕분에 죽은 후에도 부패하지 않고 안치되어 있다는 사람들 생각이 났다. 죽어서도 시신이 보존된 통치자들을 보면 유독 사회주의권 인물들이 많았다. 레닌(1924), 불가리아의 디미트로프(1949), 구 소련의 스탈린(1953), 구 체코슬로바키아 고트발트(1953), 호치민(1969), 앙골라의 네트(1979), 가이아나의 바남(1985), 모택동(1976) 그리고 김일성(1994). 이중에서 앙골라와 가이아나의 통치자를 제외하고 보면 모두 사회주의권 인물들이었다. 즉 사회통합적인 측면에서 죽은 이들을 이용한 듯 하다.

물론 살아 생전 그의 모습을 보존하는 것이 죽은 이에 대한 예의라는 측면도 있지만 다분히 통치를 위한 정치적 측면이 더 강했을 것이다. 유독 그 쪽 사회들이 개인에 대한 우상화에 집착하는 이유가 뭘까 궁금하다. 모름지기 이 세상의 생명체란 죽으면 다시 흙으로 다시 자연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것이 죽은 생명체의 영혼도 좀더 편안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부패하지 않은 녀석은 마치 우리가 어릴 때 곤충채집을 해서 알코올이나 포르말린을 사용해서 만든 곤충표본 같았다. 매미를 촬영하면서 늘 생각하던 것이지만 사실 나는 곤충 표본이 못마땅하다. 물론 연구나 교육의 효과가 분명 있을 터이지만 살아 있는 동물을 포획해서 영원히 썩지 않는 존재로 만들어 감상한다는 것이 왠지 내키지 않는다. 사냥을 해서 잡는 포유류 같은 것에 비해 상대적으로 개체수가 많다고 하더라도 개별 생명으로 보면 비참한 것이기는 마찬가지일 것이다. 어떤 곤충 사이트를 보면 마치 자기가 뭔가를 포획해서 자신의 전시물로 만든 것을 자랑하는 이들이 있었는데 그들이 무슨 생각, 무슨 목적으로 그 일에 열광적인지가 의문스러웠다. 나도 촬영을 하면서 가까이서 그리고 통제된 상황에서 갓 우화한 매미의 색깔 변화를 기록하기 위해 신선한 개체들을 집으로 가져 온 일이 있었지만 그때마다 다음 날 아침 돌려 보내주곤 했다. 늘 하는 이야기지만 내가 하는 알량한 작업으로 아무리 작은 곤충이지만 남의 삶에 누를 끼치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부패하지 않은 녀석은 죽을 자리를 잘못 선택한 것이다. 차라리 비와 서리를 맞아 몸이 부패하여 푸른 곰팡이로 덮일 망정 다시 흙으로 빨리 돌아가 편안한 안식을 취하는 것이 나았으리라 생각된다.

10월30일 오전

▲ 죽음 매미의 몸을 덮고 있는 녹색분말의 정체는 곰팡이이다

ⓒ 박성호
작은 막대기 하나만 올리면 닿을 만한 높이에서 여름이 끝나고 잘 보이지 않던 매미 사체 한 구를 발견했다. 온몸 구석 구석을 푸른 곰팡이가 점령하고 있었다. 말 그대로 연한 청녹색의 곰팡이들이었다. 이 푸른 곰팡이가 페니실린의 재료로 쓰인다는 그 푸른 곰팡이인지는 알 수 없었다. 마치 예전에 할머니가 제기를 닦을 때 놋그릇에 묻어 있던 그 푸른 녹의 색깔과 같았다. 막대기로 녀석의 몸을 나무에서 떼어 내려고 하자 푸른 곰팡이 먼지가 일었다. 그리고 녀석의 몸은 땅으로 떨어졌다. 곰팡이 먼지가 엄청났다. 거의 내 눈에 튀어 들어갈 정도였다. 눈이 따가웠다. 마치 실명이라도 할 것처럼 허둥지둥 눈을 비벼댔다. 비벼댈수록 눈은 더욱 더 충혈되었다.

매미를 뒤덮고 있는 곰팡이의 실체는 동충하초가 아니었을까?
▲ 곰팡이를 뒤짚어 쓰고 있는 이녀석의 사체는 곰팡이 때문인지 속 텅비어 버렸다

ⓒ 박성호
잔디밭에 떨어진 녀석의 사체를 자세히 들여 다 보았다. 곰팡이들의 위력도 대단했다. 꽁지에 3밀리미터 정도 크기의 둥근 구멍이 나 있었고 속은 비어 있는 것 같았다. 우화를 하지 못하고 죽은 매미의 사체 내부의 물질들을 개미들이 야금 야금 빼내 가던 모습이 연상되었다. 이렇게 푸른 곰팡이를 뒤집어 쓰고 있는 매미의 죽음이 과연 자연적인 것이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이유는 아무리 눈비를 맞았다고 하더라도 눈비가 오지 않는 화창하고 건조한 날에는 사체가 다시 마를텐데…. 그 정도로 곰팡이가 핀다는 것은 납득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좌우지간 생태계에서 개미나 곰팡이나 둘 다 매미의 사체를 처리하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래도 둘 중에서 더욱 무서운 존재는 곰팡인 듯 했다. 매미와 곰팡이의 관계를 골똘히 생각하다 보니 한가지 떠오르는 기억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동충하초였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나는 급히 집으로 올라와 책꽂이에서 한 뭉치의 자료집을 뒤지기 시작했다. 아내는 갑작스러운 나의 그런 행동에 이상한 눈길을 보내왔다. 아내에게 자초지종을 이야기할 겨를이 없었다. 마치 대단한 발견이라도 한양, 아니 정확히 내가 대발견을 눈앞에 두고 있는 양 나의 가슴은 설레고 있었다. 그 자료는 과거를 기약하며 예전에 갈무리를 해 놓은 것들이었다. 한때 동충하초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생각하고 이것 저것 조사한 적이 있었다. 물론 기획조사 단계를 넘기지 못하고 계획은 무산되었지만 여러 가지 자료를 접하면서 정말 신기한 생명체라는 생각을 했었다.

곤충에 몸에서만 서식하며 결국 살아 있는 곤충을 죽음으로 몰고 간다는 동충하초도 곰팡이인 것이다. 동충하초란 겨울에는 벌레(蟲) 상태로 있다가 여름이 되면 버섯(草)이 된다는 뜻에서 유래한 말이다. 이 동충하초의 기주 곤충에 매미도 포함되어 있다고 알고 있었기 때문에 혹시 이 푸른 곰팡이들이 동충하초는 아닐까 싶었다. 동충하초는 식물에서 번식하는 일반 버섯과 달리 동물성 단백질(곤충)을 영양원으로 곤충의 몸에서 자라는 일종의 버섯이라고 한다. 즉 동충하초(冬蟲夏草)는 곰팡이의 일종인 동충하초균이 주로 온·습도가 높아지는 시기에 살아있는 곤충의 몸 속으로 들어가 발육 증식하면서 기주(寄主) 곤충을 죽이고 얼마 후 자실체(子實體)를 곤충의 표피에 형성하는 일종의 약용버섯이다. 요즘 사람들이 동충하초 동충하초 하는 것은 일반 버섯과 달리 우리 사람의 몸에 가까운 동물성 단백질을 영양원으로 해서 자라는 버섯이기 때문에 약효과 있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그 만큼 동충하초는 여러 가지 면에서 신기한 존재다. 동충하초의 이름은 어떤 곤충을 숙주로 해서 자라는가에 따라 달라진다. 숙주가 되는 곤충은 나비목(붉은동충하초:Cordyceps militaris)·매미목(매미동충하초:C. sobolifera)·벌목(벌동충하초:C. sphecocephala), 그 밖에 딱정벌레목·메뚜기목 외에 거미에게도 기생하는 것도 있다.

▲ 남자의 성기처럼 생긴 이것이 바로 문헌상 최초로 나타나는 동충하초 '매미동충하초(독버섯)'

ⓒ 산림청인터넷사이트
매미를 뒤덮고 있는 곰팡이를 보면서 굳이 동충하초를 떠 올린 것은 바로 문헌상 나타나 있는 최초의 동충하초가 숙주로 삼고 있었던 동물이 바로 매미였기 때문이다. 동충하초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 최초의 문헌은 10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082년 중국의 문헌 '증류본초(證類本草)'에 선화(蟬花)가 등장한다. 매미 선(蟬) 꽃 화(花), 즉 선화란 매미에 핀 꽃, 매미를 숙주로 해서 자란 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꽃은 겨울에는 매미의 몸에서 곰팡이 상태로 자랐을 동충하초다.

하지만 그때 찾았던 자료를 다시 한번 검토하면서 내린 결론은 매미를 뒤덮고 있는 푸른 곰팡이를 동충하초라고 보기는 어렵다는 쪽이었다. 자료에 의하면 매미동충하초는 땅속에 있는 죽은 매미 유충의 몸에 기생하여 머리부분에서 버섯이 땅 위로 돋아 나온다. 물론 성충이 죽어서 땅에 떨어져 흙에 묻히면 곰팡이가 발생할 수도 있겠지만 나무에 매달려 있는 놈에게서 동충하초가 자랄 것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한마디로 푸른 곰팡이를 동충하초가 아닐까 생각한 것은 하나의 호기심 많은 한 사람의 해프닝으로 끝나 버렸다.

문헌상 최초의 동충하초-매미동충하초
매미동충하초(Cordyceps sobolifera)

자낭균류 동충하초과의 버섯.
분류 : 동충하초과
분포지역 : 한국 ·일본 ·중국 ·인도 ·미국 등지
서식장소 : 정원, 산림내의 지상
크기 : 높이 5∼6cm

매미버섯이라고도 한다. 봄 ·여름에 정원이나 산림 내의 지상에서 발생한다. 균류가 곤충의 유충 ·번데기 ·성충 등에 기생하여 발생하는 버섯을 동충하초라고 하며, 이 균은 땅속에 있는 죽은 매미 유충의 몸에 기생하여 머리부분에서 버섯이 땅 위로 돋아 나온다.

버섯은 곤봉 모양으로 높이 5∼6cm인데, 머리와 자루의 두 부분으로 구분된다. 머리부분은 타원형으로 부풀고 황갈색이며 표면에 잔 돌기가 덮여 있고, 자루는 백색 곤봉 모양으로 가늘어진다. 머리부분의 잔 돌기들은 표층부에 매몰된 자낭각(子囊殼)의 주둥이이고 술병 모양을 이루며 그 속에 8개의 실 모양이면서 무색인 포자가 들어 있다. 약용한다. 한국 ·일본 ·중국 ·인도 ·미국 등지에 분포한다.

–두산 대 백과 사전-


곰팡이에게 육신을 점령당한 놈이든 섞지 않은 채 굳어 있던 놈이든 죽음을 맞이했을 지언정 모든 생명체가 언젠가는 다시 흙으로, 자연으로 돌아가야만 하는 것이 자연의 섭리이기에 안타까워 보이지는 않았다. 오히려 매미의 우화를 관찰할 때 간혹 발견된 유충들의 죽음에 비하면 비록 지상에서 햇빛을 보며 살았던 날이 며칠 되지 않았지만 적어도 자기 명대로 살다가 죽었다는 의미에서 호상(好喪)이었던 것 같았다.

한번의 여름동안 반포의 아파트 정원을 관찰하는 동안 이렇게 수많은 매미들이 우화하고 그리고 먹고 산란하고 죽어갔다. 아마 내가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종을 이어가기 위한 노력, 녀석들의 교미의 순간도 있었을 것이다. 교미의 순간은 결국 나에게는 해를 넘겨 이루어야 할 숙제로 남아 버렸다.

녀석들은 2주 아니 3주를 넘기지 못하고 죽어갔지만 녀석들의 죽음은 끝이 아니었다. 바로 녀석들이 산란을 해 놓은 매미 알들이 다가올 겨울을 무사히 넘긴다면 그들은 또 다른 여름을 치열하게 살게 될 것이다.

10월초까지 나는 아파트 정원에서 매미 소리를 들었다. 의외로 늦은 여름 아니 이른 가을까지도 살아 있는 매미들이 있었다. 그리고 10월 중순에 접어 들면서 아파트 정원에는 매미소리 아니 매미의 존재를 느낄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의 흔적은 여기 저기 남아 있었던 것이다. 죽은 사체로 아니면 우화를 하고 난 탈피각으로….

한 시인이 노래한 매미의 죽음
글바람 문학회 한석우 동인 작품

인터넷을 검색하다 한편의 시를 찾았다. 매미의 죽음을 논픽션이라는 다큐멘터리가 아니라 시적인 영감으로 접근한 것이 마음에 와 닿았다. 그래서 매미의 죽음을 소재로 한 시 한편을 소개합니다.

가벼운 죽음의 무게

가을 초입으로 들어선 숲을 걷다
여름날의 잔해를 본다
실편백 나무둥치를 꽉 붙들고 엎드린
매미의 허물, 허물 안 텅 빈 자리
회갈색 빈 방에 고여있는
죽음의 무게가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손가락 끝에서 바스락거린다
겉옷을 가지런히 벗어두고 어딜 가셨나
지난 계절
편백의 이파리를 가늘게 흔들던
숲 속 공기의 흐름을 뱃심 하나로 되작거리던
이 가벼운 죽음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무게를 가늠해보는데

껍데기 안은 아직 여름이다
해마다 어둠이 통통히 여물던 땅 속,
저 적막한 土棺 속에서 배냇짓할 적에
자장가처럼 아련하게 들어오던 것들이 되살아난다
편백의 뿌리가 쩝쩝 입맛을 다시며 물을 빨아올리는 사이
물관을 따라 이파리의 정점을 향해 출렁이던 물분자가 잠시 머뭇거린다
빛을 향해 쭉쭉 기지개를 펴는 나무의 생장점이
마분지 같은 땅을 두드리던 감촉으로 바뀌기도 한다 가슴 설레던
누군가의 발소리가 두런거리고
관 뚜껑이 열리는 순간

죽음이 깃든 매미의 허물이 다시 퍼득거린다
손바닥이 뜨겁다
숲이 후끈 달아오른다

껍데기 안은 아직 여름이다


반포의 여름은 끝이 났다. 물론 유독 끈질긴 모기라는 녀석만 여름을 사는 존재라는 것을 망각하고 버티고 있다. 그러나 분명 반포의 여름은 끝이 났다. 아내에게서도 여름은 끝이 나 있었다. 가을 옷을 찾아서 정리하고 여름에 입던 옷 중의 일부를 세탁소에 가져다 줘 내년 여름을 준비하는 것 같았다. 가을이 되면 사람도 동물들도 식물들도 다들 여름철 그들의 모습과는 다른 모습을 하고 살아가는 것이다.

나는 반포의 여름을 싫어 했다. 서울 생활 12년째에 접어 들어 마포에서 반포로 이사를 온지 이제 일년, 단 한번의 여름을 겪어 보고서 나는 반포의 여름을 증오하게 되었다. 반포의 매미는 낮과 밤 구분이 없었다. 밤에도 녀석들의 소리는 내 귀속에서 울려 퍼졌다. 어떤 때는 이명(耳鳴)현상 아닌가 하는 착각을 하기도 했다. 마치 예비군 훈련 가서 사격을 하고 나면 그 총소리가 몇 일이 지나도록 귀속에서 계속 나는 것처럼 낮에 울던 매미 소리가 너무 지독해서 밤에도 내 귀 속에서 울리는 게 아닌가 싶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반포의 매미가 밤에도 울어대는 것은 이명현상이 아니라 정말로 울고 있는 것이었다. 그 소리가 지긋지긋한 만큼 반포의 여름을 싫어 했던 것이다. 그런데 두 번째 여름을 넘기고서는 달라졌다. 매미 때문에 싫어졌던 반포의 여름이지만 그 반포의 여름 안에서 치열하게 생명을 이어가고 있는 매미의 생활을 들여다 보고는 반포의 여름이 좋아졌다. 그리고 아쉽게 끝이 나버린 반포의 여름을 다시 기다리게 되었다. 이 가을이 끝나고 겨울이 오고 다시 봄이 오고 시간이 흐르면 반포에는 새로운 매미 생명체가 탄생할 것이다. 그 시기가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애미가 힘들여 나무 목질 속에다 낳은 알들이 부화를 할 것이다. 나는 그 새로운 생명체들을 기다린다.

▲ 한여름의 기록 '반포매미 제작현장' 한 계절을 매미에 빠져 산 나는 지금도 반포의 매미를 찰영하고 있다

ⓒ 박성호
여기까지가 바로 내가 만든 반포매미에 관한 다큐멘터리 ‘한여름의 기록-반포매미’ 1편의 내용이다. 우연히 죽음을 맞이하고 있는 매미를 아파트 현관에서 발견하면서 시작된 매미의 일생에 대한 기록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일차적으로 한번 정리를 해 놓는다는 의미에서 그때까지 촬영한 테이프로 1편을 만든 것이었다. 이 이후로 촬영된 내용을 가지고 2편을 만들 예정이다. 아마도 1년 내지는 2년의 시간이 더 걸릴 것으로 예상된다. 촬영을 하면서 새로 생긴 의문과 산란 이후 이어지는 부화 그리고 교미의 순간을 더 담게 될 것이다. 나아가 반포에는 어떤 종류의 매미가 살고 있는지, 매미 종류에 따라 다른 울음 소리의 비밀은 무엇인지를 담고 싶다.
2003-04-01 18:16 ⓒ 2007 OhmyNews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드가의 다큐멘터리 이야기(www.degadocu.com)에서 제공합니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유료방송 채널에서 교양다큐멘터리를 주로 연출했, 1998년부터 다큐멘터리 웹진 '드가의 다큐멘터리 이야기'를 운영. 자연다큐멘터리 도시 매미에 대한 9년간의 관찰일기 '매미, 여름 내내 무슨 일이 있었을까' 2016년 공개, 동명의 논픽션 생태동화(2004,사계절출판사)도 출간. 현재 모 방송사에 근무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