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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뭄 끝의 비는 반가움이지만 강수량이 지나쳐 물난리나 홍수를 몰고 오는 날이면 같은 비가 걱정거리로 돌변한다. 우산을 들고 나가야 하는 것을 생각하면 비 오는 날은 불편한 하루로 여겨질 수도 있다. 하지만 우산 쓰고 빗속을 걸어가며 데이트를 즐길 생각에 젖은 연인들에겐 사랑의 날이 될 것이다. 일기예보에 신경을 쓰지 못해 우산을 들고 나오지 않았는데 갑자기 퍼붓는 비는 물에 빠진 생쥐의 운명을 사람들에게 강요한다.

하지만 카메라를 손에 든 사람에게 비는 뜻밖의 작품으로 사람을 유혹하는 멋진 예술가이다. 준비해야 할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냥 우산을 받쳐들고 동네로 나가 골목길을 어슬렁거리고 돌아다니며 세상의 풍경을 좀 더 섬세하게 살펴보고 그것을 사진에 담기만 하면 된다.

그렇게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비의 작품을 하나둘 모으면 상당히 볼 만한 것들이 많다. 동네의 골목을 어슬렁거리며 사진에 담아온 작품들을 어디 한번 감상해보시라.

차에 맺힌 물방울
 차에 맺힌 물방울
ⓒ 김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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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뜻 보면 오돌토돌한 벽면에 파란색 페인트를 칠해놓은 것 같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비는 이 작품을 그릴 때 골목에 세워놓은 누군가의 트럭을 이용했다. 사실 예전에 어떤 화가 중에 물방울만 그리던 물방울 화가가 있었다. 섬세함으로 보건데 이 정도면 그 화가에 못지 않을 듯 싶다. 제목? 파란색에다 색이 좀 짙은 감이 있으니 심해를 꿈꾼 빗방울 정도로 해두자.

비에 젖는 나리꽃
 비에 젖는 나리꽃
ⓒ 김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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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의 아파트 단지로 들어가니 화단에 가꾸어 놓은 나리꽃이 눈에 들어온다. 나리꽃의 코끝에 빗방울 하나가 대롱대롱 걸렸다. 내가 묻는다.

"나리꽃아, 무슨 보석을 코에 걸었어? 보석은 목이나 귀에 걸어야지."

그랬더니 나리꽃이 이렇게 받는다.

"이게 다 너네들 탓이야. 너네들이 항상 그랬잖아. 코에 걸면 코걸이라고. 그래서 난 코에 걸어도 되는 줄 알았잖아."

나리꽃 덕분에 잠시 웃고 지나간다.

빗방울이 맺힌 소나무
 빗방울이 맺힌 소나무
ⓒ 김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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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에도 나무들이 있다. 이 나무는 소나무이다. 다른 나무들과 달리 소나무는 가늘고 섬세한 손가락을 내밀어 지금 빗방울 잡기 놀이에 한창이다. "으아, 잡아, 잡아!" 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나오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어찌나 섬세한지 빗방울을 하나도 깨뜨리지 않고 그대로 잡아낸다. 그것도 한두 개가 아니라 무수한 빗방울이 소나무의 손가락 속에 한가득이었다.

빗방울 맺힌 나뭇가지
 빗방울 맺힌 나뭇가지
ⓒ 김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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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뭇가지 하나가 투명한 물방울 보석을 목에 주렁주렁 걸고 있다. 한마디 하지 않을 수 없다.

"거, 아무리 보석이 좋다지만 너무 많이 걸친 거 아닌가? 그러다 목 부러지겠다."

그러나 나뭇가지도 지지 않는다.

"모르는 소리 말아요. 물방울 보석도 다 비 오는 날 한때라구요. 이럴 때 실컷 물리도록 걸쳐 보아야 해요.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바람이 다 훑어가거나 햇볕이 몽땅 걷어간다구요."

윈도브러시 자국
 윈도브러시 자국
ⓒ 김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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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집의 자동차 앞유리에 윈도 브러시가 지나간 자국이 선명하다. 한창 비가 올 때는 빗물이 쉼 없이 흘러내렸을 것이다. 앞서던 빗방울은 윈도 브러시가 한번 지나갈 때마다 깨끗이 옆으로 쓸려나갔을 것이다. 빗물이 당황스럽지 않았을까?

"야, 우리 앞에 가던 빗방울들 갑자기 다 어디로 갔냐? 그러게 말야. 뭐가 한번 휙 지나가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다 어디론가 사라져버렸어. 도시는 역시 너무 위험해. 빨리 아래로 피하자."

알로카시아 잎에 맺힌 빗방울
 알로카시아 잎에 맺힌 빗방울
ⓒ 김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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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오면 그냥 비가 떨어져 세상을 적시는 것 같지만 알고 보면 그런 게 아니다. 비가 오면 사실은 하늘의 은하수가 세상으로 쏟아진다. 우리는 그것을 알 수가 없지만 알로카시아의 넓은 잎은 그 사실을 분명하게 알고 있다. 알고 있는 것으로 끝내지 않고 비를 타고 내려온 은하수를 잎에 담아 우리에게 보여주기까지 한다. 어느 연립주택의의 화단에서 만난 알로카시아 잎이 그 사실을 알려주었다.

노란 차의 옆에 맺힌 빗방울
 노란 차의 옆에 맺힌 빗방울
ⓒ 김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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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는 내리면서 자화상도 한 장 그려두고 싶어한다. 누구나 자화상 한 장쯤은 갖고 싶을 것이다. 비가 노란색 자동차의 옆에 비 내리는 스스로의 모습을 그린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노란 자화상으로 그린 것으로 미루어 노란색을 많이 썼던 고흐의 영향을 받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차에 맺힌 빗방울
 차에 맺힌 빗방울
ⓒ 김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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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는 무엇이나 있는 그대로 적셔준다. 가령 우리가 붉다면 우리들을 붉게 적셔준다. 우리가 노랗다면 우리를 노랗게 적셔줄 것이다. 비는 우리가 아닌 것으로 우리를 적시려 들지 않는다. 적시면서 우리들의 색을 좀 더 진하게 해준다. 그러니 비 오는 날 우리는 비에 젖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비의 도움을 얻어 우리의 색에 젖어든다.

작은 물웅덩이에 비친 십자가
 작은 물웅덩이에 비친 십자가
ⓒ 김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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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은 저 하늘에 있는 것일까. 그렇게 물었더니 비오는 날 골목의 작은 물웅덩이에 비친 십자가가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그렇게 자꾸 하늘만 쳐다보며 구원을 찾길래 하도 답답하여 비 오는 날 구원이 어디에 있는지 알려주려고 이렇게 구원을 땅으로 내렸다.

"매일 하늘만 쳐다보지 말고 땅에 있을 때 좀 잘해."

방충망에 맺힌 빗망울
 방충망에 맺힌 빗망울
ⓒ 김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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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란다의 방충망에 빗방울 하나가 잡혔다. 빗방울을 들여다보니 앞의 아파트 두 채가 빗방울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더 크고 더 화려한 아파트를 장만하겠다고 아등바등 사는 인생. 그렇게 살면 살수록 물방울 하나만 한 작은 세상에 갇히는 것이라는 계시라도 되는 것일까.

비 오는 날이라고 하면 배추전에 막걸리 한잔을 곁들이는 술자리가 최고이긴 하지만 골목길을 어슬렁거리며 비가 만들어낸 우연의 예술품을 감상하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다. 전시 기간이 길지 않으니 비 올 때 부디 좋은 기회를 놓치지 마시라.


태그:#비가 만들어낸 사진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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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메라를 갖고 돌아다니면 세상의 온갖 것들이 말을 걸어온다. 나는 그때마다 사진을 찍고 그들의 말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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