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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독립운동가.'

 

과거 호남지역에서 진보정당 활동을 하는 인사를 가리키는 말이라고 한다. DJ의 영향력이 거의 절대적인 호남지역에서 '반DJ' 성격을 가지는 진보정당에서 활동하려면 일제시대 독립운동을 하는 것처럼 큰 용기가 필요했다는 뜻이 담겨 있다. 

 

DJ가 97년 대선에서 승리하기 전까지 진보정당세력은 끊임없이 '시기상조론'에 시달렸고, '정권교체가 우선'이라는 논리에 많은 걸 양보해야 했다. 그래서 "DJ와 진보정당은 애증관계에 있다"는 평가가 나오는 것이다.

 

"DJ의 민주대연합론, 자유주의 정치가의 태생적 한계 보여줘"

 

비판적 지지론, 민주대연합론, 민주정부수립론 등은 DJ-진보정당의 관계와 밀접한 담론들이다. 복잡한 설명이 가능한 이 담론들을 단순화하면 'DJ만이 유일한 대안이다'라는 얘기로 정리된다. 그래서 독자후보론 등 '독자노선'은 정권교체의 걸림돌로 치부됐다. 이는 한국사회에서 독자적 진보정당의 성장이 더뎠던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노회찬 진보신당 대표는 "민주대연합론 등은 김대중 시대를 강화하기 위해 '김대중 이후'를 위한 종잣돈까지 흡수해 가는 측면이 분명히 있었다"며 "재야의 수혈 등 수많은 시도 끝에 김대중 시대가 열렸다는 점에서 (DJ와 진보정당세력은) 긴장관계에 있었다"고 평가했다.

 

노 대표는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의 꿈은 김대중 정부를 세우는 것이었지만 진보정치세력에게는 김대중 시대의 한계를 뛰어넘는 준비와 노력이 필요했다"며 "그런 점에서 DJ가 진보정당 성장의 걸림돌이었다는 표현은 적절치 않다"고 강조했다.

 

조승수 진보신당 의원은 "애증이 교차하는 분이었다"고 말한 뒤, "후보단일화 실패의 한쪽 책임자이고 90년 이후 민주대연합을 얘기하면서 진보정당의 독자적 정치세력화를 가로막고 있었다"며 "자유주의 정치가 가진 태생적 한계였다"고 지적했다.

 

조 의원은 "김대중 정부 시절인 2000년에서야 민주노동당이 창당했는데 87년 민주화투쟁과 노동자 대투쟁 직후 진보정당이 출현하고 (역사적 임무를) 담당했어야 했다"며 "하지만 DJ라는 탁월한 정치인이 블랙홀 역할을 하면서 독자적 진출이 늦어졌다"고 말했다.

 

"민주대연합론에 기초해서 평민당, 국민회의 등을 창당하면서 재야수혈을 통해 끊임없이 자원을 흡수해갔다. '한국사회에서 진보정당은 상당기간 불가능하다, 그래서 범민주세력, 자유주의정치세력에 들어와서 힘을 키워야 한다'는 논리를 폈다. 이것이 결국 진보정당의 성장을 가로막은 역할을 했다고 본다." 

 

오병윤 민주노동당 사무총장은 "민주주의를 진전시키자는 데는 합의했지만 노동자문제 등과 관련 대립도 있었다"며 "그런 대립과정에서 민중진영은 노동자 중심의 독자정당을 창당하기에 이르렀다"고 말했다.

 

오 총장은 "현실진단에서 진보진영은 좀더 근본적이고 급격한 변화를 원했던 반면, DJ는 현실적 방식을 통해 사회를 변화시키길 원했다"며 "그런 방법론을 놓고 (DJ와 진보진영이) 긴장하고 대립했다"고 설명했다.

 

다만 김창현 민주노동당 울산시당 위원장은 "DJ는 오랫동안 민주화운동을 재야운동권과 함께 해와서 민주투사의 이미지가 있었다"며 "그래서 그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재야운동권으로부터 수혈할 수 있었던 것"이라고 '수혈론'을 옹호하기도 했다. 

 

"해방 이후 가장 민주적 정부에서 사회양극화 심각하게 벌어져"

 

물론 민주화를 위한 DJ의 오랜 헌신이 진보정당운동을 가능케 한 원동력이었다. 그와 재야운동권의 민주화투쟁으로 자유의 영역에서 커다란 진보가 이루어졌다. 이러한 '공로'를 진보정당 인사들도 대체로 인정한다. 

 

국민승리21과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등 오랫동안 진보정당에서 활동해온 이재영 <레디앙> 기획위원은 "한국정치에서 DJ는 상당히 개혁적인 정치가였고, 민주주의의 진전에 오랫동안 헌신함으로써 진보정당이 활동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고 평가했다.

 

정종권 진보신당 부대표도 "DJ는 한국정치에서 정권교체가 가능한 보수양당체제를 정립시키려는 보수정치를 했다"며 "하지만 반독재민주화투쟁에서 보인 그의 리더십과 역할로 인해 진보정치의 공간이 열린 것도 사실"이라고 말했다.

 

특히 DJ가 남북정상회담, 6·15 공동선언, 금강산관광, 경의선 개통, 개성공단 설립 등을 추진함으로써 한국사회내 '반공컴플렉스'를 상당히 해체한 점도 진보정당에는 '긍정적 요인'으로 작용했다. 

 

김창현 위원장은 "2000년 6·15 공동선언은 통일을 지향하는 진보정당에 하나의 이정표가 되었다"며 "북한의 실체를 인정하고 낮은 단계의 연방제에 합의한 것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진보정당 인사들이 공통적으로 DJ를 비판하는 대목이 있다. 그것은 IMF 위기극복을 명분으로 신자유주의 정책을 적극 수용했다는 점이다. 이는 가장 강렬한 비판의 지점이다.

 

노회찬 대표는 "IMF라는 전대미문의 경제위기 속에서 임기를 시작하다 보니 신자유주의적인 정책을 가장 많이 쓰는 악역을 맡았다"며 "김대중 정부에서 노무현 정부까지 해방 이후 가장 민주적인 정부에서 사회양극화가 가장 심각하게 벌어지는 역설 아닌 역설이 벌어졌다"고 꼬집었다.

 

김창현 위원장은 "대통령을 만든 조건이기도 했던 IMF는 DJ를 신자유주의 전도사로 만들어 우리와 화해할 수 없는 싸움을 하게 만들었다"며 "자본시장 자유화, 노동시장 유연화, 공기업 민영화, 대대적인 노동자 해고 등을 마구 몰아쳐 강력한 저항을 형성할 수밖에 없었다"고 토로했다.

 

이재영 기획위원은 "<대중경제론>에서는 민중주의적이고 케인즈적인 경제정책을 표방했으나 집권한 뒤에는 신자유주의 정책을 적극 수용하고 강력하게 실천했다"며 "민주노총이 공식방침으로 '대통령 사퇴'를 결정하기에 이르렀다"고 지적했다.

 

"민주주의, 인권, 평화에 이어 '평등'을 추가해야"

 

DJ의 서거는 한 시대의 마감을 뜻한다. '3김시대'라는 영웅시대가 끝났고, '민주 대 반민주'라는 담론의 유효기간이 끝났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진보정당세력들이 이제 '포스트 DJ 시대'를 고민해야 할 처지에 놓여 있다.

 

노회찬 대표는 "포스트 DJ는 지난 2002년 대선에서 노무현이라는 인물이 등장하면서부터 시작되었고 지금 짧은 과도기를 지나고 있다"며 "독재와 민주가 부딪치고 3김이 쟁투하던 시대를 지나 이제는 무엇과 무엇이 부딪쳐야 하는가"라고 화두를 던졌다.

 

노 대표는 "지금은 3김 이후 시대의 정치구도가 형성되지 않은 과도기"라며 "앞으로 새로운 시대는 정치선진국들이 걸어간 길, 즉 살림살이를 놓고서 보수적 노선과 진보적 노선이 경합하게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DJ는 여전히 넘어야 할 큰 산이다. DJ가 고인이 되긴 했지만 진보정치가 DJ를 넘을 만큼 성장하지 못했다. 우리 사회가 가야 할 곳은 87년이 아니라 한걸음 더 내딛어 민주, 평화, 민생이 함께 하는 곳이다. DJ의 서거로서 역사의 한장이 마감되었지만 새로운 장에서 가장 큰 책임을 져야 할 세력은 진보정치세력이다."

 

조승수 의원은 "포스트 DJ라는 개념이 가능할지 회의적"이라고 말한 뒤, "탁월한 정치적 식견, 정치철학, 카리스마를 가진 인물이 나타날 수 있는 정치환경이냐는 것"이라며 "지금은 한두 명의 영웅에게 모든 것이 집중되는 구조가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조 의원은 "민주 대 반민주의 구도로 회귀할 수 없는 사회적 과제들이 비중있게 등장하고 있고 진보정당은 이를 해결해야 한다"며 "진보정당이 아직 미약하긴 하지만 더 많이 노력하고 국민적 지지를 받기 위한 과정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김창현 위원장은 "일부에서는 한나라당을 깨기 위해 민주당과 연립정부를 구성해야 하지 않느냐고 하는데 이것은 옳지 않다"며 "이런 때일수록 진보적 대안을 제출하는 야당이 더욱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김 위원장은 "DJ만한 철학있는 통일관을 가진 인물이 보이지 않는 민주당이 'DJ 적자'를 쉽게 운운하면 안된다"며 "DJ의 공은 인정하더라도 그가 보인 한계를 뛰어넘어야 한다는 점에서 향후 주인공은 민주노동당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포스트 DJ시대'에 진보정당이 해야 할 역할과 관련, 김종철 진보신당 대변인의 다음과 같은 지적은 음미할 만하다.

 

"DJ 서거 이후 그를 평가하는 대목에서 빠지지 않는 게 민주주의, 인권,  평화(남북관계) 등 세 가지이다. 그런데 DJ에게 빠져 있는 게 있다. 그게 뭐냐 하면 '평등'이다. DJ한테는 '평등'이 빠져 있다. 향후 진보세력은 평등을 선점해야 한다."




태그:#김대중, #진보정당, #노회찬, #조승수, #김창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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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전남 강진 출생. 조대부고-고려대 국문과. 월간 <사회평론 길>과 <말>거쳐 현재 <오마이뉴스> 기자. 한국인터넷기자상과 한국기자협회 이달의 기자상(2회) 수상. 저서 : <검사와 스폰서><시민을 고소하는 나라><한 조각의 진실><표창원, 보수의 품격><대한민국 진보 어디로 가는가><국세청은 정의로운가><나의 MB 재산 답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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