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 폭력, 국가배상으로 책임 묻자

백철 기자
2008년 6월, 경찰이 촛불시위대를 강제해산시키기 위해 곤봉을 휘두르고 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2008년 6월, 경찰이 촛불시위대를 강제해산시키기 위해 곤봉을 휘두르고 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9월 30일, 국가를 상대로 한 고 백남기 농민 유가족의 손해배상 재판이 시작됐다. 이날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첫 변론기일에서 유족 측은 백씨가 경찰의 물대포 때문에 사망한 것이라며 물대포 살수차에 대한 현장검증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지난 3월 백씨의 가족은 국가와 강신명 당시 경찰청장 등을 상대로 2억4000만원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한 바 있다.

그동안 손배소는 시민을 상대로 한 국가의 무기였다. 지난 10년간 경찰은 시위 진압과정에서 벌어진 경찰장구 훼손, 경찰관 부상에 대해 시위 주최 측을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해 왔다. 20여건의 손해배상 소송에서 경찰은 단 한 번도 패소하지 않았다. 특히 2009년 쌍용자동차 파업 이후 경찰은 쌍용차 노동자들을 상대로 11억원대의 손해배상 소송을 벌여 승소하기도 했다. 백씨가 쓰러진 1차 민중총궐기 이후 경찰은 ‘손해배상 특별팀(TF)’을 꾸렸다. TF에는 변호사 자격증이 있는 경찰관 15명이 소속된 것으로 알려졌다. 올해 2월 경찰은 민중총궐기 투쟁본부 등을 상대로 3억8000만원의 손배소를 제기했다.

백씨 유가족 대리인인 이정일 변호사는 시위 참가자들이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얻어낸 사례도 드물지만 있었다고 말했다. 이 변호사는 “2011년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반대집회 당시 경찰이 쏜 물대포에 부상을 당한 시민들이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받아낸 전례가 있다”며 “1차 민중총궐기 집회가 불법집회였고, 백남기 농민이 경찰버스에 걸린 밧줄을 잡아당긴 사실이 있기 때문에 국가배상이 안 된다고 볼 수도 있으나, 이는 과실상계(손해배상금을 따질 때 피해자의 과실 정도를 참작하는 것)가 될 수는 있어도 국가배상 자체는 법원이 인정할 것”이라고 말했다.

판례 보면 경찰의 시민 폭력 엄격 금지

실제 국가배상 관련 판례를 보면 아무리 시위가 불법·폭력의 양상을 보인다고 해도 법원은 경찰이 시위대의 신체에 상해를 입히는 행위를 엄격히 금지했다. 국가를 상대로 한 손배소에서 승소한 바 있는 ㄱ씨는 “어떤 이유에서라도 시민의 안전을 지켜야 할 국가가 시민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것을 그냥 넘어가선 안 된다”며 “재판과정에서도 국가 권력이 국민을 윽박지르고 무시한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고 말했다. 미국산 쇠고기 반대 촛불집회가 한창이었던 2008년 6월 29일, 시민단체 활동가였던 ㄱ씨는 비복종운동의 하나인 ‘눕자 행동단’의 일원이었다. 이날 자정, 경찰이 시위대 해산을 위해 서울 중구 성공회 성당 앞 골목길에 모이자 눕자 행동단 등 100여명의 시민이 골목길을 가로막고 누워 경찰의 진출을 방해했다. 경찰은 이들을 무시하고 발로 밟으며 골목길을 통과했고, 일부는 시민들에게 방패와 곤봉을 휘둘렀다. 이 과정에서 ㄱ씨는 전치 3주의 부상을 입었다. 사건 1년 4개월이 지난 2009년 10월 8일, 서울중앙지법은 ㄱ씨 등 원고들의 손을 들어줬다. 불법집회 참가자들을 해산한다는 명분이 있더라도 경찰이 시민들에게 마구 폭력을 휘둘러서는 안 된다는 취지였다. 당시 법원은 경찰이 눕자 행동단을 상대로 방패, 곤봉 등을 휘두른 행위를 “예측되는 피해의 위험성에 비추어 시위진압의 방법이 현저하게 합리성을 결한 것”이라고 판시했다.

당시 ㄱ씨 측 변호인이었던 송기호 변호사는 “눕자 행동단 사건의 경우 피해자도 여러 명이었고 현장에서 경찰 폭력행위를 본 사람도 많았기 때문에 경찰이 항변할 여지가 많지 않은 사건이었다”고 설명했다. 송 변호사는 “사실 경찰의 폭력행위에 대해서 손해배상 청구 등을 통해 적극적으로 대응해야 같은 일이 재발하지 않는다. 하지만 결론이 나기까지 시간도 오래 걸리고 막상 배상 액수도 큰 것이 아니어서 그동안 판례가 많이 쌓이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ㄱ씨도 사건 발생 3년이 지난 2011년 6월이 되어서야 확정판결을 통해 배상금 380만원을 받을 수 있었다.

눕자 행동단은 비폭력 운동을 벌였다. 하지만 비폭력 운동이라고 보기 어려운 경우에도 경찰은 시위대에게 폭력을 행사하면 안 된다. 1996년 8월, 연세대학교에서 열린 한총련의 통일대축전은 소위 ‘연대사태’로 번졌다. 당시 경찰은 헬기를 통해 학교 건물 옥상에 진입해 학생들을 강제 연행했다. 연대사태 당시 건국대 학생 ㄴ씨는 경찰을 피해 도망치다가 경찰이 던진 돌에 눈을 맞아 왼쪽 눈을 실명했다. 서울대 학생 ㄷ씨는 헬기 진입작전을 하던 경찰이 던진 수류탄에 발등을 맞아 전치 6주의 부상을 당했다. ㄴ·ㄷ씨 등 7명의 대학생들이 국가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소송(2000년 4월 확정)에서도 법원은 학생들의 손을 들어줬다. 이정일 변호사의 말처럼 법원은 통일대축전이 ‘불법·폭력집회’가 된 것에 대해 과실상계를 했을 뿐 경찰의 과잉진압은 정당한 직무집행 범위를 넘어선 것이라고 판시했다.

과실상계 따져 경찰 과잉진압 배상

하지만 백남기 농민 유가족 외에 민중총궐기 집회에서 부상당한 이들의 국가를 상대로 한 손배소 제기는 알려진 바 없다. 민중총궐기 투쟁본부에 따르면 1차 민중총궐기 당시 부상당한 시민은 백씨를 포함해 최소 29명이다. 한 30대 남성은 두피가 7㎝가량 찢어지는 부상을 당했다. 한 20대 남성은 왼쪽 손목이 부러졌다. 2008년 촛불집회 당시 국가배상 사건을 다룬 바 있는 조영선 변호사는 “민중총궐기가 끝나고 경찰에서 1500명이 넘게 수사선상에 올렸다. 부상을 당한 분들 중에서 국가배상 소송을 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지만, 소송을 하려면 일단 자기가 민중총궐기에 참여했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는 점이 걸렸다. 손배소 제기가 곧바로 경찰 수사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에 그런 부담이 있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눕자 행동단 사건 피해자인 ㄱ씨는 국가 대상 손배소를 제기하기 전에 증거를 철저히 모아야 한다고 말했다. ㄱ씨는 부상을 당한 즉시 병원에서 진단서를 끊었다. 또한 자신의 전치 3주 진단이 경찰 폭력에 의한 것을 입증할 만한 사진자료도 확보했다. 1심에서 눕자 행동단 진압을 담당했던 경찰관이 법정에 출석해 폭행은 없었으며 원고들의 주장은 거짓이라고 증언하자 ㄱ씨는 현장이 담긴 영상을 찾았다. 다행히 한 인터넷 방송국 카메라의 녹화파일 속에 현장 영상이 있었다. ㄱ씨는 “2심 진행 중에 우리가 영상을 증거로 제출했다. 법정에서 영상을 틀면서 제가 직접 1초 단위로 재생과 정지를 반복하면서 누워 있는 사람이 원고 중 누구인지, 경찰이 어떻게 방패로 사람을 때리고 있는지 일일이 설명하기까지 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ㄱ씨는 “3년을 걸려 승소하긴 했지만 사실 개인이 국가권력을 상대로 소송하는 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개인이 공권력에 의해 피해를 입으면 인권위나 권익위가 시민들을 지켜주는 게 올바른 나라 아니냐. 그런데 이런 기구들도 권력의 눈치만 보고 있으니 결국 개인이 알아서 할 수밖에 없다”며 한숨을 쉬었다.

2000년 당시 한총련 학생 ㄴ·ㄷ씨의 변호인이었던 하승수 변호사(녹색당 공동운영위원장)는 시위 진압과정에서 폭력을 휘두른 경찰관 개인에 대한 책임도 물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 변호사는 “국가배상이 이뤄진다 하더라도 직접 폭력을 저지른 경찰에게는 아무런 책임이 돌아가지 않는 게 문제”라고 말했다. 그는 “국가배상법에서도 과실을 일으킨 공무원에게 ‘구상할 수 있다’라고만 되어 있고, 시민에게 폭력을 휘두른 경찰 당사자나 지휘계통에 있는 자들이 인사상의 불이익을 받았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다”며 “백남기 농민 사건도 따지고 보면 과거 이한열, 강경대 사건처럼 경찰의 과잉진압 폭력에 의한 사건 아니냐. 경찰관이 직접 불이익을 받게 하지 않는 이상 경찰이 스스로 과잉진압을 반성하거나 재발방지 노력을 할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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